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16.
[ 입원 여섯째 날 낮 ]
오전에는 티타임이 있었다. 티타임 때는 좋아하는 여행지, 좋아하는 음악, 책, 영화 같은 것들을 얘기했다. 그리고 같이 티타임을 가졌던 친구들과 보드게임을 했다. 지루한 오전 시간이 재미있게 훅 지나갔다. 물론 진심으로 신나고 그런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친해질 수 있었다. 신기하다. 이런 친밀감 없이 나갈 줄 알았는데.
오후 2시에는 엄마 아빠가 온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 뭔가를 터뜨리기엔 시간이 너무 짧은데. 30분 동안 무슨 이야기로 알차게 보내야 할까. 옆자리 아주머니는 그냥 아빠가 하는 얘기를 잘 들어줘 보라고 하셨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들어보고 내 이야기는 나가서 다시 잘 풀어내 보라고.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으니까.
기다리는 시간이 왠지 긴장된다. 아빠가 온다는 게 이렇게 긴장될 일인가 싶은 게 참 이상하다. 반갑다가 아니라 긴장된다라니. 가장 친밀했어야 할 부모와 나는 그렇지 못했다. 앞으로도 비슷할 것이다. 애써 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난 지금의 무관심이 좋으니까.
[ 입원 여섯째 날 밤 ]
30분의 면회 시간이 길지 않았다. 아빠는 쓸데없는 화제로 웃어넘기려 했고, 엄마는 어제처럼 나를 계속 어루만졌다. 10분이 넘도록 영양가 없는 대화만 계속 이루어지길래, 말을 끊고 내가 서운했던 점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나 칭찬 안 해준 거. 나 잘한 거 칭찬 안 해주고 혼내기만 한 거. 어릴 때 혼난 기억밖에 없게 만든 거. 나 아프다고 말 못 하게 한 거. 아프다는 말 하나도 안 들어준 거. 울면서 얘기하고 나니까 조금 후련한 듯도 했지만, 못다 한 말이 많아서 아주 시원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30분이 금방 끝났다.
남은 오후에는 또 병원 생각을 했다. 다음 병원 갔을 때 무슨 이야기를 할까도 생각해 보고. 내가 가도 되는 게 맞나 하는 생각도 해보고.
2025.02.17.
[ 입원 일곱째 날 초저녁 ]
오늘은 노느라 바빠서 낮 일기를 깜박했다. 세상에. 내가 여기서 노느라 바쁜 일이 다 생기다니. 왠지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입원 일주일 만에 이 안에서 친구도 생기고 동지애도 생겼다. 신기하다 정말. ㅇㅇ, ㄴㄴ, ㅁㅁ 이름 잘 기억해야지. 수다도 떨고, 보드게임도 하고, 이렇게 놀면서 보내느라 시간이 너무 금방 지나갔다. 벌써 저녁 식사를 마쳤고 오후 5시 25분이다.
낮 일기를 깜박했다는 걸 밥 먹고 나서야 깨달았다. 입원기간 중에 가장 좋은 변화가 아닐까? 떠들게 되고 같이 웃게 된다. 즐겁다. 이제야 여기 생활이 조금 즐거워졌다. 생각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생각이 많이 없어졌다. 전에 비해 머릿속이 많이 비워지는 걸 느낀다. 이래서 선생님이 입원을 활용하자고 하셨나 보다.
오전 심리치료에서는 지난 일주일 동안 내가 느낀 감정들을 적어보았다. 나는 입원 권유를 받았을 때, 입원했을 때, 남편과 부모님을 면회했을 때, 이렇게 3가지 상황에 대해 적었다.
1. 입원을 권유받았을 때 : 나는 놀랍고, 당황스럽고, 서운하고, 억울하고, 심란하고, 우울하고, 후회스럽고, 무서웠다. '내가 정말 그 정도인가? 정말 입원밖에 답이 없나? 나를 포기하시는 걸까? 내가 너무 잘못했나?'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서운하고 후회스러움이 컸다. 지금도 조금 후회된다. 그렇게 하지 말걸.
2. 입원했을 때 : 나는 무섭고, 불안하고, 긴장되고, 우울하고, 겁나고, 외로웠다. '혼자 여기서 어떻게 지내지. 같이 지내는 분들은 어떤 분들일까. 밥도 혼자 먹어야 되는데. 지루해서 어떻게 보내지 이 긴 시간을.' 이런 생각이 들었다.
3. 남편과 부모님을 면회했을 때 : 나는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고, 반갑고, 기쁘고, 감사하고, 긴장되고, 겁이 났다. 남편은 마냥 반가웠고 만나서 즐거웠는데, 부모님은 만나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 만나기 싫었다. 나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고, 내 속마음을 이야기하기도 싫었다.
[ 입원 일곱째 날 밤 ]
노느라 시간이 훌쩍 지났다. 벌써 약 먹을 시간이다. 약 때문에 졸려서 일기를 못 쓸까 봐 걱정이다. 약을 먹고 양치를 하고 들어왔다. 눈이 감길까 봐 맘이 급하다.
오늘은 즐거운 하루였다. 활동도 두 가지나 했고, 친구들과 대화도 많이 했다. 아이들이 모두 선한 것 같다. 그러니까 아파졌겠지. 나쁜 사람들은 아프지도 않으니까.
