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빛의 여정 8화

빛의 여정 8화

by 포텐조

[소설] 빛의 여정 8화 / 1장 불씨 운반자



1장타이틀.png


광장에는 행사 전의 분위기로 사람들이 이리저리 오가고 있었다. 반나절 간 눈을 붙인 로이딘 빅혼은 누가 먼저 문을 두들겨 깨우기도 전에 미리 일어나, 나무꾼 친구들에게 인사를 했다. 요새 통 잠이 안와서 그런지 선 잠을 자고 피곤함이 풀리지 않아 그나마 눈을 붙이고 자세를 바꿔가며 시간을 보내는 정도였다. 정오의 해가 살짝 저물었을 무렵 로이딘은 각자 역할을 맞게 수여식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광장은 큰 모닥불을 붙이며 신년행사를 치루거나, 오늘처럼 불씨 수여식을 위해서 마련된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동서남북으로 박혀 하늘로 길게 뻗어있는 나무 기둥에는 곱디 고운 천이 매달리고 그 천의 중간에는 크리넬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동쪽 부족 루민과 남쪽 부족 사유타의 일행들도 찾아와 부족 별로 할당된 공물을 광장 한편, 마련된 간이 창고에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서 광장까지 길게 늘어선 마차와 일행들의 규모는 이그네움의 댓가가 얼마인지 어림진작하게 했다.


광장 동쪽으로는 크리네스 4세의 집 혹은 족장의 거처가 있었고 불씨 운반자를 맞이하고 나서 광장으로 나가 의식을 치룬 후에 만찬을 대접하는 식으로 행사를 진행했다. 거의 대부분의 마을 거주민들이 나와서 광장 한 가운데에서 치뤄지는 의식을 구경했고 앞이 안 보여서 성벽의 망루쪽으로 올라가 구경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연하지만 경비병들이 성벽으로 몰려오는 인원들을 차단하는 것이 정상이였지만 이제는 그려려니 하고 익숙한 얼굴들은 내버려두기까지 했다. 자기들이 내놓은 귀한 재산들을 보기 좋게 뜯어가는 것을 구경하며 광장에 비추어진 불이 곧 자신들의 손에 쥐어지리란 기대에 만족해야 했다.


로이딘은 간간히 동쪽에서 찾아왔던 음유시인도 보이고, 예행연습하는 경비병들을 보며 간만에 활력이 도는 마을 내 풍경을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러다 맞은 편에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시테온과 루네였다. 항상 그렇지만 잔망스러운 표정을 짓고 오는 시테온과 무뚝뚝 혹은 변동없는 표정을 보이는 루네는 로이딘과 친해진 지 얼마되지 않았다. 동시에 정착한 지도 얼마되지 않았다. 그들도 떠돌이 생활을 하다 정착한 피난민이었기 때문이다.


시테온이 달려와 로이딘의 발치 앞에 도달하자 말을 꺼냈다.

"엄청난 거 하나! 니가 없어진 사이에 루네가 잡아 먹힌 거 아니냐고 걱정을 하더라고!"

로이딘은 그의 말을 듣고 순간 해가 뜰 때 마주친, 장로의 아들이 했던 걱정도 떠올랐다.

"나한테 하는 걱정은 아니였지만 아침에 아르한도 그랬어. 핏빛 늑대 없었냐면서."

"걔는 원래 그렇지 뭐."

왼쪽 뺨에 세로로 난 흉터를 가지고 있는 시테온은 매번 후드와 어깨까지 감싸진 갈색 코울을 뒤집어 쓴 채 모습을 드러냈다. 마을 밖을 나가든 혹은 마을 안에 있든 대부분 코울을 입고 있던 시테온에게 어느 날은 로이딘이 궁금해서 물어보니 "아나티리캄 약초꾼"의 전통이라고 시테온이 답했다


