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는 듣고 전축(오디오)은 봤다. 모든 추억은 현재다
마을의 힘든 일은 모두 한마음이 되어 해결했다. 안 되는 게 없는, 신기한 일들은 어른들의 경험과 지혜가 어우러진 결과물이었다. 함께 초가지붕을 이고 삼나무를 삶아 껍질을 벗기고 삼베를 짰다. 모내기를 할 때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레 날짜가 정해졌다. 어느 순간 들판은 초록의 어린잎으로 넘실 거렸다. 세참 때 논둑에 둘러앉아 마시는 막걸리의 걸쭉한 색과 출렁임, 살짝 흘리며 들이키고 내뱉는 한마디는 어린 마음에도 한잔 걸치고 싶은 충동을 자극했다.
가끔 막걸리 심부름을 다녔다. 큰 주전자에 막걸리를 받아 올 때면 길목을 지키고 있는 형들이 한 모금씩 훔쳐 마셨다. 야속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부족한 양은 냇가의 물을 타서 채웠다. 막걸리 맛을 본 어른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오늘따라 맛이 싱겁다고 주막을 타박했다.
술을 마시진 못해도 막걸리만 보면 그 시절 들녘과 농부와 살랑이는 바람이 떠오른다. 술도 추억으로만 마신다.
새벽을 알리는 닭울음소리는 멀리서부터 가까워졌다. 눈뜨면 보이는 산과 들과 대숲은 한결같으면서도 새로웠다. 부지런한 농부의 그림은 그때부터 그려졌다. 농부의 가장 든든한 무장은 어깨에 걸치거나 허리 뒤로 둘러멘 삽이었다. 삽 하나면 두려울 것도 거칠 것도 없었다. 삽은 농부의 창이요, 칼이며 자부심이었다.
몇 해전 농부의 꿈을 키워가는 아들에게 좋은 삽을 사 주었다.
마을에 처음으로 텔레비전이 들어왔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집이었다. 최고의 인기 드라마는 '전우'였다. 전우를 보기 위해 동네 아이들이 몰려들었으나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제발 '전우'만 보게 해달라고 매달렸지만 굳게 닫힌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애타는 시간이 흘러갔다. 구세주가 나타났다. 덩치 크고 일 잘하는 형들이 빗자루를 들고 와 그 집 앞을 쓸었다. 대문이 열리며 마당까지 깨끗하게 쓸면 보게 해 주겠다고 했다. 형들은 넓은 마당을 구석구석 부지런히 쓸었다. 나머지는 형들을 응원했다. 그렇게 마당에 둘러앉아 마루에 놓인 텔레비전을 봤다. 그 집 마당은 일주일에 한 번씩 대청소를 했고 우린 '전우'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학교에 가면 윗마을 친구들은 마징가 제트와 박치기왕 김일의 프로 레슬링을 봤다며 신나게 자랑하고 떠들어 됐다.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낮은 곳에 있는 우리 마을은 MBC전파를 잡지 못했다. 왜 재미있는 건 잡히지도 않는 방송에서만 하는지 원망스러웠다. 시내로 나가는 길은 가까웠어도 KBS만 나오는 마을은 그냥 오지였다. 가끔 안테나를 높이 올려 돌리다 보면 지지직 소리와 함께 방송이 나왔다. 실루엣으로 보이는 화면도 재밌었다. 보는 게 아니라 듣는 TV였다.
TV는 세월이 흘러 바보상자가 됐다. 2006년, 아이들이 어릴 때 집에서 TV를 없앴다. 보이는 걸 보는 게 아니라,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며 생각하게 하고 싶었다.
80년 대초, 마을에 다른 문명의 이기가 들어왔다. 전축(오디오)이었다. 텔레비전 보다 컸다. 다행히 전축은 동네 형이 주인이었고 마루에 놓여 있었다. 듣기 위한 전축을 보기 위해 언제든 달려갔다. 우리가 모여들면 그 형은 의식을 치르듯 엄숙하게 LP판을 턴테이블에 올리고 바늘을 내려놓았다. 볼륨은 최대였다. 커다란 스피커에서 조용필의 '고추잠자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가 마당에서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올랐다. '단발머리' '창밖의 여자' '촛불' '여와 남'도 떼창으로 미친 듯이 따라 불렀다. 전축 하나로 시골마을의 후미진 마당은 불멸의 가객을 영접하는 열광의 콘서트장으로 변했다. 그 노래들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며 마음을 두드린다.
서울로 올라와 자취를 하며 가장 갖고 싶은 게 오디오였다. 마침 인켈에서 멋진 오디오를 출시했다. 사고 싶은 데 돈이 없었다. 마음을 알고 있던 선배 형이 장기 할부로 사 주었다. 그때도 오디오는 보면서 들었다.
시골에 와서 많은 소리를 듣는다. 도시에서는 상상도 못 하는 여러 소리들이 귓전에 맴돌고 귓가를 간지럽힌다. 눈을 감으면 다양한 소리들이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들려온다. 이곳에서도 여러 소리를 보면서 듣는다. 감사한 일이다.
분주한 아침 등굣길에 마음을 환하고 여유롭게 해 주던 반가운 친구가 있었다. 상큼한 봄날 아직 모내기를 하기 전, 논을 화사하게 수놓던 그 꽃! 이름마저도 사랑스러운 '자운영'이었다.
몇 해전, 닭들에게 줄 모이를 가져오기 위해 멀리 구례를 다녀온 길이었다. 길가 논에 활짝 핀 자운영을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잠시 차를 멈추고 손을 내밀었다. 다시 자운영을 보기까지 30여 년이 흐른 듯하다. 추억 깊은 곳에 자리한 꽃을 마주하며 동행한 아들에게 자운영과의 사연을 이야기해 주었다. 자운영의 꽃말은 '그대의 관대한 사랑'이다. 자운영의 어린순은 나물이 되고 풀은 약재가 되며, 꽃이 지면 그대로 썩어 거름이 된다. 사람과 사람의 땅에 아낌없이 모든 것을 주고 그대로 녹아내리는 그 관대한 사랑.
다시 자운영의 시절이 그립다. 농부가 되어 기계화, 대형화, 자동화 란 단어들과는 먼 길을 걷고 있다. 새벽안갯속에 자욱했던 자운영의 추억은 현재의 시간을 채워가는 양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