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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에서 온 동생, 히말!

[농부가 만난 사람들-4]

by 최담

살고 있는 지역도 인구 감소가 심각하다. 한때는 인구 11만을 넘은 곳이었으나 이제는 겨우 3만을 유지하고 있다. 사람들이 떠나가도 일터와 일거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일할 사람을 구하기 어려웠다. 급속도로 진행된 고령화도 일손 부족의 원인이다. 당연히 지역에는 외국인 노동자가 많아졌다. 베트남, 필리핀, 우즈베크, 네팔 등 국적도 다양하다. 그들이 없으면 지역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왔다고 치부하기엔 그들의 역할이 매우 크다. 그들이 없으면 공장은 문을 닫아야 한다. 그들이 없으면 때맞춰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제때 수확할 수 없다. 그들이 없으면 힘든 공사 현장의 일들은 진행이 안된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 하지 못하는 일, 하기 싫은 일들을 해주는 그들은 고마운 존재들이다.


히말은 네팔에서 혼자 한국에 왔다. 3년 전이다. 얼마 되지 않았지만 10년 이상 살고 있는 사람처럼 말과 행동과 생각이 자연스럽고 바르다. 그를 처음 만나건 축구장이었다. 매주 토요일 아침 축구를 하는데 그가 함께 일하는 친구들과 운동을 하러 왔다. 모두 지역 농공단지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서로들 반갑게 악수하며 하이파이브와 통성명을 하고 초록의 잔디 위에서 둥근 공으로 금방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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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은 주변국인 인도의 영향으로 대부분 힌두교를 믿는다. 신분제는 폐지되었지만 아직 사회 전반에 계급의식이 남아있다. 히말은 나름 높은 계급에 속해 있었지만 생활은 여유롭지 못했다. 종교도 기독교다.

히말은 부모님의 이혼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과도한 음주와 폭력이 원인이었다. 어머니 혼자 다섯 남매를 키우셨다.


히말은 공부를 잘했다. 공부를 많이 해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이 발목을 잡았다. 공부는 형에게 양보하고 히말은 돈을 벌기로 마음먹었다. 형은 열심히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네팔의 명문대학에서 영어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돈을 벌기 위한 히말의 여정은 거침이 없었다. 스무 살 때 사업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남겨둔 땅을 팔아 인도에서 국수 뽑는 기계를 구입, 가게를 차렸다. 직원을 다섯 명까지 두었지만 얼마 못 가 경영난에 빠졌다. 은행에 갚아야 할 빚만 잔뜩 쌓여 갔다. 아픈 경험이었다. 그때 선교사를 만나 크리스천이 되었다. 양계를 배워 닭을 키우고 달걀을 생산해 팔았다. 얼마 못 가 닭이 한꺼번에 죽어 양계장 문을 닫았다. 시련의 연속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식당을 하고 계시던 어머니의 가게도 어려워져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었다. 히말이 기억하는 가장 힘든 시기였다.


히말은 네팔에 아내와 딸이 있다. 아내 이름은 '아이사'다. 둘은 중학교 때 만났다. 공부 잘하고 훤칠한 미남인 히말을 두 살 아래인 아이사가 먼저 점찍고 고백했다. 네팔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어 결혼을 하고 싶으면 남자 쪽 가족 모두가 선물을 들고 여자 집으로 찾아가 인사를 하고 허락을 받는다. 아이사를 마음에 두고 있던 의사가 불쑥 가족을 데리고 인사를 왔다. 아이사의 부모님은 마음에 들어 했으나 일편단심 히말만을 사랑했던 아이사는 완강히 거부했다. 두 사람의 깊고 순수한 사랑은 히말의 가족이 아이사의 집에 가지 않았는데도 결혼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히말은 결혼 전날까지 수중에 한국 돈으로 300원 밖에 없었다. 가진 게 없어도 배짱 하나로 가족들만 모시고 조촐한 결혼식을 올릴 생각이었는데 선교사가 선뜻 50만 원을 주셨다. 그 돈으로 반지를 구입했다. 신부에게 반지를 끼워준 그 순간을 히말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으로 기억한다. 반지를 보여달라고 했더니 7일 만에 잃어버렸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잃어버린 게 아니라 도둑맞았고 누가 훔쳐 갔는지 알지만 모른 체하고 있단다.

히말, 아이사, 예니


가정을 이루고 딸 예니까지 두었지만 계속된 사업 실패로 힘든 생활을 하고 있던 히말은 먼저 한국에 들어와 일하고 있던 삼촌의 권유로 이곳으로 오게 됐다.

히말이 처음 발을 디딘 곳은 태백의 한 공장이었다. 일이 힘든 것은 당연했지만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차별이었다. 집과 공장은 거리가 있었고 교통편마저 마땅치 않았다. 회사 부장님이 젊은 직원들에게 출퇴근길에 히말을 함께 태워주라며 배려해 주었다. 그 배려가 히말에겐 고통의 시간으로 다가왔다. 회사 직원들은 퇴근할 때마다 히말을 옆에 두고선 서로 태우고 가지 않겠다며 미루고 거부하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옆에서 지켜본 히말의 마음은 비참했다. 한 번은 함께 차를 타고 가는 데 히말이 못 본 줄 알고 유통기한이 지난 초코파이의 날짜를 침을 발라 지우고 먹으라며 건네주었다. 초코파이를 받아 들고 차에서 내린 히말은 한참을 들여다보다 멀리 던져 버렸다. 일보다 출퇴근이 힘들어 회사를 그만두었다. 길지 않은 시간, 태백에서는 마음이 아팠다.


