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25.
[ 입원 열다섯째 날 낮 ]
오늘은 그냥 좀 멍했다. 뭘 많이 먹기는 했는데 기억나는 건 딸기, 떡만둣국, 맛동산, 마가렛트. 아무튼 잘 먹고 잘 지냈다. 근데 왜 이렇게 뭔가 허하지. 왜 뭔가 이게 맞나 싶은 느낌이 들지. 나 지금 괜찮은 걸까. 괜찮아지는 중일까. 나아지는 게 맞을까. 나아지고 싶은 맘은 있는 걸까. 오늘 오전 심리치료 때에는 수용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아직 고통을 수용하고 안고 나갈 힘이 없는 것 같다. 그 힘은 언제 생길 수 있을까. 여기 들어오기 전 마지막 날이 생각난다. 음악총괄 인수인계를 정말 꾸역꾸역 끝내고, 이제야 할 일이 완전히 끝났다는 해방감을 느꼈던 그때. 근데 죽는 것도 비슷한 해방감일 것 같다.
오늘은 두 명이나 퇴원을 했다. 매일 어울리던 사람들이 나가니까 괜히 아쉽고 그랬다. 나도 어차피 나갈 건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나는 근데 언제 나가고 싶은 걸까. 나는 왜 나가기가 무서운 걸까. 뭐가 날 두렵게 하는 걸까. 나갔을 때 나를 괴롭힐 만한 것들은 뭐가 있을까. 사실상 아무것도 날 괴롭힐 수 없지 않나. 회사 복직은 다시 연기되었고, 노래는 어차피 못하는 거고, 시댁은 어쩔 수 없이 보겠지만 조금은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었고. 나를 걱정하는 남편과 부모님을 생각하면 나가야 하는 게 맞는데, 왠지 모르게 여기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못 나갈 것만 같다. 내가 마지막으로 남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니겠지.
[ 입원 열다섯째 날 밤 ]
정말 모르겠는 하루가 지나갔다. 왜 이렇게 의욕도 없고 다 귀찮은 걸까.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들은 어떤 것일까. 난 나가서 뭘 하고 싶은 걸까. 나가서 하고 싶은 게 없는 걸까. 남편과 시루랑 뒹굴거리면서 놀고 싶다. 그거면 되지 않나. 그거면 되는데 내가 왜 자꾸 더 많은 걸 바라는 걸까.
내가 그동안 몰랐던 깊은 이해와 공감. 그게 나에게 준 의미가 너무 커서 내가 온몸이 휘청일 정도로 흔들렸나 보다. 나의 자리가 어딘지 이제 조금 다시 알아가는 것 같다. 난 그동안 살아온 대로 살면 된다. 바뀌어야 하는 건 없다.
2025.02.26.
[ 입원 열여섯째 날 낮 ]
오늘은 속이 많이 쓰렸다. 역류성이 심해진 건지, 약이 안 맞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속 쓰림 약을 또 처방받기는 했는데, 약을 약으로 막는 이 상황이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 이제는 좀 원래 병원으로 돌아가고 싶다. 나를 더 잘 이해하고, 내 이야기에 더 귀 기울여 줄 사람이 계시니까. 돌아가고 싶다. 이제 나가고 싶어졌다.
위기는 넘겼으니 이 정도면 되지 않았을까. 드라마틱하게 우울이 다 없어져서 나가면 당연히 좋겠지만, 그렇게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지금 상태면 당장 죽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 목표 달성인 거 아닌가. 내가 너무 큰 목표를 기대치로 잡고 있는 거 아닐까. 난 몇 주 지나면 내가 훌훌 털고 밝은 모습으로 나갈 줄 알았나 보다. 그래서 그 상태가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조급해졌던 것 같은데, 나는 지금 나가도 되는 상태가 맞는 것 같다.
아무래도 돌아가야겠다. 약도, 진료도 원래 병원에서 받고 싶다. 여기 오지 않겠다고 어떻게 말하지. 퇴원 후에는 원래 병원으로 가고 싶다고 그냥 솔직히 말하면 되려나. 서운해하시려나. 이게 혹시 잘못된 선택일까 봐 조금 겁나기도 한다.
더 치료받고 싶으면 얼마든지 더 있어도 된다고 하시는데, 왜 나는 이제 나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까. 내가 여기 남아있는 게 민폐 같기도 하고. 왜 또 나는 내가 피해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무도 나를 쫓아내지 않는다. 나가기 싫으면 안 나가도 된다. 나갔다가도 다시 들어올 수 있다. 언제든지 내 자유다. 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다는 생각을 버리자. 난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있다.
[ 입원 열여섯째 날 밤 ]
금요일 오후 퇴원을 목표로 해봐야겠다. 내일만 잘 보내면 된다. 언제든 필요할 때 다시 들어올 수 있고, 나의 또 다른 피난처가 되어줄 거다. 욕조 대신 병원으로 도망을 쳐야지 앞으로는. 매 시간마다 밥도 챙겨주시고, 약도 챙겨주시고, 혈압도 재 주시고, 화면으로 늘 지켜보시고, 다들 지켜주시니까 확실한 안전지대라는 생각이 든다. 폰이 있어서 덜 답답한 건 맞지만, 폰이 없었어도 아주 답답하지는 않았겠다 싶다. 그냥 이곳의 보호가 좋다. 폐쇄가 아니라 보호병동이라고 많이 부르는데 보호가 맞는 것 같다. 날 보호해 주고 있다. 많은 간호사 선생님들과, 교수님과, 같이 입원한 다른 친구들이 나를 응원하고 지켜준다. 나가서도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까. 나 혼자의 시간을 안전하게 보낼 수 있을까. 세 번째 시도 뒤에 네 번째 시도가 없을 거라고 보장할 수 있을까. 남은 약은 어떻게 처리할까. 또다시 충동이 안 들 수 있을까. 내가 나를 또 해치지 않을까. 난 또 도망치고 싶지 않을까. 나 정말 나가도 괜찮을까.
