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송광사
고즈넉한 절은 그저 떠올리기만 해도 좋다. ‘절’이라는 말도 좋고, ‘절집’이라는 말도 좋다. ‘산사’라는 말은 또 얼마나 근사한가. ‘산사에 들다’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절이든 절집이든 산사든 그 안에 고요하게 스며들어 머물고 싶다.
절까지 가는 길도 좋다. 보통 절 주변에는 숲이 우거져 있다. 주차장에서 바로 이어지는 절보다는 일주문을 지나 물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거닐 수 있는 절이 더 좋다. 나무 사이사이 사람들이 쌓아 놓은 돌탑에 작은 돌 하나를 얹으며 마음의 돌 하나도 내려놓곤 한다.
절에 가면 대웅전에 꼭 들어가본다. 불교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보통 대웅전의 열린 옆문으로 슬쩍 안을 들여다보곤 돌아서는데, 언제부턴가 나는 불교신자가 아니면서도 대웅전에 들어가 방석을 깔고 절을 한다. 개똥철학인지 모르겠지만 모든 신은 하나로 통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리고 불상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부처님의 표정을 읽어보고 천장에 매달린 수많은 연등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한 줄로 적힌 바람들은 모두 내 마음을 담은 듯해 위안이 된다. 나만 이렇게 허기진 것이 아니었구나, 나만 이렇게 간절한 것이 아니었구나.
절에서 꼭 기웃거리는 곳이 또 있다. 바로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다. 절에서 산다는 건 어떤 일일까 하는 막연한 호기심과 동경 때문인지 모르겠다. '출입 금지'라고 적힌 곳까지 가서 그 너머 절집을 넘어다보고 댓돌에 놓인 고무신의 개수도 세어본다.
그래서일까. 나는 오래전부터 절에서의 하룻밤을 꿈꿔왔다. 지금이야 누구나 쉽게 템플스테이를 할 수 있지만, 템플스테이라는 게 생기기 전에는 불교신자나 고시생처럼 특별한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나 절에서 잘 수 있었다.
절집에서의 하룻밤을 실현시켜준 절은 순천의 송광사다. 20여 년 전 겨울, 지금 생각해보면 그 겨울 우리는 참으로 무모했다. 여대생 둘이서 대책 없이 겨울 산을 올랐으니.
그 여행의 시작은 섬진강이었다. 그 시절 틈만 나면 함께 여행을 다니던 친구 D와 나는 겨울방학에 남도로 떠났다. 당시 우리는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와 조정래 소설가의 <태백산맥> 같은 소설에 빠져 있었고, 그 책들에 나오는 현장을 밟아보는 남도 여행은 우리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섬진강을 따라 하동에서 구례까지 하루 종일 걷다가 구례에서 순천으로 넘어갔다. 순천에서 하룻밤 자고 선암사를 거쳐 조계산을 넘은 뒤 송광사 근처 민박에서 묵을 계획이었다. 조계산은 소설 <태백산맥>의 중요한 배경이 된 곳으로 여순사건 이후 빨치산들이 활동하던 무대였는데, 조계산 동쪽에는 선암사가, 서쪽에는 송광사가 있다.
그런데 생각보다 늦게 출발한 우리는 점심 즈음에야 선암사에 도착했다. 선암사는 승선교라는 아치 모양의 다리로 유명하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을 정도로 아름다운 절이다.
우리는 선암사 경내를 둘러본 뒤 조계산 등산을 시작했는데, 겨울산은 생각보다 일찍 어둑어둑해졌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바람이 치는 산속에서 급기야 우린 길까지 잃었다. 송광사 근처의 유명하다는 보리밥집이 나타나야 하는데 보리밥집은 보이지 않고 인적 하나 없는 산길이 계속 이어졌다.
별다른 산행 준비를 하지 않았으니 우산이나 우비를 갖고 갔을 리 만무했다. 우리는 그야말로 생쥐꼴이 되어 헤매면서 이러다 실족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해가 완전히 져버려 날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숲을 헤쳐나가다 보니 다행히 어느 순간 보리밥집이 보였다. 아, 드디어 송광사가 얼마 남지 않았구나.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발걸음을 재촉하니 목적지인 송광사에 다다랐다.