점점 어지러운 것 같다. 오늘의 일기를 과연 끝까지 채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기를 다 쓰고 나면 남편과 통화를 하고 핸드폰을 반납해야지.
내일은 오전에 또 심리치료를 갈 예정이다. 힐링되는 시간이라 참 좋다.
방금 갑자기... 내일이 기대된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런 생각이 너무 오랜만이라 스스로 놀랐다. 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구나. 신기하다.
2025.02.18.
[ 입원 여덟째 날 낮 ]
오늘도 오전에 심리치료가 있었다. 단체로 수업을 들으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데, 상담 선생님과의 대화가 참 기분이 좋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고 적절한 답변과 진심 어린 걱정으로 응답해 주신다. 역시 상담 선생님들은 듣고 말하기에 탁월하시다. (중략)
[ 입원 여덟째 날 밤 ]
병원에 가고 싶다. (중략)
2025.02.19.
[ 입원 아홉째 날 낮 ]
오늘은 옆자리 아주머니가 퇴원하신다. 부러운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다. 다른 한 분의 상태가 조금 이상해서 걱정되긴 하지만. 그 분만 아니라면 나는 열흘도 더 지낼 수 있겠는데. 생각보다 나는 병원 체질인가 보다. 크게 불편하지 않고 대체로 만족스럽다. 간호사 선생님들도 다 좋다. 처음엔 무서워 보이던 선생님들도 알고 보면 다 친절하시다. 환자들 하나하나 맞춰주시는 모습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난 절대 못했을 것 같다.
아무튼 병원 생활이 익숙하고 좋긴 한데 마음이 심란하다. 오늘은 이유 없이 오전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이유를 모르겠다. 괜히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 무슨 기분인지 모르겠다 영.
내가 하는 고민들이 다 배부른 고민일까. 나는 대체 왜 힘든 걸까. 나는 뭐가 부족한 걸까. 뭘 채우지 못해서 괴로운 걸까.
날이 좋아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창문에서 햇살이 쏟아지는데 '아 이런 날 죽고 싶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입원 아홉째 날 밤 ]
오후에도 계속 힘든 기분이 이어졌고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남편과 통화하면서 눈물이 펑펑 터졌다. 샤워실에서 한참 울면서 통화하다가 잘 진정이 되지 않아서 간호사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자나팜을 복용했고, 안정실에 들어갔다. 간호사 선생님은 뭐가 힘든지 물어보셨다. 뭐가 힘든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나가서도 똑같겠구나 싶은 막막함과 자꾸만 불현듯 한 번씩 찾아오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무서웠던 것 같다. 나가서 맞이할 상황들도 두렵다. 회사, 목 상태, 이리저리 흔들리는 내 마음과 남편, 가족들 문제. 적고 보면 참 적은데 왜 이렇게 힘들까. 아무래도 마음의 문제가 제일 큰 것 같다.
2025.02.20.
[ 입원 열째 날 낮 ]
오늘은 벌써 열째 날이다. 내가 이렇게 오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조금씩 아무 생각도 없어지는 것 같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왠지 조금 멍해진다. 일기 쓰는 게 귀찮은 건 또 오랜만이다.
오전에 미술 치료가 있었는데, 내 삶의 빛에 대해 그려보라고 하셨다. (중략)
내가 충분히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건 다 오산이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다른 것이었다. 이 현실에서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원하는 걸 가질 수 없는 상황은 늘 많이 있었다 나에게는. 이게 특별히 다른 건 뭘까. 원래 나는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채로 잘 살아왔는데 왜 이렇게 참기 힘들까. 이게 이렇게 못 견디게 싫고 괴로운 이유가 뭘까.
생각은 힘이 없다고 했다. 나의 생각도 아무런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생각만 가지고 있어서는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다. 행동하지 않으면 된다. 행동하지 않고 생각을 간직만 하면서 사는 게 가능할까.
나는 나가서 죽지 않고 잘 살 수 있을까.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까. 살고 싶지 않더라도 죽기 싫은 이유라도 생긴다면 살 수 있지 않을까. 죽기 싫은 이유는 뭐가 있을까. 이해받기 위해서일까.
[ 입원 열째 날 밤 ]
오늘 오후에는 ㅇㅇ, ㄴㄴ와 퍼즐을 했다. 오늘도 이렇게 그냥 놀면서 생각 없애기 연습을 잘했다. 여기서 웃고 떠드는 게 꽤 익숙해졌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오늘의 기분은 그냥 그랬다. 웃고 떠들기도 했지만 혼자 있을 때는 지루하고 우울한 느낌이 들었다.
저녁에는 공용 공간에서 책 읽고 퍼즐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일 회진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일요일에 나가겠다고 해야 할지, 그냥 더 괜찮아질 때까지 있어야 할지 모르겠다.
여기 있다 보면 또 나가서의 삶이 걱정된다. 여기는 날 안전하게 잡아주는 곳인데, 나가면 이렇게 24시간 날 잡아줄 곳은 없으니까. 안전지대에서 벗어나는 느낌이 들어서 두렵다. 집에서 나 혼자 안전하게 있을 수 있을까. 혼자만의 시간들을 안전하게 보낼 수 있을까. 또 약을 안 모을 수 있을까.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