2025.02.27.
[ 입원 열일곱째 날 낮 ]
오늘 아침에는 수간호사 선생님께서 숙제를 주셨다. 죽었을 때의 좋은 점과 살았을 때의 좋은 점을 쭉 적어보라고 하셨다. 죽었을 때의 좋은 점은 8가지가 있었는데, 살았을 때의 좋은 점은 12가지나 있었다. 적다 보니 그래도 살아서 좋은 것들이 있긴 있구나 싶었다.
오전 치료 시간에는 생활 계획표를 짰다. 나가서 어떻게 지낼지 생각하면서 일과를 정리해 봤다. 잠은 12시에 잘 거고 오전 7시에는 일어나서 간단히 아침을 먹을 거다. 8시부터 시루와 놀아줄 거고 9시부터 11시까지는 영어 공부를 할 거다. 11시부터 12시까지는 홈트레이닝을 하고 오후 12시에서 1시까지는 씻고 점심을 먹는다. 1시부터 3시까지는 독서를 한다. 어떤 책이든 20페이지 이상 읽기. 3시에서 4시까지는 빨래와 집안 정리를 하고 4시에서 6시는 휴식을 취한다. 멍 때리거나 음악을 듣거나. 6시에서 8시까지는 남편과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8시에는 씻을 거다. 9시부터 11시까지는 TV를 볼 거다. 11시부터 12시까지는 일기 쓰고 약을 먹는다. 그럼 하루 끝.
매일 이렇게 살지는 못하겠지만 가끔이라도, 일주일에 며칠이라도 지키면서 살면 좋겠다. 건강해지려는 노력을 해봐야겠다. 건강해져보고 싶다. 아프기 전의 내가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다시 잘 찾아내 봐야겠다.
[ 입원 열일곱째 날 밤 ]
오늘은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밤이다. 하루가 왠지 모르게 빨리 지나갔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인 것 같다. 여기서의 생활이 이제 너무 익숙하고 편해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오늘 활동을 하며 조금씩 기대감이 생긴 것 같다. 그래서 갑자기 '나 나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하는 마음이 든 것 같다. '나 나가도 잘 살 수 있겠는데?' 생각이 들었다. 많은 발전이다. '죽고 싶어' 였다가 '살아볼까' 싶다가 '잘 살 수 있겠다'까지 오다니. 난 이제 나가서도 건강히 나를 챙기며 지낼 수 있다. 그럴 수 있을 거다. 물론 다시 적응하는 게 또 힘들 수는 있지만 아예 포기할 마음까지는 어쩌면 가지 않을 수도 있겠다. 죽고 싶었던 이유들이 다 해결되지 않은 건 맞지만, 조금은 맞서 싸울 힘이 생기지 않을까 지내다 보면.
2025.02.28.
[ 입원 열여덟째 날 아침 ]
마지막일지도 모를 아침이 왔다. 어젯밤에는 잠을 정말 못 잤다. 긴장해서 그런가. 떨리는 건가, 긴장한 건가. 뭐 때문이지. 나가서의 일이 너무 기대가 되나. 이제는 시루도 보고 싶고, 남편도 보고 싶고. ㅇㅇ이가 어제의 내가 많이 웃었다고 했다. 기대감에 부풀었나 보다. 나가고 싶은 건 맞을까. 나가서 잘 살 수 있나. 나가서 내가 안전할 수 있을까.
[ 입원 열여덟째 날 낮 ]
아침 교수님 회진 때 퇴원이 결정 됐다. 드디어! 18일 만에 나간다! 우와 신기하다 진짜로! 나간다고 하니까 갑자기 기분이 신난다. 원래 나가는 게 무서웠는데 왜 신나는 것 같지? 신기하다 진짜. 퇴원이라는 걸 아예 처음 경험해 보는데 심지어 정신병원 보호병동 퇴원이라니. 신기하다 신기해.
[ 퇴원한 날 밤 ]
오늘 오후 3시쯤 퇴원을 했다. 오늘 결정된 거라 나도 갑작스럽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설렜다. 퇴원이 결정되고 나서 원래 병원에 예약 전화를 했다. 다음 주 외래 예약이 잡혔다. 짐을 챙겨놓고 남편을 기다리는데 기분이 묘했다. 재미있는 수련회에 왔다가 돌아가는 느낌? 왠지 초반에는 별로였지만 익숙해지고 정들어버려서 떠나기 싫은 느낌. 이상한 기분이었다. 퇴원 절차가 마무리되고 짐을 챙겨서 나오는데 '와 내가 이런 경험을 하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수간호사 선생님 말씀을 기억해야겠다. 힘들면 언제든 다시 와서 쉬어도 되니까 무조건 마지막이라고는 생각하지 말기. 집에 돌아와서 시루와 반갑게 인사하고, 짐 정리를 끝내고 남편과 저녁 먹으러 나갔다 왔다.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들어와서 기분이 좋다. 지금 나의 기분을 잘 유지하도록 노력해 봐야겠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2월의 마지막 날 살아있는 마음이가 마음이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