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을 새롭게 쓰는 또 하나의 직업
25년 동안 나는 한 업무만 하면서 살았다.
홈페이지 관리, 콘텐츠 기획, 위기 대응, … 그렇게 내 경력은 '인터넷','온라인', ‘미디어’이라는 틀 안에서만 자라났다. 익숙했고, 능숙했고, 안전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회사의 결정으로 그 세월이 ‘마침표’ 찍히듯 멈췄다.
처음엔 허탈했다. 쓸모 없는 사람이 된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내 경험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다른 이름으로 다시 불려야 할 뿐이었다.
새 부서에서 맡은 일은 사회봉사, 지역 연계, 그리고 사회혁신. 완전히 낯선 세계였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내가 25년간 쌓아온 경험들이 하나하나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났다.
예를 들어, 행사 기획. 예전엔 온라인상으로 눈길을 끌 만한 포인트를 고민했다면, 지금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몸으로 체험하며 공감할 수 있는 포인트를 찾는다. '세븐틴하트페스티벌'이나 '환경한마당'을 준비했을 때가 그랬다. 프로그램 전체의 기본 틀을 짜고, 학생기획단을 운영하며, 부스 구성과 홍보까지 챙겼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다 내 손을 거쳤다. 예전 미디어 캠페인을 기획하며 익혔던 노하우가 없었다면 버거웠을 일이다. 하지만 덕분에 학생들은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행사에 녹여낼 수 있었고, 시민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장이 되었다.
또 하나는 문서 작성. 예전엔 성과 지표와 반응률을 정리했지만, 지금은 봉사 프로그램의 성과와 지역사회 변화 과정을 기록한다. 숫자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 숫자 뒤에 숨어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이 훨씬 소중하다. 교육부 사회봉사 통계를 정리할 때도 그랬다. 단순히 몇 명이 몇 시간을 채웠다는 수치만 나열하면 밋밋하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이 보고서에 남긴 문장을 우수보고서 모임집으로 남길 준비를 한다.. “어린이들의 손을 잡아주며 오히려 제가 위로받았습니다.” 같은 짧은 글귀 하나가 숫자보다 더 큰 울림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갈등 조율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엔 위기 상황에서 빠른 대응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학생·기관·교수·주민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마음을 듣고 맞추는 게 더 큰 숙제다. 다행히 나는 오래전부터 사람들 속에서 길을 찾는 습관이 있었고, 그 덕에 새로운 자리를 조금씩 단단히 디뎌 나가고 있다.
돌아보면, 나는 ‘경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맥락에서 다시 쓰는 법’을 배우고 있는 셈이다. 25년간의 경력은 그냥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변주되는 자산이다.
그래서 요즘은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더 이상 단순한 직장인이 아니라, 사회를 잇는 또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이다.”
퇴근길, 버스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전보다 조금은 편안해 보였다.
쫓겨난 게 아니라, 새롭게 불린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