그는 집안 대대로 대륙 동부를 평생 돌아다닌 약초꾼 집안이였다. 약초를 분별하여 사용하는 지식과 민간 전승등을 배웠다. 원래 그는 약초꾼의 정형화된 루트인 아나티리캄의 무당인 "텝 오부자"가 되는 길에 들어서야 했다. 예비 텝 오부자들은 원시적인 형태의 마법을 부릴 수가 있었으며 그것을 숙달하는 데 있어 평생을 걸쳐 익혀야만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테온에게 영원한 추위가 찾아오면서 당분간인지 영원한건지 약초도 얼어 죽었고 사원과 유적도 눈과 얼음에 묻혀버리는 통에 배우고 익힐 장소와 여건이 되지 못해서 크리네스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적어도 지금은 적응을 어느정도 한 모양인지 꽤나 까불며 지내고 있는 듯 했다.


"누구는 좋겠다~ 걱정해주는 사람 있어서"

시테온이 두 팔을 벌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루네는 마치 시테온이 없기라도 한 것 마냥 깔끔하게 무시하고 짧게 로이딘 빅혼과 인사했다.

"허튼 소리나 하지 말고 옆에나 앉아라 그냥"

로이딘이 시테온의 다리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루네는 이미 저 만치 앉아 있었다.

루네는 가죽을 어깨에 두른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키가 큰 여자였다. 크리네스로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남성으로 이루어진 사냥꾼 일행에 루네가 합류한 것은 독보적으로 활을 잘 쏘는 실력 때문이었다.


그녀가 사냥을 주 업으로 삼았다 해서 사냥꾼의 혈통을 물려받지는 않았다. 추위와 약탈로 온 가족을 잃어버린 이야기를 가지고 내려오게 되었는데 헤르논 지방에서 상단을 하던 부유한 집안의 외동 딸이였다(본인이 짧게 언급해서, 시테온의 말을 빌리자면). 그래서 그런건진 몰라도 부잣집 공주님 느낌이 나는 억양이나 표현들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말이 없는 그녀는 말이 많은 시테온과 처음 보기엔 사이가 안 좋아질거란 우려와는 달리 로이딘과 셋이 잘 지내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번은 루네가 늑대 한 마리를 잡을 뻔 한 소식이 장로의 귀에까지 들리면서 확실한 여장부로 각인된 것 같았다. 장로는 든든한 "진주"라며 칭찬해주기도 했다. 그때 당시 아르한이 곁눈질로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을 루네가 이미 눈치챘으므로 씨알도 먹히지 않을 터였다. 만약 아르한이 루네를 상대로 본인의 아버지를 시아버지로 착각하고 떠 들고 다니다, 활 시위를 아르한 앞에 정면으로 들이대면 반응이 어떨 지 루네는 궁금했다.


피난민이나 방랑자를 포용하는 크리네스라도 낯선 이를 처음부터 반기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시간을 들여 지켜보면서 부족과 마을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따져보고 거주를 허락하고 있었다. 영원한 추위가 시작되면서 서부와 남부를 향해 몰려가는 피난민의 숫자와 비할 바는 아니였지만 그럼에도 동부에 사람이 몰려 이그네움이 발명되고 보급하기 전까지는 각 부족이 비상이 걸려 이들을 경계해야 했다. 로이딘도 최근에 정착한 시테온과 루네처럼 자신도 과거의 이주민이였던 지라 아무 살림 없이 홀로 놓인 처지들을 잘 알고 있었다.


앉아있던 시테온이 자신의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지나 싶더니 겨울 수수 잎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아무 말 없이 로이딘에게 잎을 흔들었으나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시테온이 수여식 때 불씨 운반자와 족장이 앉을 자리와 의식을 치루는 곳에 깔려있는 동물들의 가죽을 보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루네를 향해 말했다.

"저기 바닥 보이지? 저기에 깔린 가죽들 중에 몇 마리나 네가 잡았을 지 모르겠네"

"전부일 걸?"

루네는 시테온이 건네준 수수잎을 씹으면서 짧게 답했다. 시테온은 한 술 더 뜨는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분주했던 하룻 동안 해가 산 넘어로 차츰 넘어가고 있었다.



9화에서 계속...

"때가 차매 그 빛이 다시 솟아나리라"


(매주 화요일, 토요일 연재)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