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이 없는 주관식 문제
인생을 살다 보면 계획대로 되는 일이 많지 않다. 내 첫 인생 계획이 어그러진 건 출산이다. 언니들이 모두 자연분만을 해서 나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 믿었다. ‘라마즈호흡법’을 비디오로 보면서 혼자 열심히 연습을 했다. 출판사에 다니면서 태교에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 했다. 마음을 단정히 가다듬고 태어날 아기에게 이야기도 하고 관세음보살상을 보면서 기도도 드렸다. 감기에 걸려도 약은 삼갔다. 다행히 입덧도 없이 무럭무럭 잘 자라주었다. 다만 임신말기에 임신중독증 증세가 생겨서 조심해야 했다. 건강 체질이라 자부했던 터라 어렵지 않게 출산할 거라 생각했다. 동네 산부인과에서 정기점검을 했다.
“그래도 모르는 일이니까 종합병원에서 아이 낳는 게 좋겠어. 네 직장 근처에 한국병원 있지? 거기로 병원 바꾸는 게 나을 것 같아.”
큰언니가 예지력이 있었는지 조언을 해주었다. 그래서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국병원에서 아들을 낳았다.
예정일 날 아침에 화장실에 갔는데 핏빛이 돌고 묽은 물이 나오는 게 느껴졌다. 출산 기미인 것을 깨닫고 바로 가방을 챙겨서 병원에 갔다.
“첫 출산을 보통 오래 걸리거든요. 입원하시고 진통이 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1인실에서 출산 준비를 했다. 관장도 하고 털도 밀고 소독도 했다. 저녁 무렵 입원했는데 밤을 꼬박 세우고도 자궁문이 잘 열리지 않았다. 진통은 계속되는데 기준 센티까지 벌어지지 않아서 초조했다. 분만 촉진제도 맞았다. 자연분만을 시도했는데 아이가 고개를 삐딱하게 돌리고 있어서 쉽지 않다 했다. 기구를 이용해서 끄집어내려고 했다. 그것도 틀려먹었다. 의사는 결국 제왕절개를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15시간 동안 산고를 겪었는데 제왕절개라니... 기가 막혔다. 제왕절개할 거면 미리 산통도 겪지 않고 했을 텐데...
1996년 5월 15일 15시 15분. 드디어 아들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정확히 예정일에 맞추어 스승의 날에 태어났다. 피를 많이 흘린 나는 수혈을 받아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수혈을 잘못 받아서 에이즈에 걸린 기사를 보기도 했으니. 천만다행으로 깨끗한 피였다.
내 이름을 확인하고 목에 뭔가를 넣었는데 그게 전신마취제였나 보다, 다시 병실로 옮겼는데 마취에서 좀처럼 깨어나지 않았다.
“남편분이 참 자상하신가 봐요. 환자분이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아서 울기까지 하셨어요.”
간호사 한 분이 링거를 꽂아주면서 한 마디 했다.
대학원생이었던 옆지기는 병실에 내내 같이 있어주었다. 아랫도리에 바른 빨간 소독약은 어머님이 따뜻한 수건으로 손수 닦아주셨다. 제왕절개로 태어났지만 아들은 건강했다. 다만 황달기가 있어서 모유수유를 하지 못했다. 퇴원할 무렵 남편은 고급 콜택시를 불렀다. 산후조리를 하러 친정으로 갔다. 엄마는 1년 전에 본 친손주를 돌보고 계셨다. 1주일 지난 뒤 시어머님이 시댁으로 오라고 하셨다. 친정엄마가 힘드실 테니 당신이 산후조리 해주시겠다고.
첫 손주라서 빨리 보고 싶으셨을 거다. 친정엄마를 생각해서 시댁으로 갔다. 어머님은 단호박 주스도 만들어 주시고 찜질도 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아들은 백일 전까지 어머님이 봐주셨다. 출산휴가를 마치고 직장에 복귀했다. 몸이 아직 예전으로 돌아오진 않았지만 출근하는 게 좋았다. 다시 사회인으로 돌아온 것이 기뻤다. 만약 혼자 아이를 키우며 집에만 있었다면 나도 산후우울증에 걸렸을 거다. 직장 생활하면서 몸은 차차 예전으로 돌아왔다. 어머님에게 정말 감사하다. 당신 엉덩이에 땀띠가 생기는 줄도 모르고 손주를 돌봐주셨다. 그 은혜는 평생을 두고 값아 나갈 거다.
살다 보면 햇빛 쨍쨍한 맑은 날도 있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궂은날도 있게 마련이다. 인생은 한 치 앞을 모르기 때문에 묘미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올해로 결혼 28주년이다 초기 십여 년이 나에게 흐린 날이었다면 후기 십여 년은 갠 날이었다.
캠퍼스 커플로 만난 옆지기와 오랜 연애 끝에 결혼할 때만 해도 내게 닥칠 먹구름은 상상도 못 했다. 그저 함께 유학을 떠날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느닷없이 옆지기에게 부정맥 증상이 나타났고 그로 인해 심장 시술을 두 번이나 받게 되었다. 그 후로도 후유증으로 여러 해 고생을 많이 했다. 어린 아들은 시어머님이 키워주셨지만 가장 노릇은 내 몫이 되었다. 후유증으로 예민해진 옆지기에게 내색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 그때 나에게 해주던 말이 바로 ‘괜찮아, 다 잘 될 거야’이다. 나 자신에게 거는 일종의 주문인 셈이다.
다행히 옆지기는 운이 좋게도 전문대에 일찍 자리를 잡았다. 건강이 염려되었기에 4년제 대학에 대한 욕심을 진작에 내려놓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건강이었기에….
모두들 승승장구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고 또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매번 좋은 일만 생긴다면 인간은 교만해지게 된다. 또 매번 좋지 않은 일만 반복된다면 좌절하게 된다. 좋은 일도 생겼다가 간혹 여의치 않은 일도 생겨야 비로소 겸손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한 모양이다. 이제는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할 줄 안다. 최악이 아닌 것에 감사할 줄도 알게 되었다. 주역에서 말하는 64괘 중에 가장 좋은 괘가 겸양괘(謙讓掛)라고 한 것이 이해가 된다.
아들이 고3일 때 가장 중요한 학교 시험을 잘 못 본 적이 있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S대를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성적이 좋았다. 나도 아들도 방심한 탓이었을까 코가 석자나 빠진 아들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자고….
어느 날 잠깐 들린 문구점에서 켈리그래피로 멋지게 쓴 이 글귀를 찾아냈다.
괜찮아, don’t worry.
다 잘 될 거야.
거실 화장실 거울에 붙여두어 매일 매일 아들이 볼 수 있게 했다. 나도 항상 보면서 주문을 걸었다. 다행히 아들은 우여곡절 끝에 겸손을 배웠고 감사한 마음으로 대학생활을 마치고 전문직으로 직장생활을 잘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 집 화장실 거울에는 이 글귀가 붙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