그렇다고 태백에서의 생활이 아픔만 있는 게 아니었다. 처음 태백으로 오기 위해 기차를 탔을 때 옆에 앉은 분에게 핸드폰으로 태백역을 알려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분도 태백에서 내린다며 핸드폰으로 알려 주셨다. 말을 안 하고 핸드폰으로만 대화를 나누면서 히말은 자신이 혹시 실수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는 데 알고 봤더니 청각 장애인으로 말씀을 못하시는 분이었다. 나무로 십자가를 만드는 공방을 운영하고 계신 목사님이셨다. 매주 일요일에 만나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 히말에게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됐다. 목사님은 태백을 떠날 때 손수 깎은 나무 십자가를 선물로 주셨다.


두 번째 일터는 충북 영동에 있는 현장이었다. 콘크리트를 깨고 부수는 타설 공사장에서 일했다. 하루 종일 엄청난 무게와 진동이 있는 공구를 이용하다 보니 집에 오면 팔이 아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일한 지 한 달 만에 10kg이 빠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축구를 하다 골대에 부딪쳐 가슴뼈를 다쳤다. 일을 못할까 봐 숨기고 있었지만 고통이 심해 병원을 찾았다. 더 이상 일을 하지 말라며 한 달 이상의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회사를 계속 다닐 수가 없었다. 6개월 만에 그만뒀다. 영동에서는 몸이 아팠다.


몸이 회복됐을 때 아는 목사님으로부터 보은에 있는 공장을 소개받았다. 회사 분위기도 좋고 일도 충분히 할만했다. 성실하고 소통이 자유로우며 예의 바른 히말은 공장에서의 역할이 크다. 처음엔 혼자였으나 지금은 다른 친구들도 많이 데려와 같이 일하고 있다. 자연스레 이곳에서의 생활도 안정을 찾았다. 서로 힘이 되는 네팔 친구들과 가족처럼 대해 주는 교회 분들도 계신다. 그리고 토요일 아침이면 축구를 통해 함께 땀 흘리고 웃으며 마음을 나누는 한국 친구들이 있다.


외국인이 한국에 체류하며 일을 하려면 일정 기간마다 시험을 봐야 한다. 히말은 네팔에 있을 때 선교사로부터 한국어를 처음 배웠다. 지금은 막 함 없이 대화할 정도로 언어 구사 능력이 뛰어나다. 얼마 전에 있었던 한국어 능력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전체 외국인 중 당당하게 1등을 차지했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강사로도 활동 중이다. 히말은 만능 재주꾼이다. 절대음감의 소유자다. 악기도 잘 다루고 지역에서 개최된 외국인 노래자랑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축구 실력은 네팔 국가대표급이다. 나와 호흡이 잘 맞는다.

KakaoTalk_20250317_233531386_04.jpg 히말(기타)과 네팔 친구들


가난했던 히말은 집이 없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히말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원망과 투정보다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자신의 멋진 미래를 야무지게 그려 나갔다. 히말은 태어나는 아이에게만큼은 꼭 자기 집이 있다는 걸 알게 해주고 싶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국에서 열심히 일하고 모은 돈과 대출을 받아 네팔에 집을 두채 샀다. 아이사와 딸 예니의 집과 어머니와 두 여동생이 살 집이다.

네팔에 마련한 집(2층을 올리고 있다)


히말은 일반 노동자 비자를 발급받았지만 4월부터는 가족을 데리고 올 수 있다. 한국에서 함께 지낼지 아직 고민 중이다. 현실 속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는 걸 알기에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히말은 여전히 이루고 싶은 꿈이 많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네팔에 소개하는 팟캐스트를 운영하고 싶다. 선교사 공부도 하고 2026년부터는 무조건 가족과 함께 지낼 생각이다. 큰 공장이 없는 네팔에서 한국으로 와 프레스 기계 앞에서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꿈과 희망이 있었기에 견뎌냈다. 지금은 적응이 되어 거뜬히 해내고 있다. 히말은 네팔보다 많은 돈을 벌면서 알뜰히 모아 자신의 목표를 이뤄가고 있는 지금이 좋다.


"히말"의 의미는'1년 내내 하얀 산'이다. 어머니가 지어 주신 이름이다. 히말은 만년설로 지구의 지붕이라는 히말라야산맥을 가슴에 품고 자랐다. 길지 않은 시간 대단한 일들을 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그런 과정들을 통해 배움도 많았다. 슬프고 힘든 경험들도 돌아보면 멋진 추억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는 것은 네팔이나 한국에서나 마찬가지라는 것도. 어디에 가치를 두고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냐가 중요함을 깨달았다.


히말이 말했다.

"한국에 와서 저의 과거와 현재의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서 정말 좋고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히말은 이십 대 후반이지만 나를 형님이라 부른다. 처음엔 내가 젊어 보여 그런 줄 알았는데 나이를 알고 난 뒤에도 계속 그렇게 부른다. 히말이 아는 한국어 중 가장 존칭은 형님이 아닐까 생각하며 편하게 받아들인다.

히말은 멋진 친구요, 동생이다.


머무는 동안 히말이 경험하는 한국에서의 시간들이 건강하고 평온하며 행복한 일상으로 채워지길 바란다. 사랑하는 아내 아이사와 딸 예니와도 머지않아 함께 할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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