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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호박 May 27. 2024

뮤지컬 배우의 힘이란 이런 것이구나

뮤지컬 <헤드윅>

뮤지컬을 좋아한다고 하면 듣게 되는 여러 가지 질문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유명한 배우의 공연도 본 적이 있냐는 질문이다. 여기서 유명한 배우라고 하면 보통 뮤지컬계뿐만 아니라 범대중적으로도 인지도가 있는 배우인 경우가 많다. '홍광호 배우 공연 본 적 있어?'와 같은 기본형 질문 혹은 '김준수 배우가 모차르트 하는 거 본 적 있어?'처럼 해당 배우의 대표작과 함께 구성된 세트형 질문으로 주어지는 경우로 나뉠 수 있다. 기본형 질문과 세트형 질문을 막론하고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 속 유명한 배우는 조승우 배우다. '조승우 배우 공연 본 적 있어?' 혹은 '조드윅*/조지킬** 본 적 있어?' 이 질문들을 받아 들 때마다 나의 얼굴에는 의기양양함이 살풋 떠오르다가 이내 무언가에 홀린 듯이 멍해진다. 벌써 10년도 더 전의 일이라 사실 대부분의 기억이 흐릿하지만 그때 감각했던 충격은 여전히 너무나 생생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조승우 배우의 성과 뮤지컬 <헤드윅> 속 주인공 헤드윅을 합쳐서 부르는 애칭

**조승우 배우의 성과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속 주인공 지킬 박사를 합쳐서 부르는 애칭


아마 2013년 혹은 2014년 시즌의 헤드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년에 한 번은 뮤지컬을 꼭 봐야지 다짐하며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던 때였고, 2호선을 타고 갔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나서 백암아트홀이라고 추정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뮤지컬을 자주 보기 어려웠던 때이자 지금만큼 뮤지컬에 대해 알지 못했던 때여서 나 역시 뮤지컬 <헤드윅>에 대한 사전 지식은 거의 없었다. 그저 매체 연기를 통해 만났던 조승우 배우를 무대 위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그런데 그 <헤드윅>이라는 작품이 유명하고 좋은 작품이라는 평에 혹해서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체 어떻게 티켓팅을 한 건가 싶기는 한데, 어쨌든 자리를 구해서 갔던 거였다. 


무대는 단출했다. 두 명의 배우와 밴드. 그마저도 조승우 배우가 맡은 헤드윅 역할이 극을 혼자 이끌어간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원맨쇼에 가까운 극이었다. 더구나 극 자체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하거나 어떤 서사를 보여준다기보다 MTF(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 뮤지션인 헤드윅이 공연장을 빌려서 하룻밤 공연을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컨셉의 작품이었다. 뮤지컬이라고 하면 하나의 굵직한 서사와 이에 얽힌 수많은 주조연 등장인물들, 그리고 무대를 화려하게 채우는 앙상블을 떠올렸던 당시의 내게 <헤드윅>은 낯설게만 다가왔다. 긴 금발 가발을 쓰고 무대에 앉아 소위 '여성스러운' 목소리와 제스처로 이야기를 하는 조승우 배우의 모습을 보며 여러 차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극이 조금... 난해하다... 조승우 배우는 연기를... 잘하는 건가? 목소리 톤 하고 제스처만 조금 여성스러울 뿐인 거 같기도 하고...' 


극을 보는 내내 갸웃거리던 고개가 빳빳하게 얼어버린 것은 극의 후반부에서였다. 헤드윅이 감정을 마구 터트리고 나서 무대 전체가 암전이 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검은색으로 뒤덮였던 무대 위로 한 줄기 새하얀 빛이 내려앉았다. 빛이 내려앉은 자리에서 검은 속옷 하나만 걸친 채로 소년 토미의 모습을 한 조승우 배우가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화려한 가발과 다채로운 색의 옷으로 둘러싸여 있던 조드윅은 온데간데없었다. 두려워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용기를 내어 헤드윅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서툴고 미숙한 토미만이 있을 뿐. 조토미의 모습을 보니 조드윅의 연기가 얼마나 탁월한 것이었는지를 그제야 깨달았다. 조드윅과 조토미의 격차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렇게나 다른 두 가지 인물을 지금 한 사람이 연기하고 있다고?'


