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방의 불을 켰다. 아직도 열기가 남아 있다. 샤워를 하고 나왔지만 금방 더워졌다. 엄마가 왔다갔다는 건 비워진 빨래바구니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내가 학교에 있을 때, 엄마는 집에서 밀린 일을 한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집안 구석을 쓴다. 졸린 눈을 비비며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생각하겠지. 지금의 나처럼. 우리는 이렇게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암막 커튼을 치고 잠든 엄마를 상상한다. 엄마의 옆에서 자봤던 게 언제였더라. 코로나가 끝난 후 물류 양을 줄어들었다지만 엄마의 얼굴을 보는 건 더 힘들어졌다. 오늘의 간식은 포도였다. 머루를 한 알씩 입에 넣었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껍질의 힘이 느껴진다. 치아의 힘으로 알을 터뜨려 반으로 가른다. 그 사이의 씨와 함께 껍질을 혀끝으로 발라낸다. 손바닥을 대고 삼키지 못한 것을 후두둑 뱉는다.
과일 껍질의 영양가까지 섭취해야 하는 엄마가 본다면 잔소리를 할 일이었다. 엄마는 내가 세상의 좋은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를 바랐다. 아귀에 힘이 없는 나를 보며 엄마는 두 손으로 과일과 함께 나의 손을 꼭 쥐었다. 그래도 나는 무언가를 자주 놓쳤다. 그 모습을 보며 엄마는 안타까워했다. 지금도 여전하다는 걸, 엄마는 알까?
하나의 순서가 또 지나간다. 아침을 먹고 학교를 다녀오고 엄마를 생각하다가 잠드는 일. 하지만 오늘도 쉽게 잠이 들기 어려울 것 같았다. 문자 메시지가 왔다.
[수리 기사님이 내일은 되어야 올 수 있대. 그때까지 좀 참아. 잘 자, 우리 딸.]
꽃동네 슈퍼로 향했다.
“그래, 알겠어. 조만간에 보내줄게.”
슈퍼 안으로 들어갔다. 문틈으로 할머니가 원형 밥상 앞에 앉아 있는 걸 보았다. 수화기를 들어 귀에 대고 말을 계속 이어갔다.
“건강은 하고? 곧 한국으로 들어오지?”
평소 정 없는 꽃동네 슈퍼 할머니의 모습이 아니었다. 우리 엄마와 같은 따뜻한 모습에 나는 이 공간이 낯설어졌다. 다시 밖으로 나가려고 했을 때였다. 할머니의 방문이 열리더니 내게 눈짓을 했다.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바쁘다는 핑계 말고 얼굴 한 번 보고 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할머니를 귀찮게 여기는 것 같았다. 할머니도 누군가에게 매달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신기했다.
“그래, 이만 끊으마.”
수화기를 내려놓은 할머니는 손짓을 했다. 방 안으로 들어갔더니 베개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낮에 네 엄마 왔다갔다.”
전화할 때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내가 자신의 약점을 보았음에도 할머니는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할머니는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스위치를 누르듯 태도가 바뀔 수 있다니.
“아직도 에어컨 고치지 못했다며? 당분간 내가 재워준다고 했다.”
“당분간이요? 내일 기사님 온다는데요?”
“그래도 당분간 자.”
역시 꽃동네 슈퍼 할머니는 막무가내였다.
“그나저나 어제 보던 거 뭐냐?”
“뭐 말이에요?”
할머니는 바로 생각이 나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 네가 밤에 보던 거 말이다. 등을 돌려서 봐도 훤하던데?”
몰래 본다고 봤는데 차마 감출 수 없었나보다.
“이거 말씀 하시는 거예요?”
나는 [아일론TV] 채널을 보여주었다. 할머니는 휴대전화를 가져가더니 손가락으로 위아래로 화면을 움직였다. 제임스의 모습이 보이자 멈췄다.
“이거 어떻게 보는거냐?”
“누르면 되는데요?”
“아니, 내 전화기에서 말이다.”
할머니는 휴대 전화를 꺼냈다. 폴더폰이라서 조작하는 게 낯설었다. 하지만 이내 곧 [아일론TV] 채널 구독을 눌렀다. 천천히 알려드린다고 알려드렸지만 할머니 입장에서는 아니었나보다. 할머니는 종이를 꺼내 와서 여기에도 적어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거 뭔지는 아세요?”
할머니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화면을 뚫어져라 보았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