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스위니 토드>
전미도 배우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덕분이었다. 운이 좋게 2018년 제2회 뮤지컬 어워즈를 현장에 가서 볼 수 있었는데 그때 프로듀서상, 연출상, 작곡상, 극본/작사상, 여자 주연상, 소극장 뮤지컬상까지 6관왕을 휩쓴 <어쩌면 해피엔딩>이라는 작품을 인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해피엔딩>이라는 작품은 소극장 뮤지컬이라 무대에 오르는 배우는 단 세 명인데도, 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이렇게 많은 상을 휩쓸 수 있었을까 궁금해하며 검색을 하다가 운명 같은 영상을 만났다. 전미도 배우가 정문성 배우와 함께 '사랑이란'과 'First time in love'라는 넘버를 부르는 모습이었는데, 사랑스러움을 의인화한다면 전미도 배우 그 자체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영상을 뚫고 전해지는 클레어(<어쩌면 해피엔딩>에서 전미도 배우가 맡은 역할)의 모든 것을 당황스럽게 마주하면서(로봇이 처음 사랑에 빠지는 이 순간을 봐주세요 제발... 진짜 지금 다시 봐도 소름이 오소소소소) 언젠가는 한 번 꼭 전미도 배우를 무대에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사이 전미도 배우는 무대 활동보다는 슬기로운 의사생활(2020, 2021), 서른, 아홉(2022) 등 매체 활동을 이어갔고, 범대중에게 유명한 배우가 되었다. 덕분에(?) <어쩌면 해피엔딩> 삼연 때 돌아온 미도클레어 티켓팅은 시도할 엄두도 안 날 정도였다. 전미도 배우의 무대 위 모습은 그저 전설로만 끝나는 건가 싶을 때, 2022년 뮤지컬 <스위니 토드>로 다시금 전미도 배우가 무대에 오른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치열한 피켓팅에 참전. 무참히 실패했다가 예매대기로 겨우 자리를 얻어서 드디어 무대 위 전미도 배우를 보러 갈 수 있었다.
뮤지컬 <스위니 토드>는 이발사 벤자민 바커가 터핀 판사에게 아내 루시와 딸 조안나마저 뺏기고 누명을 쓴 채 쫓겨났다가 런던으로 다시 돌아와 스위니 토드로 분해 터핀 판사에게 복수를 하는 복수극이다. 전미도 배우는 스위니 토드를 도와 인육으로 파이를 만드는 파이집 사장 러빗 부인 역할을 맡았다. 전미도 배우는 무대 위에서 정말 러빗 부인 그 자체였는데, 특히나 가장 놀랐던 것 중 하나는 목소리였다. 평소 디즈니 공주님 재질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를 가진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러빗 부인이라는 인물에 맞춰 성대를 갈아 끼운 수준으로 완전히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신기했다. 본래의 목소리보다 조금 더 나이 든 느낌의 목소리, 러빗 부인의 특징을 살려서 약간은 천박하고 푼수끼가 들어간 목소리까지를 연기해 내는 모습에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전미도 배우만큼이나 감탄을 금치 못했던 배우가 있다. 바로 토비아스 역할의 윤은오 배우였다. 사실 윤은오 배우가 맡은 토비아스라는 인물은 스토리 흐름 상 조연 중에서도 가장 그냥 지나치기 쉬운 인물이다. <스위니 토드>는 토드의 복수극이 중심축이기 때문에 주인공인 토드를 포함하여 토드의 복수 대상자인 터핀 판사, 토드의 협력자인 러빗 부인, 터핀 판사가 노리고 있는 토드의 딸 조안나와 그런 조안나를 사랑하는 안소니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토비아스는 스위니 토드가 이발사로서 입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는 이발사 피렐리와의 이발 시합 장면에서야 피렐리의 조수로 처음 등장한다. 이후 자신을 처음으로 잘 대해주는 러빗 부인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따르며 러빗 부인의 조수가 된다. (여기서부터는 스포 주의⚠️) 극의 후반부에 토비아스는 지하실에 갔다가 토드가 사람을, 특히 자신의 주인이었던 피렐리를 살해한 정황을 발견한다. 그런 토비아스를 발견한 러빗 부인은 내심 토비아스가 이 모든 상황을 알게 될까 봐 걱정하면서도 겉으로는 괜찮다고 다독이는데, 이미 토비아스에게 토드는 경계의 대상이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토드가 복수에 성공했으나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자신의 아내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그것을 알면서도 방관한 러빗 부인까지 살해한다. 이때, 지하실에 숨어있던 토비가 토드의 면도칼로 토드의 목을 긋는 것으로 극이 마무리가 된다.
토비아스는 이처럼 간과하기 쉬운 인물이지만 극의 마지막에 아주 중요한 키가 되는 인물인데, 이 전복감이 주는 짜릿함이 엄청났다. 덕분에 주연만으로 써지는 이야기는 없구나 깨달았다. 조연들 역시 주연과 동일하게 각자의 서사가 있고, 이들의 서사가 한 줄기로 모였을 때 생기는 역동이 뮤지컬이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게다가 윤은오 배우의 연기 덕분에 토비아스라는 극 내내 존재감이 희미하던 인물이 마지막 순간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지 그 간극이 두드러졌고, 순진함과 잔인함이 얼마나 가까운지를 너무나 소름 끼치게 표현되었다. 피렐리에게 이용을 당할 때도 그렇고, 러빗 부인을 진심으로 잘 따를 때도 그렇고 윤은오 배우의 토비아스는 순진무구함 그 자체를 보여줬다. 그 순진무구함 속에 들어있는 맹목이 극의 후반부에서는 토드에 대한 잔인무도함이 될 때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다. 극을 보고 나오면서 내 머릿속엔 '토비아스 그 배우 이름이 뭐였지?' 하는 생각만 가득했고, 윤은오 배우의 이름을 여러 차례 되새기면서 다음에 어떤 작품을 하든 정말 믿고 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날의 경험 덕분에 나는 캐스팅 보드를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윤은오
<스위니 토드> 이후 윤은오 배우를 보러 간 것은 작년 <레미제라블> 때였다. <레미제라블> 자체가 2015년 재연 이후로 8년 만에 오는 거라 꼭 보러 가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캐스팅을 들여다보니 마리우스 역할에 윤은오 배우가 있었다. 마리우스로서의 윤은오 배우도 좋았다. 코제트와 사랑에 빠지고 난 뒤, 혁명과 사랑 사이에서 흔들리는 연약함이 두드러지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조만간 <어쩌면 해피엔딩>의 올리버로도 만날 예정이다. 윤은오 배우가 보여주는 올리버는 또 어떨지 기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