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
뮤덕부정기라는 기획 하에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순간부터 꼭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 작품을 보면서 나만의 이야기를 담은 글을 써내려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므로 첫 글은 꼭 이 작품이어야 했지만, 너무 소중한 작품이라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이 글을 쓰지 못하게 했다. 그 마음을 내려놓기까지 꼭 1년이 걸렸다.
뮤지컬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이하 <윌윌윌>)은 사실 작품에 대한 그 어떤 정보나 기대 없이 보러 갔다. 작년 이맘때쯤 <팬텀싱어 4>를 보면서 참가자였던 임규형 배우에게 관심이 생겨서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보다가 그가 대학로에서 이 작품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작품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뮤지컬을 좋아하는 마음과 임규형 배우의 실제 공연 모습이 궁금한 마음으로 '한 번 보러 가볼까?' 하며 예매 사이트에 들어갔다. 마침 회사에서 대학로는 꽤나 가까운 편이기도 했으니까. 임규형 배우 회차 중 관극 하러 갈 수 있는 날을 살펴보다 마티네 공연이 16시인 것을 보고 오후 반차를 쓰고 가면 생각보다 여유롭게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클릭했다. 좌석 배치표가 떴는데 누군가 취소한 것인지 1열에 자리가 딱 하나 있었다. 좌측 사이드이기는 하지만 1열에서 관극 한 적이 없어서 궁금한 마음에 냉큼 예매! 뭐 하나 걸리는 것 없이 수월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든 게 잘 짜인 운명처럼 느껴진다. 가벼운 마음으로 예매했던 극을 본 그날 이후로 많은 게 변해버렸으니.
<윌윌윌>은 18세기말 런던을 떠들썩하게 했던 셰익스피어 위작 논란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자신이 쓴 글을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라고 오해한 아버지 윌리엄 사무엘 아일랜드(이경수 배우/ 이하 사무엘)로부터 관심과 인정을 받고 싶었던 윌리엄 헨리 아일랜드(임규형 배우/ 이하 헨리)는 미지의 신사 H(황휘 배우/ 이하 H)의 도움을 받아 계속해서 위작들을 만들어내게 되고, 그 끝에 <보르티게른>이라는 작품의 진위 여부에 대한 재판에 열리게 되는 것이 이 작품의 주요 내용이다. 사무엘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 오해할 만큼 헨리는 이야기를 쓰는 데에 재능이 있다. 헨리의 방에는 낡고 사소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데, 헨리는 이 사소한 것들에 귀 기울이며 끝도 없는 이야기들을 상상해 낸다. 헨리는 늘 사무엘에게 관심과 사랑 그리고 인정을 받고 싶어 하지만, 정작 사무엘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잘 나가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것에 온 정신이 쏠려있어 헨리를 돌보거나 신경 쓸 새가 없다. 사무엘은 늘 헨리에게 '아무것도 하지 마. 숨만 쉬면 돼.'라고 말할 뿐이다.
그런 사무엘이 헨리에게 처음으로 관심을 보이는 순간은 헨리가 셰익스피어 <소네트 130> 뒤편에 이어서 쓴 글까지를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라고 오해하는 때다. 사무엘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통해 세간의 이목을 끌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한껏 들뜬 마음으로 헨리와 처음으로 길게 눈을 맞춘다. 헨리는 생소하지만 늘 갈망해 왔던 이 눈빛을 저버릴 수 없어 자신의 친구이자 셰익스피어의 상속인인 H 씨가 전해주었다고 하며, 다른 작품들도 받기로 했다는 거짓말을 하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라고 알려지는 헨리의 작품들은 세간의 이목을 끌어 사무엘을 유명한 사람으로 만들어줬을 뿐 아니라, 사무엘이 자존감의 위기를 겪을 때 다정한 위로가 되어주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사소한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길어 올리는 헨리의 재능이 기뻐하는 사무엘을 계속해서 기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진심과 만나서 만들어진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사무엘과 헨리를 통해 세상으로 계속해서 나오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 의구심을 가진 사람들이 위작임을 의심하게 되고, 결국 사무엘과 헨리는 재판정에 서게 된다. 사무엘은 작품성이 있는 이 작품들이 어떻게 위작일 수 있냐며 강하게 항변하고, 사무엘의 관심을 놓을 수 없어 불안한 침묵으로 일관하던 헨리는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로 결심을 한다. 진실을 이야기함으로써 사무엘의 관심과 인정을 받지 못하던 과거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이야기를 한 글자 한 글자 고백해 나간다.
‘내가 오롯한 나로서, 나만의 이야기로서 사랑받지 못한다 해도 나는 나의 이야기를 진실되게 할 수 있을까?’
