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21.
[ 입원 열한째 날 낮 ]
오늘은 조금 후련한 날이다. 오전에 교수님 회진 오셨을 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고, 면담실에서 잠시 대화를 했다. 그동안 얘기하지 못했던 전이 감정에 대해 얘기했다. 너무나 당연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감정과 생각은 죄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괜히 뭔가 숨기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 힘들었는데 말하고 나니 후련했다. 내가 도움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생각도 들고. 이제는 솔직하게 다 말할 수 있겠다. 숨기는 것 없이 다 얘기해서 나아지고 싶다.
이제 나아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나가서도 잘 살 수 있게 나아져야겠다. 원래 내가 있던 자리에서 충분히 괜찮도록 나아져야겠다. 나아져서 잘 이겨내고 싶다. 싸울 힘이 생겼으면 좋겠다. 싸울 힘이 생기면 회사도, 목도, 시댁도, 아빠도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전이 감정도 잘 싸워서 이기고 싶다. 잠시 지나가는 마음이라고, 진짜 마음은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오늘 오후에 방을 바꾸기로 했다. 입원 기간 중 단 한 번만 바꿀 수 있다는데 이번에 그 기회를 쓸 생각이다. 방에 계신 한 아주머니가 밤새 돌아다니시는 바람에 잠을 못 잤다. 아마도 그 행동은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 나의 잠도 계속 영향을 받겠지. 그건 안 된다. 나도 잘 자고 잘 먹고 나아야 하니까. 새로운 방에서 잘 지낼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지만, 그래도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옮겨갈 방에 있는 ㅇㅇ이가 나와 비슷한 면이 많아서 대화하면 할수록 편안한 느낌을 받는다. 사람들이 다 착하다. 정말 착한 사람들만 오나 보다.
[ 입원 열한째 날 밤 ]
오후에는 ㅇㅇ, ㄴㄴ, ㅁㅁ와 입체 퍼즐을 했다. 난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만들었다. 조립이 어려웠지만 재미있었다. 퍼즐 후에는 책을 읽다가 방에 들어와서 햇살을 받으며 잠시 쉬었다. 옮긴 방이 맘에 든다. 오후 5시에는 저녁을 먹었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아이들과 모여서 보드게임을 했다. 달무티와 더게임. 둘 다 카드 게임이었는데 달무티는 상대적으로 쉬웠고, 더게임은 생각보다 아주 치밀하게 짜인 게임이었다. 머리를 꽤나 많이 쓰게 했다. 재미있었다.
2025.02.22.
[ 입원 열두째 날 낮 ]
오늘은 무슨 생각을 할까. 멍하다.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좀 더 사유하고 싶은데 머릿속이 느리게 돌아가는 기분이다. 먹을 것만 떠올리고 있다. 내일 면회 때 뭘 사다 달라고 할까. 난 여기에 며칠이나 더 있을 생각인 걸까.
어제 방을 바꿔서인지 오늘은 조금 잘 잔 것 같다. 중간에 깨서 추가약을 받은 건 똑같았지만. 잠이 왜 한 번에 쭉 오지 않는 걸까. 약을 이렇게 쓰는데도 잠이 깨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난 지금 걱정도 없고 아주 편안한 환경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안에서도 긴장과 불안이 없어지지 않는 중인 걸까. 왜 불안할까. 나를 불안하게 하는 건 어떤 것들일까. 지금은 이유를 모르겠다.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고, 먹고, 자고, 활동하고, 그 어느 때보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불안을 느끼는 건 내 내면에 또 풀리지 않는 어떤 문제가 존재하는 걸까. 물론 밖에서의 상황이 전혀 해결되지 않은 건 맞지만, 지금 나는 여기에 있는데? 아무도, 아무것도 날 괴롭힐 수 없는데? 아무튼 잠은 잘 오지 않는다.
오후에 엄마가 면회를 온다고 한다. 서프라이즈 해주려고 미리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를 겨우 30분 보려고 왕복 4-5시간 거리를 다녀간다니 대단한 일이다. 이런 수고스러움을 감당하는 애정에 조금 감탄했다. 엄마아빠에게 살갑게 대하는 건 아직 어렵지만 나도 마음을 열려고 노력해야겠다. 그래야겠지. 나도 어느 정도의 노력을 보여야겠지. 이것도 또 의무처럼 변질되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한 시간 후면 엄마가 온다.
[ 입원 열두째 날 밤 ]
엄마가 왔다 갔다. 지난 면회 때 못다 한 말들을 했다. 회사도, 노래도, 남편도, 시댁도, 아빠도 다 풀기 어렵고, 하기 싫고, 할 힘이 없다고 말했다. 속이 조금 시원했다. 엄마는 속이 상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한 군데 더 털어놓아서 속이 편했다. 아니,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뭐 아무튼 면회는 잘 끝났고, 엄마는 나를 또 안쓰러워했다. 안쓰럽게 보이는 건 이제 상관이 없다. 나는 내가 괜찮아질지 궁금하다. 과연 이게 없어질 수 있는 병일까. 모르겠다. 그냥 늘 가지고 가야 하는 병 아닐까. 그냥 이대로 쭉, 아주 쭉 낫지 않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2025.02.23.
[ 입원 열셋째 날 낮 ]
벌써 2주가 다 되어간다. 원래 오늘은 퇴원을 계획했던 날인데, 어쩌다 보니 병동 생활이 길어져간다. 나는 여기에 이제 완전히 적응했다. 씻는 거, 밥 먹는 거, 다 불편한 게 없다. 어떡하지. 여기 좋은데. 이제 노출 치료하러 현실로 돌아갈 시간인가? 상황에 놓여도 보고, 경험해 보고, 경험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경험을 하는 것이 너무나 무섭지만 언제까지 피할 수는 없으니까. 언젠가 부딪혀 봐야겠지.