날은 저물어 춥고 배고프고…. 절 아래 민박집을 찾아 갈 힘도 없었던 우리는 일단 잠시 쉬었다 갈 겸 송광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또 하나의 오랜 로망을 실현할 수 있는 빛을 만났다. 절집에서 자는 것 못지않게 절밥을 먹는 것, 바로 공양을 하는 게 우리의 또다른 로망이었다. (사실 불교신자가 아니어서 일반인이 절에서 공양을 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때마침 송광사에선 저녁공양을 하고 있었고, 공양간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우연인지 우리 또래의 대학생 한 무리가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우린 이때다 싶어 그 무리에 끼어 줄을 섰고, 그 무리 속에 섞여 공양간으로 들어가 절밥을 먹었다. 오랜 허기에다 그토록 바라던 절밥이니 오죽 맛있었으랴.
저녁을 먹고 나오니 학생들은 다시 마당 한쪽에 모여서 떠들고 있었다. 이러다 잘하면 절에서 잠까지 잘 수 있겠다 싶어 우린 또 그 무리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두 가지 로망을 이렇게 쉽게 실현하다니 웬 횡재인가 하면서.
조금 있으니 한 스님이 학생들에게로 와서 방 배정을 했다. 알고 보니 그들은 어느 대학의 불교학생회 소속 학생들이었고, 송광사에 자주 오는 모양이었다. 아이러니한 건 불교동아리에 소속된 학생들은 절에서 자고 싶어하지 않았다. 스님이 방 배정을 해주자, 학생들은 민박집에서 자면 안 되냐며 떼를 썼다. 아마도 절에서는 술을 못 마시고 떠들지도 못하니 그런 듯했다. 그러자 스님은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스님이 우리 둘을 쳐다보며 “자네들은 뭔가?”라고 묻는 게 아닌가. 헉, 우리가 일행이 아닌걸 알고 있었다니. 우린 눈치채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스님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우리 둘만 물에 빠진 생쥐 꼴인 데다 낯선 얼굴이었을 것이다.
그제서야 우린 쭈뼛쭈뼛하면서 이실직고했다. 산을 타고 내려와서 배가 고파 저녁을 얻어 먹었는데 절 아래 민박집에서 잘 예정이라고. 그랬더니 위아래를 쳐다보던 스님은 지금 이 시간에 방 구하기도 어려우니 여기서 자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둘만 따로 방을 내줬다. 그렇게 우린 오래도록 바라던 로망을 뜻하지 않게 이룰 수 있었다.
절집에서의 그 겨울밤은 지금도 생생하다. 절에선 일찍 모든 불을 껐고, 우린 따끈한 구들방에서 몸을 풀었다. 생전처음 누워본 요사채에선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하얀 한지를 바른 창으로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 전날 내리던 비는 밤새 눈으로 변했고, 우린 소복소복 쌓이는 눈 소리를 들으며 조잘조잘 수다를 떨다가 달콤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문을 열어보곤 어찌나 놀랬던지. 요사채 앞 마당이 발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눈으로 덮여 있는 게 아닌가. 고즈넉한 절집에 하얀 눈이 쌓여 더 고즈넉해진 아침. 우리는 벅찬 가슴을 진정시키며 절집 마당에 발자국을 찍었다.
이른 공양을 마친 우리에게 어제의 그 스님이 다가와 차 한 잔을 주겠다고 했다. 우린 스님을 따라가 정갈한 다도실에서 스님이 내려주는 녹차를 마셨다. 스님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얘기를 하다가 스님이 암자에 올라가보겠냐고 했다. 암자까지 가는 길이 좋고 거기 다른 스님이 있는데 가서 차 한잔 하자는 것이었다.
우린 스님과 함께 절 뒤편 산길을 따라 암자로 올라갔다. 눈 쌓인 대나무 숲길은 호젓했고, 얼마 안 가 도착한 암자의 이름은 '불일암'이었다. 작은 암자에서 나이 지긋한 한 스님이 나오는데, 알고 보니 법정스님이었다. 당시엔 법정스님의 유명세가 그렇게까지 대단하진 않았지만 여러 책을 통해 알고는 있었다.
법정스님은 소탈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며 차를 한 잔씩 줬다. 법정스님이 그렇게 유명해질지 그때 알았더라면 좀 더 잘 기억해둘 텐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스님으로부터 엽서를 받았고, 작은 걸상이 놓인 암자의 풍경만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뜻밖의 호사에 뜻밖의 인연까지 얻은 우리는 암자에서 내려와 우리를 환대해준 스님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다음 여정을 위해 출발했다. 가끔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그런 일이 있었을까, 내가 만난 그분이 정말 법정 스님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행히 동행한 친구가 기억하고 있을 테니 거짓이나 환상은 아닐 것이다.
법정스님이 손수 지어 17년 간 머물렀다는 불일암과 대나무숲이 좋았던 산책로는 이제 '무소유길'이라는 이름으로 둘러볼 수 있다고 한다. 언제 한번 그 친구와 함께 그 길을 다시 걸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