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12.
[ 입원 둘째 날 낮 ]
입원 둘째 날 낮이다. 정말 할 일이 없다. 할 일이 없어서 먹고 자고를 반복한다. 정확히 식사 때가 되면 밥차가 문 앞에 온다. 식판을 가지고 들어와서 멀뚱멀뚱 식사를 한다. 식사를 대충 마치고 식판을 반납하고 테이블을 한 번 닦는다. 그리고는 또다시 할 일이 없어진다. 너무 심심하다. 지금 시간은 2시 반인데 면담은 언제 하는 걸까. 핸드폰은 언제 받을 수 있을까.
[ 입원 둘째 날 밤 ]
오늘 교수님 면담이 없었다. 아침에 회진 와서 봐 주신 게 전부라고 했다. 매일 하는 건 줄 알아서 당황했다. 핸드폰에 대해서도 말을 꺼내볼 수가 없었다. 그보다, 아침에 동의서에 사인한 게 마음에 걸린다. 이전 병원 치료내역, 처방전, 환자 상태, 이런 정보를 공유받기 위한 동의서라고 하셨는데, 나는 진료기록이 넘어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건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공개하기 싫었다. 그럼 진료기록은 받아보지 않겠다고, 천천히, 말할 수 있을 때 알려달라고 하셨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하셨지만, 그건 그냥 공개하고 싶지 않은 일종의 나만의 일기장이다. 다른 사람이 절대 들여다보지 않았으면 하는, 너무나 내밀한 나의 마음이다.
저녁에 남편과 병동 전화로 통화를 했다. 휴직 연장 처리가 잘 되었다고 해서 다행이었다. 한시름 덜었다. 핸드폰을 빨리 받고 싶다.
2025.02.13.
[ 입원 셋째 날 낮 ]
입원 셋째 날. 아침 먹고 할 일이 없어서 그냥 계속 잤다. 중간에 미술 치료를 할 건지 물으셨는데 안 하겠다고 했다. 아직 다른 사람들과 마주 앉아서 뭔가를 같이 하는 건 조금 부담스럽다. 오전에 자면서 꿈을 많이 꿨다. 등장인물이 너무 많았어서 누구누구였는지 다 기억도 안 난다. 중간에 선생님도 있었던 것 같다.
오늘 날씨가 좋다. 해가 쨍쨍하고 맑다. 밖에 나가고 싶은데. 나가서 커피도 마시고 싶고. 그동안 내가 누린 것들이 큰 혜택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전부 단절되고 보니 이제야 소중함이 조금 느껴진다. 면회 온다는 가족들도 고맙고. 고마운데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웃어야 하는지 울어야 하는지 모르겠고,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 입원 셋째 날 밤 ]
오늘은 교수님이 외근이셔서 못 오신다고 했다. 회진이 없다는 건 핸드폰 사용도 안 풀어주신다는 거겠지. 너무 속상하다. 외부 세계와의 단절이 좋은 점도 있기는 한데.
저녁 식사 후에 엄마와 짧게 통화를 했다. 병동으로 전화가 걸려와서 받았다. 눈물이 날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대단히 슬프지는 않아서 꿋꿋하게 마무리했다. 저녁 먹고 남은 시간 동안은 또 병원 생각을 했다.
2025.02.14.
[ 입원 넷째 날 낮 ]
입원 넷째 날. 점심 식사를 했고 열두 시 반이다. 건조해서 살갗이 다 일어나고 있다. 히터가 24시간 틀어져 있어서 피부가 쩍쩍 갈라진다. 덕분에 안 춥고 따뜻하긴 하다.
오늘은 오전에 치료 프로그램을 하나 들어봤다. '우울증 행동 활성화'라고 임상심리 상담사님이 오셔서 교육 및 활동을 지도해 주셨다.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그 중요 가치를 위해서 하고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적어 봤다. 진심으로 임한 건지 잘 모르겠다. 그저 그럴듯한 답변들을 한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생각이 많이 없어졌다. 머리가 조금 비워진 느낌이랄까. 뭔가 시끄럽게 머릿속을 괴롭히던 것들이 조금 씻겨 내려간 느낌이다. 이렇게나 심심한 시간이 살면서 있었나 싶다. 정말 지금만 누릴 수 있는 시간이다. 언제 또 이렇게 모두와 차단되어 나만 생각하는 시간이 있을 수 있겠어. 지금 시간을 소중하게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 마음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겠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난 어떻게 되고 싶은지.
[ 입원 넷째 날 밤 ]
오후 회진 때 드디어 핸드폰을 받았다. 너무 기뻤다. 분명히 생각이 없어져서 좋다며, 이 심심한 시간을 즐기겠다 어쩌고 해 놓고, 웃긴다. 밀린 카톡을 확인했다.
취침약을 먹어서 이제 위험한 시간이 됐다. 기절하기 전에 책상을 접고 바르게 누워야 한다. 갑자기 간호사 선생님들이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감사한 분들이다.
2025.02.15.
[ 입원 다섯째 날 낮 ]
입원 다섯째 날이다. 밥 먹고 세수하고 정돈하고 쉬는 중. 아직도 한시 반이다. 시루는 호텔에 잘 도착했고, 남편은 친구 결혼식에 잘 도착했고, 엄마, 아빠는 아마도 올라오는 중일 거다. 나 때문에 여럿이 바쁘고 힘든 것 같아서 미안하다. 근데 미안하면서도 '이제야?' 하는 비뚤어진 마음도 있다.
마지막 진료 때의 선생님 목소리를 상상해 본다. 보기 드물게 다급한 선생님의 목소리와 말투가 신기했다. 지금은 입원이 필요하다고, 웬만하면 안 하려는데 지금은 너무 위험하다고. 입원해서 고비를 넘기자고.
입원이 끝나면 난 병원으로 돌아가도 되는 걸까. 왜 두려울까. 나를 달갑지 않아하시지 않을까.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건 아닐까. 나를 밀어낸 건 아닐까. 나를 포기한 건 아닐까.
[ 입원 다섯째 날 밤 ]
남편과 엄마가 면회를 왔다 갔다. 면회는 1일 1회, 2인 이하의 직계 가족만, 30분 동안 가능했다. 면회라니 정말 신기하다. 이게 참 일어날 수 있는 일이구나. 꼭 드라마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다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굴러가는 대로 살면 되려나. 원래 다들 그냥 이렇게 사는 건가. 나는 근데 조금 메마른 사람인가. 왜 이렇게 별로 슬프지가 않지. 약으로 많이 안정이 되어서 그런가. 정말 신기하리만치 나는 비통함이 없다. 왜일까. 많이 상처받아서일까.
엄마가 와서 대화를 하자니, 어린 시절 얘기부터 끄집어내야 하는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쌓인 걸 터뜨려야 하나. 굳이 잘 묻어둔 걸 말해야 하나. 뭐가 맞는지 모르겠다. 터뜨리고 싶으면서도 또 아니었으면 좋겠기도 하고. 내일은 엄마, 아빠가 면회를 오기로 했다. 내일 할 말을 미리 생각해야 하나. 엄마 아빠가 나에게 잘해주지 않았던 것. 걱정, 칭찬, 지지, 위로. 내가 받아보지 못한 것. 또 뭐가 있지. 무슨 말을 해야 내 마음이 잘 전달될까.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빠와의 대화는 좀 기대되면서도 두렵다. 내일이 안 왔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