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이 무척 많은 데 유난히 맑은 하늘을 쳐다보노라니, 사뭇 그리워지는 감정을 억누를 길 없어 이 글 쓰고 있어요. 조용하고 그윽한 밤! 어느 사이 밤의 미아(迷兒) 되어버린 나는 자꾸만 J 씨에게 달려만 가니 놀라운 일이랍니다. 걷잡을 수 없는 이 감정을 그 무엇으로 달래야 할지 도무지 묘연하기만 해서 무심코 한 자 한 자 이렇게 숨죽여가며 지면(紙面)을 내리누르고 있어요.
J 씨!
대답 없는 당신의 이름은 더할 나위 없는 희열과 보람을 가져다줍니다. 심혼(心魂)이 이리저리 엉클어지기만 하는 나는 다소곳이 당신에게 구원을 청해보고 싶소. 나 자신 어느 사이에 이처럼 변했음을 알고 깜짝 놀라고 있어요. 참으로 중대한 사건이 생겼어요. 긴 편지를 써 보내도 하고 싶은 말은 아득히 먼 수평선이 되니, 정녕 나는 어찌해야 할지 내 마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만 애태우고 있답니다. 이제 J 씨는 내 가슴속 깊이 파고들어 오고 있어요.
‘성급하다. 너무 이르다. 이래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글 쓰는 걸 보면, 나 자신 J 씨에게 ‘아주 가까이 가 있구나’ 싶어요. 아마 추측해 보건대 바로 이런 게 ‘순애(純愛)’라는 감정인 듯 이상스럽게 오늘 밤에는 J 씨가 몹시 보고 싶군요.
J 씨!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먼 곳에 있는 J 씨를 이렇게 단정 짓고 싶어요. 맑고 쾌활하고, 자존심이 강하고, 순진하고 깨끗하고 재미있는 분이라고. J 씨가 요즈음 나를 엉망으로 만들지만, 이런 나를 주님께서는 강한 채찍으로 너그러이 감싸주고 있어요. 예수님은 너무나도 내게 절대적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고 있어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구원의 확신! 나는 이 엄청난 사실을 진실로 믿기 때문에 기쁨이 충만한 자신을 가질 수 있답니다. 천국은 제게 추상적인 환상의 세계가 아니랍니다. 하루하루 예수님을 믿는 그 자체가 천국 생활이니 어찌 추상적인 세계이겠어요?
사랑하고픈 J 씨!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저를 어떻게 하시겠어요? 무조건 사랑하고 싶군요. 그리스도의 사랑 위에 인간의 사랑까지 얹혀 그냥 열심히 사랑하고 싶어요. J 씨가 진심으로 허락하신다면. 왜 갑자기 화제가 온통 사랑으로 바뀌고 말았지요? 이 좋은 시간 속에서 오로지 사랑의 넋두리하기에는 너무 아쉽네요. 자정을 몇 분 남겨놓고 초침이 맹렬히 돌진해 가며 제 심장에 비장한 바늘을 꽂고 마네요. 좀 더 부지런했더라면, 열심히 했더라면,... 많은 상념(想念) 지닌 체 턱을 두 손으로 바치고 멍하니 내가 과연 이 지구상에서 어떠한 미미한 원자(原子)가 되는 걸까? 심야 방송 속의 수많은 젊은이들, 그리고 오가는 주옥같은 밀어(密語)는 한결같이 사랑의 넋두리뿐인가 봅니다. 얼마 전만 해도 나도 역시 심야 방송의 극성스러운 팬이었지만 지금은 멀어져 간 지난날 되고 말았어요. 세월의 푸르름, 청초함 속에서 나는 소중한 것들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듯한 착각에 빠져듭니다.
J 씨는 지금 내 곁에 계세요.
내 곁에서 앵두 같은 입술 아련하게 오므리고, 말똥말똥 눈망울 굴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어요. 그러한 J 씨를 사랑하나 봐요. 슈베르트 세레나데는 밤의 정적을 한층 더 더해주고요. 폴 모리아 악단이 ‘눈물의 토카타’를 연주합니다. 흐르는 선율 속에서 야릇하게 빛나는 눈 치켜세우고 내 곁에 있는 듯한 J 씨를 다시 쳐다보려들 때, 또 새로운 날이 시작되고 있어요. 부지런히, 세밀하게, 열심히 J 씨를 통해 애틋한 사춘기 감성을 다시 가져보고 싶어요. 또 새로운 자아(自我)를 구축하고 싶고요. 그런데 이러한 소망은 실로 어려운 일이 되고 맙니다. 내 나이 21세에서 22세 되면 병아리 사회인이 됩니다. 결국 현재 느끼는 감정들은 작은 파편 되어 무참히 깨질지도 몰라요.
J 씨!
남자들은 어쩌면 단편적이고 가변적이며, 유동적, 역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끊임없는 갈망, 애절한 슬픔을 너무 싶게 잊어버리거든요. 또한 남자들은 너무 욕심을 많이 부려요. 적어도 제 경우, J 씨가 무한한 신비감을 가져다주려고 조금씩 내 곁에 다가오고 있다고 단정 짓고 있거든요. 쉽게 생각하며 확신하는 저를 슬며시 들여다볼 때, 속물 욕심쟁이가 틀림없어요.
저는요. 함초롬히 핀 볼우물을 본 적이 없습니다. J 씨는 웃으실 때 볼우물이 생기지 않나요? 어제 읽은 소설 속에서 볼우물이 등장하는데 도대체 무슨 볼우물을 그토록 허무맹랑하게 표현해 놨는지 보고 싶었거든요. 말한다는 것은 참 편리한 것 같아요. 벙어리와 정상인이 1박 2일 동안 여행하면서 대화하려면 수첩이 12권이나 필요하대요.
J 씨!
지금까지의 글을 보면 따분하게 두서없는 많은 잡동사니 글을 나열해 놓았어요. 이는 원래 내가 그렇게 쓴 게 아니라 얄궂게도 J 씨가 만들었어요. 왜냐하면 J 씨는 나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죠.
밤이 깊었어요. 자정이 훨씬 지났으니까, 잠든 J 씨를 위해 감사기도 드리며 저도 잠을 자야겠어요. 꿈속에서 만나기로 약속하면서...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