토미를 연기한 조승우 배우를 보고 나서야 그의 헤드윅 연기가 얼마나 섬세하게 쌓아 올려진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다. 높은 톤으로 낸다고만 생각했던 목소리는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해서 늘 어딘가 불안하고 날이 서 있는 목소리였고, 단순히 '여성스러운' 제스처라고 생각했던 몸짓들은 자신의 반쪽을 찾기 위해 사랑을 갈구하는 간절함이 담겨 있는 몸짓이었다. 어린 시절 미군 아버지에게 성적인 학대를 당하고, 어머니에게는 정서적 방임과 학대를 당한 동독의 한센이 의지할 곳이라고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음악과 어느 밤 어머니가 이야기해 준 사랑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뿐이었을 것이다. 음악, 사랑,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떠나기 위해 '희생'처럼 받아야 했던 싸구려 성전환 수술로 한센이 얻은 것은 1인치 살덩이. 희생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자신의 반쪽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 느끼며 헤드윅은 얼마나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을 쌓아왔을까. 배반당했다고만 믿었던 토미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괜찮다는 노래를 전해 듣고는 어쩌면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마음먹지 않았을까. 조승우 배우의 섬세한 표현력을 통해 이 모든 헤드윅의 서사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뮤지컬 배우의 힘이란 이런 것이구나. 2시간이 넘는 공연을 이끌어가는 힘, 극 속 인물을 섬세하게 연기하여 그들의 삶을 우리 곁에 가져다 놓는 힘, 그 속에서 용기와 위로가 될만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힘.


조드윅 그리고 뽀드윅, 연드윅... 그리고 이츠학들

조승우 배우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헤드윅>이라는 작품 자체가 '배우의 힘'으로 끌고 나가야 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이 작품에 캐스팅된 배우들이라면 웬만하면 다 '배우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그 이상으로 배우에 의해 극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올해 14연으로 돌아온 <헤드윅>을 보면서 또 한 번 느꼈다. 


이번 시즌에서는 조정석 배우의 뽀드윅*과 유연석 배우의 연드윅**을 봤다. 뽀드윅은 '헤드윅의 정석', 연드윅은 '유연한 헤드윅'이라는 생각을 했다. '헤드윅의 정석' 뽀드윅은 극에 상당히 충실해서 깔끔한 느낌이 들고, 극에 대한 설명을 친절하게 해 줌으로써 관객들이 헤드윅의 서사를 스무스하게 따라올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느낌이다. 영화 <건축학개론> 납뜩이 때부터 유명한 입담이야 말할 것도 없고. '유연한 헤드윅' 연드윅은 겉으로 드러나는 외양이나 목소리부터 선이 유연한 편이라 개인적으로는 헤드윅 역할에 가장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했고, 특히나 헤드윅이 넘나드는 거친 감정의 파고를 유연하게 타면서 관객들에게 부드럽게 전해주는 느낌이었다. 


*조정석 배우의 성이 조승우 배우와 같아 성 대신 '뽀얀' 조정석 배우의 특징과 뮤지컬 <헤드윅> 속 주인공 헤드윅을 합쳐서 부르는 애칭

**유연석 배우의 이름에 들어가는 연과 뮤지컬 <헤드윅> 속 주인공 헤드윅을 합쳐서 부르는 애칭


조드윅을 볼 때는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 이츠학 역할이었는데, 올해는 더 유심히 들여다보았던 것 같다. 헤드윅의 남편이자 과거 드랙퀸이었던 이츠학은 무대 위 분량과 대사가 많지는 않지만 헤드윅의 거울로서 암시하는 바가 많은 역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역대 이츠학들을 살펴보면 정말 노래로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많은데, 이번 시즌에도 노래와 연기가 탄탄한 배우들(장은아, 여은, 이예은)의 힘이 엄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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