오후에는 남편이 면회를 온다. 원래 나를 데리고 나가려고 계획했는데 그러지 못하게 되어서 많이 아쉬운 것 같다. 근데 난 아직은 여기 있고 싶어. 간호사 선생님들도 다 좋으시고, 교수님께도 조금 신뢰가 생겼다. 나에게 좋은 약을 추천해 주시려고 하는 거니까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나에게 도움이 될 사람이지 해가 될 사람은 아니다. 일단 오후에 남편 면회를 울지 않고 잘 마치는 게 중요하다. 근데 무슨 말을 하지? 남편보다 물품이 더 기다려지는 것 같기도 하다.
[ 입원 열셋째 날 밤 ]
남편과 면회를 잘했고, 물품도 잔뜩 받았다. 과자가 편의점처럼 쌓였다. 집에 갈 때 다 들고 가야 될 것 같다. 출장 얘기, 여기서 지낸 얘기들 하면서 유쾌하게 잘 떠들었다. 잘 만나고, 잘 보내고, 김밥도 잘 먹고, 프라푸치노도 잘 먹고, 침대에서 쉬는데 갑자기 창가에 있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림에는 세 가족의 모습이 있었다. 미술치료 시간에 내가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에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떠올려봤다.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왜 저런 그림을 그려서 이런 고민을 할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혹시 아기를 낳고 싶은 걸까? 그 생각을 부정하면서 슬퍼진 걸까? 내가 진짜 원한 건 사실 아이가 있는 삶이었나?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걸 내가 스스로 못하게 막고 있어서 힘들어진 걸까? 내가 원하던 삶이 아이 없이 자유로운 삶 맞나? 이게 정말 내가 원한 삶인가? 나는 그럼 왜 계속 저 그림을 떠올리나? 왜 계속 세 가족의 모습을 상상할까? 내가 정말로 얻고 싶은 건 뭘까? 살고 싶은 걸까? 죽고 싶은 걸까?
생각이 이어지다가,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서 안정실에 다녀왔다. 간호사 선생님이 자나팜과 물을 가져다주셨다. 어떤 게 힘들었는지 물으셨는데,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아이 생각을 하다가, 시댁 압박도 생각나고, 불편한 상황들도 생각나고, 시부모님을 다시 만날 생각에 또 갑갑해지고. 그냥 다 싫어졌다고, 또다시 없어지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간호사 선생님은 너무 생각의 꼬리를 물지 말고 생각 꼬리 자르기 연습을 해보자고 하셨다. 오늘 떠오른 생각의 씨앗은 ◇◇씨네 임신 소식인 것 같다. 남편이 왠지 부러운 듯한 말투로 말하는 듯했다. 물론 내가 그냥 그렇게 받아들였기 때문일 거다. 남편은 그런 의도가 없었을 걸 안다.
그리고 간호사 선생님은 또 말씀하셨다. 나가기 싫으면 그때까지 안 나가도 된다고, 마음 씨가 괜찮을 때까지 얼마든지 더 있어도 된다고, 아무도 쫓아내지 않는다고. 따뜻한 말로 나를 안심시켜 주셨다. 여기는 또 다른 나의 안전지대가 되어가고 있다. 위로받고 치유받고 있다.
창가에 있던 아이 그림을 뒤집어버렸다. 그냥 보기 싫어졌다. 찢어버릴까 싶기도 했다. 왜 이 생각이 나를 또 갉아먹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정말 고민을 해보고 싶은 걸까. 그냥 일부러 슬퍼지려는 건 아닐까. 나도 내 생각을 모르겠다 정말. 난 내가 괜찮아지기도 전에 또 남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까 봐 그게 먼저 걱정이 되나 보다. 또 내가 나를 몰아붙이고 있다.
2025.02.24.
[ 입원 열넷째 날 낮 ]
아침이 맛이 없어서 한 숟갈 먹었다. 그리고 맛동산을 먹었다. 너무 맛있었다. 오전에는 심리치료를 받았고 재미있었다. 심리치료가 끝난 뒤 졸려서 침대를 세우고 침대에 기대서 잤다. 꿀잠이었다. 점심 먹기 전에는 버터링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도 침대에 기대서 잤고, 그러다가 책상에 엎어져서 잤다. 그래서 교수님 회진 때 얼굴이 아주 엉망이었다.
오늘은 시댁과의 문제, 아이에 대한 압박, 내가 정말 낳고 싶은 생각이 있는지, 이런 것들이 두렵다고 이야기했다. 나가면 부딪히고 마주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생각나면서 어제 힘들었다고도 이야기했다. 교수님은 너무 나 자신을 탓하지 말라고 하셨다. 다 나의 책임으로 돌리지 말라고. '나의 감정은 나의 감정이고, 남의 감정은 남의 감정이다. 그것까지 내가 책임지려고 하지 말자.'가 오늘의 메시지였다. 주치의 선생님께도 들어본 이야기이고 나도 인식은 하고 있다. 하지만 쉽지 않다.
[ 입원 열넷째 날 밤 ]
오늘은 유독 활력이 없다. 나가서의 일이 걱정인 건지 뭐가 걱정인 건지. 오후에도 기운이 계속 없어서 잠시 누워있거나 기대 있거나 하면서 쉬었다. 왜 이렇게 우울해지는지 모르겠다. 나갈 생각을 하니까 또 숨이 막히는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