이 극을 보고 나서 다이어리에 적었던 첫마디. 헨리를 보면서 정말 많이 공감했던 것은 나 역시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관심받고 인정받고 싶어서 내가 아닌 모습을 보이거나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무리한 적이 꽤나 많았다는 것. 어릴 때 외국에서 피부색도 생김새도 다른 상태로 학교 친구들과 잘 어울리려고 노력했던 순간들, 한국에 들어와서 전학을 다니며 소외되지 않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뒤로 감춘 채 친구들에게 받아들여질 모습들만 보여주면서 불안해하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 시간들을 지나면서 무리에는 어느 정도 위화감 없이 섞여 들었지만, 사실은 나 스스로와의 불화가 가장 커서 괴로웠다. 이제야 조금씩 나답게 살아야지 다짐하며 나답게 살려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늘 마음 한켠에 사랑받지 못할까 봐, 소외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어린 시절의 내가 웅크리고 있다.
마지막 순간에 이전처럼, 아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받지 못하고 오히려 미움받을 수도 있음을 앎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야기를, 진실을 이야기하겠다고 용기를 낸 헨리가 그간 얼마나 고민하고 고뇌하고 힘들었을지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요즘 매 순간 내가 그러하니까. 그리고 그게 너무나 대단하게 다가왔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지 너무나 깊이 체감하고 있으니까.
헨리가 부르는 마지막 넘버 ‘헨리의 고백’을 통해 다짐하게 됐다. 결국은 나부터가 나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에서부터 모든 게 시작되니까, 내가 내 편이 되어주고 내 목소리와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줘야겠다고. 그렇지 않으면 그저 사라져 버릴 테니까. 누군가에게는 바보 같아 보일지언정, 누군가로부터 쓸모없다는 얘길 들을지언정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그런 나를 전해야지. 그렇게 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헨리의 고백
어쩔 수 없잖아 이게 나니까
있는 모습 그대로도 괜찮을지 몰라
예전 그대로 다시 그때로 돌아간대도
나조차 나의 이야길 듣지 않는다면
나의 목소린 점점 사라질 거야
이렇게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느껴져
내 안에 숨 쉬는 작고도 조용한 이야기들이 말을 걸어와
삶이란 한 권의 책을 쓰는 일
나만의 이야길 써내려 가는 일
모두가 아름다운 한 편의 시
멋진 모험담들로 가득한 한 권의 책
내 얘기가 들려 다시 내 얘기가 들려
모든 걸 자세히 봐
그들의 얘기를 들어봐
꿈을 꾼다는 건 삶에 대한 믿음을 갖는 일
내 안에 수많은 얘기들
그것을 속이고 위대한 작가를 흉내 내며
내 것이라 믿었던 얘기들
하지만 그건 내가 아냐
버려진 것들과 얘기하는 헨리 날 바보 같다 해도
보잘것없는 얘길 쓰는 헨리 쓸모없다 해도
그래도 괜찮아 이게 나니까
있는 모습 그대로도 아름다울지 몰라
있는 그대로 내가 가진 얘길 해
그리고 임규형
앞서 얘기했던 수월하게 예매한 좌측 1열의 딱 한 자리는 헨리가 주로 앉는 의자 바로 앞자리였고, 이날 공연을 보고 나오면서 나는 직감했다. ‘음… 나 오늘 부로 입덕한 것 같은데?’
헨리 바로 앞자리다 보니 규형 배우가 표현하는 헨리를 아주 디테일하게 볼 수 있었다. 특히 재판정에서 초조해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온몸으로 연기하는 것에서 감탄을 넘어 완전히 압도당했다. 손끝을 어찌할 줄 모르고, 입술이 바짝바짝 타서 계속해서 물어뜯다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것까지… 노래를 잘하는 거야 워낙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연기까지 탁월하게 잘 해낼 줄 예상하지 못했어서 완전히 감겨들었다… 정말 헨리 그 자체. 불안해하는 모습뿐만 아니라 온갖 것들, 사소한 것들, 버려진 것들에서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는 다정하고 섬세한 시선을 가진 헨리의 사랑스러운 모습까지도 너무나 잘 표현해 줬다.
커튼콜 때 규형 배우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는데, 극이 끝나고 긴장이 풀린 그렇지만 아직 헨리의 감정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는 못한 느낌의 모습이었다. 객석을 향해 몸을 폴더로 접듯 포옥-폭 인사하는 모습마저 헨리 같았다. 오케스트라 쪽으로 박수를 보내며 에어 바이올린을 켜는 모습도 소년미가 넘쳤고. 무대 위에서 이렇게나 반짝이는 사람이라니… 나는 이 사람을 오래도록 응원하게 되겠구나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