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보면 일상의 빛이 바래버리는 것 같고, 생기가 말라버려 푸석해지는 것 같다. 그럴 때 나는 책장을 뒤적거려 <어린 왕자>를 비상약처럼 집어 들곤 한다. 똑같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도 그때그때의 나의 상황에 따라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장면들이 다르다는 것이 흥미롭다. 술 마시는 것이 부끄러워 술을 마시는 술꾼을 보면서 지친 퇴근길에 스스로를 건강한 방식으로 쉬게 하기보다 술로 도피했던 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흠칫 놀라기도 하고, 갈증을 느끼지 않게 하는 약을 발명해 시간을 아꼈다는 장사꾼을 보면서 '나는 무엇을 위해 아등바등 시간을 아끼려고 하는지, 왜 그렇게나 효율성을 추구하는지'를 곰곰 고민하기도 한다.
때로는 내게 필요한 부분을 먼저 펼쳐서 읽기도 한다. 특히 21장을 자주 펼치는데, 어린 왕자가 여우와 만나서 관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해주는 말들('만일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네 장미가 너에게 그토록 중요한 것은 네가 장미에게 들인 시간 때문이야.', '정말 소중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을 가만히 읽어가다 보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지금 나의 상황과의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 나와의 관계에서 느끼는 답답함이 환기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렇듯 <어린 왕자>는 어릴 때도 재밌게 읽은 작품이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 여러 차례 꺼내 읽으며 더더욱 애틋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혼란한 나를 환기해 주는, 가장 중요한 본질을 상기시켜 주는 작품.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하 어햎)도 내게는 그런 작품이다. 지난번 글에서도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2018년 제2회 뮤지컬 어워즈에서 창작 초연이자 소극장 뮤지컬인 이 작품이 6관왕을 휩쓰는 것을 보고는 '언젠가는 꼭 봐야지'하면서 이 작품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고맙게도 그해 말, 어햎 재연*이 찾아왔다.
*뮤지컬 작품의 시즌 개념으로 처음 공연되는 것을 초연, 두 번째 공연되는 것을 재연, 세 번째 공연되는 것 이후로는 삼연, 사연, 오연...으로 지칭한다.
어햎은 근미래의 서울 메트로폴리탄을 배경으로 한다. 사람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사람과 외양이 거의 완벽히 흡사한 헬퍼봇이 존재하는 시대. 올리버와 클레어는 구형 헬퍼봇이 거주하는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다. 재즈를 듣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화분에 물을 주며 반복되는 정갈한 일상을 보내는 헬퍼봇 5 올리버를 헬퍼봇 6인 클레어가 고장 난 자신의 충전기를 대신할 충전기를 빌리기 위해 방문하면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충전기를 빌리고 빌려주는 사이로 만난 올리버와 클레어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자신의 주인이자 친구 제임스를 만나러 가고 싶은 올리버와 반딧불이를 보러 가고 싶은 클레어는 함께 제주로 향한다. 이 과정에서 올리버와 클레어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배우게 되는데, 사랑의 기쁨뿐만 아니라 슬픔까지도 배우게 된다는 것이 이 뮤지컬의 스토리라인이다.
어햎을 보면서 감탄을 넘어 경이롭게 다가왔던 지점은 인간이 아닌 로봇이라는 존재를 통해 가장 인간적인 사랑이라는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한다는 것이었다. 그중 가장 아름답게 표현된 장면이 올리버와 클레어가 'First time in love'를 함께 부를 때다.
클레어 | 설레임과 두려움이 동시에 뒤섞인 기분이야
가슴이 벅찰 정도로 기쁜데 눈물도 날 것 같아
걷잡을 수가 없어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 이게 사랑인건가봐
(...)
올리버 | 알고 있던 모든 것에 의미가 달라진 기분이야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이런 나 낯설지만 싫지 않아
헤아릴 수도 없어
지금 내가 느끼는 떨림 이게 사랑인건가봐
이 장면에서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 알아갈 때의 설렘과 두려움이 범벅이 된 혼란스러움, 내가 알던 세상과 심지어는 나 자신조차도 낯설어진 감각을 가슴 벅차게 담아내고 있다. 비인간인 로봇이 생애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아가면서 아이처럼 순수하게 웃고, 사랑에 대해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궁금해하고, 하나둘 알아가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펑펑 울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부러워서, '나에게도 그런 처음이 있었는데...' 싶어서. 인간인 내가 잊고 있던 가장 처음의, 가슴 떨리는 사랑을 비인간 로봇 올리버와 클레어가 떠올리게 해 준 것이다.
올리버 | 너와 나 잡은 손 자꾸만 낡아가고
시간과 함께 모두 저물어간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려 해 그때까지만
혹시라도 너 원할 땐 모두 멈출게
(...)
클레어 | 너와 나 잡은 손 자꾸만 낡아가고
시간과 함께 모두 저물어간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려 해 사랑하려 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을 거
뒤이어 나오는 넘버 '그럼에도 불구하고'에는 클레어와 올리버가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를 사랑하는 만큼 하루하루 낡아가고, 이곳저곳 고장 나는 서로를 아파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사랑이라는 것이 행복과 기쁨과 같은 반짝이는 감정들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사랑할수록 아픔과 힘듦 그리고 슬픔과 같은 그림자 같은 감정들이 따라온다는 것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메시지,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것을 함께 전하고 있다.
하루하루를 버텨내느라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것 같을 때, 바쁜 일상에 치여 사랑하는 법이 흐려져버린 것 같을 때. 그럴 때마다 나는 <어쩌면 해피엔딩>을 꺼내어들 것이다. 가장 처음의 가슴 떨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떠올리기 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마지막까지 사랑하는 법을 선명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전미도
무대 위 미도클레어를 본 적은 없다. 초연 때는 이 작품을 몰랐고, 미도클레어가 돌아왔던 삼연 때는 피켓팅에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클레어는 미도클레어다. '영상만으로도 이렇게 모든 게 전해지는데, 무대에서 보면 얼마나 더할까...' 싶었달까. 무대가 아닌 곳에서까지 순간적으로 장면에 몰입하고 클레어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전미도 배우를 보면서 나는 여전히 무대 위 미도클레어를 만날 그 어느 날을 그려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