[농부가 만난 사람들 -1]
새벽 3시에 하루를 시작한다. 더 일찍 일어나 들로 나가고 싶지만 날이 밝지 않아 주저할 뿐이다. 당연히 마을에서 가장 먼저 하루를 시작한다. 오래된 습관이요, 삶의 규칙이다. 삶의 원칙처럼 지켜가고 있기에 하는 일마다 최선을 다하고 최고가 되는 출발점이다. 집과 일터는 늘 정갈하다. 눈으로는 섬세하게 살피고, 손과 발을 허투루 놀리지 않기 때문이다. 서 회장님은 지금 대추농사를 짓고 있다.
젊었을 땐 집 짓는 일을 했다. 매사에 꼼꼼하고 부지런하며 정직했다. 집 한 채를 지어도 흠 없이 야무지게 마무리했다. 집 짓는 일을 하는 동안 주인들로부터 단 한 번도 불만 섞인 푸념이나 뒷말을 듣지 않았다. 일한 만큼 벌었다. 함께 일한 사람들을 섭섭하지 않게 대우했다. 그와 함께 일한 사람들은 지금도 관계를 맺고 있으며 때가 되면 찾아와 인사를 한다.
가족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다. 자녀들은 대범하게 키웠다. 생각과 다르게(?) 아이들에겐 너그럽고 든든한 아버지였다. 그런 믿음에 보답하듯 삼 남매는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안정된 직장에서 제 몫의 밥벌이를 하고 있다.
사모님은 서 회장님과 성격이 반대다. 서 회장님은 돌려 말하지 않는다. 까다롭고 빈틈없는 성격이다. 사모님은 인정이 많고 너그러우시며 여유가 있다. 부부는 원래 그렇게 만나게 되어 있나 보다. 그런 사모님이 답답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타박도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음을 바로 내비친다. 두 분을 보고 있으면 시골에 계신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라 절로 웃음이 나온다.
50대 초반, 청춘을 바쳐 매진했던 집 짓는 일을 미련 없이 그만두었다. 어느 정도 먹고 살 정도로 벌었으니 이젠 내려놓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성격 그대로다.
몇 년의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고 마을 이장을 맡았다. 마을 이장으로서 업무도 똑 부러지게 수행했다. 마을 사람들의 요구사항을 새겨 들었다. 구석구석 발로 뛰고 살피며 치우침 없이 일했다. 9년을 헌신하고 미련 없이 내려놨다. 이장 한 사람의 노력으로 동네가 달라질 수 있음을 곁에서 지켜봤다.
이른 은퇴 후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다 예순을 앞두고 대추 농사를 시작했다.
집에서 3분 거리에 밭이 있다. 1,200평에 600주를 심었다. 대추가 제1 특산품인 지역에서 이 정도는 소농이다. '대추대학'을 다니며 대추 농사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배우고 익혔다.
서 회장님의 사전에 대충이란 말은 없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 묻고 찾고 실천하며 최고의 대추 농부가 되려는 꿈을 실현해 나갔다.
밭을 일구고 나무를 심을 때부터 기본에 충실했다. 서두르지 않았다. 집을 짓듯 차근차근 기초를 다져 나갔다.
서 회장님은 처음부터 하우스에 대추나무를 심었다. 적당한 간격으로 맞춤하게 들어선 대추나무는 잘 자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서 회장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서 회장님은 작지만 강한 농부, '강소농'이다.
대추는 4월부터 6월 말까지 세 번 꽃을 피운다. 보통의 과실수가 한 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과 다른 점이다. 1차부터 3차까지 어느 시기에 꽃을 피우느냐에 따라 대추의 맛과 크기가 달라진다. 더 중요한 건 기후다.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지만 농부의 노력에 의해 가을에 울고 웃는 결실이 따라온다.
그의 농법은 정직과 성실이다. '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을 가장 확실하게 실천하는 농부다.
마을 사람들은 서 회장님이 일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 그의 농부로서의 일과는 남들이 일터로 나오기 전에 끝난다. 이른 아침 운동을 마치면 바로 대추 밭으로 간다. 열병하듯 늘어선 대추나무를 꼼꼼하게 살핀다. 밭 구석구석을 천천히 돌아본다. 나무와 가지와 잎과 껍질이 말하는 소리를 눈과 귀와 몸으로 듣는다. 땅이 하는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 신경을 곤두세운다. 하루도 빠짐없는 의식이다.
기록도 철저하다. 빈틈없는 성격 그대로 농사에 임한다. 서 회장님의 휴대폰 앨범엔 그날그날 찍은 나무와 잎과 대추 사진이 많다. 조금이라도 이상이 발견되면 대추연구소나 농업기술센터에 보내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찾는다.
자연스레 그의 대추밭은 찾는 이들이 많다. 대추농사를 짓고 있거나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거쳐가야 할 견학 코스다. 서 회장님은 찾아오는 누구도 소홀히 대하지 않는다. 가끔 삐딱하게 찾아온 사람들도 그 앞에서는 바로 선다.
면적에 비해 월등한 소득을 창출하고 있지만 서 회장님도 기후 변화의 벽은 버거워하신다.
이제 칠십 중반을 바라보는 세월이다. 최근 들어 병원을 찾는 일이 잣다. 내려놓을 준비를 하고 계신다. 각자의 일터에서 인정받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자녀들은 농사에 관심이 없다. 대추농사는 동생에게 넘겨줄 계획이다. 요즘은 파크골프에 열심이다. 서 회장님의 시간은 여전히 알차고 명확하다.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도 늘 한결같다. 어느 자리에서든 회장님의 지갑은 먼저 열린다. 만나는 사람 밥 사주는 게 제일 좋다고 하신다.
마을 앞에 자리한 대추밭은 찾아오는 이들에게는 자랑거리다. 그렇게 남겨 놓은 유산이 지역 곳곳에 많다. 오래돼도 끄떡없는 집과 늘 한결같은 대추밭, 서 회장님의 남은 시간도 그와 같으리라.
<보은은 대추의 고장이다. 보은대추는 궁궐의 진상품으로 올라갈 만큼 유명했다. 허균이 저술한 '도문대작'에도 "대추, 보은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은데 열매는 크지만, 씨는 작다. 빛깔은 붉고 물기가 많으며 달다. 다른 곳의 대추는 이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서술했다. 쇠퇴했던 보은 대추의 명성을 되살린 건 농부 출신 자치단체장의 노력 덕분이었다. 대추는 보통 건 대추로 먹지만 보은 대추는 과일처럼 생대추로 먹을 수 있도록 품종을 개량했다. 지금은 1,500 가구 정도가 대추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지역의 어디를 가도 대추나무는 널려있다. 대추 수확 시기인 가을엔 10일 동안 '대추축제'가 열린다. 당연히 대추와 관련된 여러 지원정책과 교육 및 사후관리도 잘 되어 있다. 농업기술센터에서는 '대추대학'을 운영하며 해마다 우수한 농업인을 양성하고 있다. 처음 귀농했을 때도 자연스레 대추농사를 권유받았다. 품목을 정하고 왔기에 뛰어들지는 못했지만 귀농인들 대부분도 대추농사를 짓고 있다.>
<대추 한 알>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