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스타트업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보면 ‘내가 꼰대인 건가? 아니면 세상이 변한 건가?‘라는 의심이 드는 순간이 불쑥불쑥 찾아오곤 한다. 스타트업이 이야기하는 수평, 자율, 존중, 도전. 그 모든 것을 존중하지만 종이 한 장 차이로 기본과 존중 그 사이를 넘나드는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그 안에서 나는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늘 깊은 고민에 빠진다.
1. 님아, 그 슬리퍼를 꺼내지 마시오
웹툰, 게임, 음악 등 다양한 콘텐츠 스타트업을 보육하던 시절에 꽤 임팩트가 있었던 일이 있었다. 바로 한 기업의 성과 조사를 위해서 기업 면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줄줄이 들어오는 기업 임직원들은 개발자, 디자인 인력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중 개발자 몇몇은 맨 발에 슬리퍼를 그대로 신고 미팅장소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물론, 실제적인 비즈니스 타결을 위한 미팅 자리는 아니었지만 회사 임직원들과 함께 모이는 자리임에도 해당 직원의 OOTD는 나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와 달리 기업의 대표도 아무런 의견을 전달하지 않으니 나 조차도 그저 스스로 ‘요즘 문화는 많이 바뀌었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다. 이후에도 그 직원은 참 눈에 띄었다. 맨발의 슬리퍼는 양호한 수준이었고, 24시간 개방되는 보육 공간이었지만 1개월이 넘게 무단 취식을 하고 있었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다거나 혹은 폰부스가 답답하다면서 고성방가 수준으로 오픈된 공간에서 통화를 이어갔다. 행색뿐만 아니라 행동까지 다른 스타트업에도 민원을 제기하자 나는 해당 스타트업의 대표님을 따로 불러 면담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OOTD에 대한 문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직원에게 주의를 주어도 나아지지 않는다고 했고 최근 거취 문제가 있다 보니 사무실에서 정말 먹고 자고 일을 하고 거의 살다시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곧바로 시정하겠다고 했다. 결국, 해당 직원은 몇 주 후에 대표에게 권고사직을 당했다.
2. 어른 공포증
이제는 어디 가서도 내 나이는 막내가 아니라 선배와 막내 그 중간 어디쯤 애매하게 위치해 있는 나이다. 한 스타트업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대부분 동료들이 23살 ~ 28살까지 포진되어 있다 보니 내 나이는 그럴 나이가 아님에도 단연 돋보이는 나이가 되었다. 경력도, 나이도, 경험도. 그 모든 것들이 두각을 나타내었고 나는 그게 부담스러웠다. 그럼에도 수평구조를 지향하는 기업이었기에 우리는 모두 ‘님‘ 호칭으로 통일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타 부서에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경력직 담당자가 입사하고서부터 회사 구성원들의 문제점이 보였다.
사회 초년생에게 첫 회사는 아주 중요하다.
앞으로의 경력에서도 중요하지만 사회생활에서의 기본기를 닦는기틀을 마련해 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런데 중간관리자 없이 수평구조로 통일된 곳에서 함께 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과 사람에 대한 경계가 없어지고 ‘님’ 호칭을 쓰지 않고 친구처럼 업무를 주고받고 대화하는 경우가 만연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 보니 몇몇 직원들은 어르신 클라이언트와의 통화를 어려워했고 소통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매번 컴플레인의 대응은 내 몫이었다.
‘제가 어른 공포증이 있어서요’라는 구성원의 대답에 나는 혼을 낼 수도 없었고 어떠한 조언도 해주지 못했다. 그저 할 말을 잃었다. 어른 공포증이라는 단어를 인생에서 처음 들었다. 심지어 그날 하루 내 기분에 따라서 인사를 취사선택하는 모습도 마주할 수 있었는데 대표마저도 똑같은 행동을 보이고 전혀 문제가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타 부서의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경력직 담당자에게는 ‘무섭다’는 이유로 복도에서 필사적으로 눈을 마주치지 않거나 인사를 해야 하는 시점에서는 눈치를 보고 쭈뼛거리며 온몸으로 인사를 거부하는 모습을 내 눈으로 보니 참으로 암담했다. *참고로 타 부서 경력직은 구성원들과 불화를 일으키거나 언성을 높이거나 폭력적인 행동을 취한 적이 단연코 없다.
그저 나이가 많다는 것은 ‘공포’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신입들에게 그리고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동료들에게는 혼내는 사람이 없는 최적화된 회사였지만, 경력직에게는 참으로 미치고 팔짝 뛸 ‘내가 꼰대구나’ 임을 매 순간 느끼게 해주는 곳이었다. 도대체 그 공포증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3.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대표에게는 늘 꿈이 있을 것이다. 직원들이 회사에 애사심을 갖도록 하는 것 그리고 남들에게도 우리 회사가 좋은 복지와 잘 나가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목표.
그래서 요즘은 다양한 대표 혹은 C레벨의 소양 교육 프로그램도 많이 생겼고, 임원진들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가랑이가 찢어지듯이 모든 복지는 모든 회사에 최고가 될 수 없다. 그렇다 보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복지들과 문화가 난무한다.
-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꿈꾸지만, 업무는 수직적으로
- 팀원은 팀장을 평가할 수 있지만, 팀장은 팀원을 평가할 수 없다
- 작년까지는 상여금이었지만 올 해부터는 인센티브입니다
- 일을 잘해도 평판이 좋지 않다면 F 등급, 일을 못해도 평판이 좋으면 A 등급. 하지만 등급과 상관없이 업무 성과에 따라 인센티브는 지급
- 열린 소통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의견 제시는 비공식적으로 해주세요.
나는 종종 스타트업 대표님들께 묻고 한다. ‘대표님 회사에서는 어떤 문화가 있나요?’ 혹은 ‘대표님 회사에서는 어떤 것을 지향하시나요?’ 단 번에 설명하는 곳은 애석하게도 없다.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리고 수평과 자율이 자주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오히려 자유가 없고 수직적이라는 말로 들린다. 도대체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기본만 해주셔도 직원들은 평온할 수 있어요.
기본을 많이들 잊고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 세대’라는 말로 묶어서 어떤 세대의 특정 불편함이라고 칭하는 것도 나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저 케이스 바이 케이스, 사람 바이 사람의 문제이다. 이건 특정 세대의 공통적인 문제가 아니다. 나는 내 나이보다도 어린 친구들 중 배울 것이 많은 있는 친구들과도 협업했지만 그때마다 세대의 문제는 아니라고 느껴왔다. 그래서 요즘은 기본에 충실하기만 해도 정말 반 이상은 먹고 들어간다는 말이 실감 난다. Simple is Bes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