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누리를 포근히 감싸고 있는 하얀 눈을 보며 이 글을 쓰고 있어요.밤새 얼마나 많은 눈이 왔는지, 눈 속에 가득 파묻힌 세상은 한없이 평화롭기만 합니다. 하지만 뜨뜻한 아랫목에서 공상(空想)을 즐기는 사람들! 뚜렷한 할 일이 없어 공상의 날개를 펼치며 요행을 바라는 사람들! 쳇, 저도 예외가 될 수 없어 늦장 부리며 이제야 기지개를 켭니다. 흰 눈을 멍하니 쳐다보노라니 바쁜 직장 생활 속에서 오늘 하루의 삶을 밀도 깊게 보낼 J 씨에게 부끄럽네요.
삼일 예배를 드리고, 서둘러 집에 와 아랫목으로 파고들었습니다. 뭔지 모르게 자꾸 움츠러드는 요즈음의 나! 때로는 망연자실, 넋을 잃고 맙니다. 졸업을 15일 남겨두어서일까? 왠지 초조하고 궁해지는 나의 마음, 공허가 가득 쌓여 이 길 저 길을 왔다 갔다 방황하는 나는 문득 헤르만 헷세의 ‘크눌프’(knulf)를 생각해 봅니다. 방황(彷徨)의 심혼 크눌프! 나는 헤르만 헷세의 문학세계를 좋아합니다. 삶의 무상함과 슬픔에 대한 경험과 성찰을 기반으로 하는 헷세를 아주 좋아하죠.
엊저녁에는 여고 2학년 학생에게 헷세의 ‘데미안’과 루이제 린저의 ‘생(生)의 한가운데’에 대하여 이야기했어요. 현재의 나를 형성하는 데에 많은 영향을 끼쳐준 책들이라고. 또 이런 얘기도 했어요. 갑자기 많은 것을 잃어버린 듯한 생각도 든다고. 그 모든 것을 모두 남김없이 붙들고 싶었던 지난날의 나 자신을 갑작스럽게 현실로 이끌어 투영시켜 보니 ‘얼마나 초라한 자신이었던가’라고 개탄하지 않을 수 없네요.
J 씨! 푸르름이란 젊음 속에 내재되어 있는 청춘을 말한다고 해요. 노인들은 추억과 회한 속에서, 젊은이는 꿈과 이상 속에서 살아갈 텐데, 오늘의 나는 그 어느 층에도 속하지 못한 미아(迷兒)가 되고 맙니다.
언젠가 TV 화면을 통해 헤밍웨이 원작 ‘청춘이여 영원히’란 영화 속에서 “젊은이의 현실은 늙은이의 꿈이란다. 젊은이는 꿈을 갖고 늙은이는 미래를 갖는다”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젊은이이기에 꿈과 이상을 갖는다는 표현인데, 현실의 나는 큰 공감을 갖지 못했어요. 저는 크고 넓은 그리스도의 세계가 좋아요. 현실의 꿈과 이상을 다 잃어버린다 해도 주님을 섬기면서, J 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소담스럽게 살고 싶어요.
J 씨! 당신이 진정 나를 사랑하려면 오늘의 나, 지난날의 나, 그리고 앞으로의 나를 사랑해야 할 거여요. 나는 그 누구를 사랑한다면 오직 거룩하고 신성한 사랑의 행위만을 할 거여요.(사랑의 행위-별다른 뜻은 없어요. 저의 사랑을 함축성 있게 표현한 거예요.)
창세기 2장 20~25절에는 아담과 이브의 사랑 얘기가 나와요. 아담은 이브를 보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는 극치(極致)의 사랑 표현을 했어요. 나의 갈비뼈 하나를 찾아다니는 과정이 J 씨와 나와의 만남인지도 모르겠어요. 세상의 그 많은 사랑도 그리스도의 한없는 사랑 앞에서는 너무 가소로운 것 같아요. 진지하고 포근한 주 하나님의 참사랑 앞에 고개 숙이면서 나는 J 씨를 사랑할 거예요.
나는 크리스천이기에 주님 뜻대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세상 등지고 십자가만 바라보면서 오직 꿋꿋이 살고 싶어요. 오늘의 J 씨, 어제의 J 씨가 어떻게 제 앞에 설지라도 나는 J 씨를 위해 헌신(獻身)하고 싶어요. 헌신하고 싶다는 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헌신은 첫째, 대상이 뚜렷이 정해져야 합니다. 둘째, 끈기와 과감한 결심이 필요합니다. 제가 J 씨에게 헌신하고 싶다는 것은 J 씨가 주 안에서의 J 씨라야 하고, 주님을 닮아가는 사랑이라야 합니다. 이는 한 영혼 대 영혼으로 J 씨의 영혼을 가련히 여겨 내가 주님의 사랑(십자가의 보혈)으로 J 씨를 이끌어야 하고, J 씨 역시 제 영혼을 가련히 여겨 주안으로 이끌어 가는 사랑의 행위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J 씨! 좀 지루하죠? 한겨울의 정취를 가득 느끼게 해 준 흰 눈을 보면서 제가 재미있는 얘기를 해드려 지루하지 않게 해드려야 하는데, 말주변이 없어서 미안합니다. J 씨에게 편지 쓰다가 학교에 지각하겠네요. 오늘은 등교 시간이 11시인데, 지금 시간이 11시이거든요. 대단한 용기일까? 너무 무모한 걸까? 저도 자신이 용납 안되네요. 흐흐흐. 참, 졸업 얘기며, 카메라 준비하겠다는 거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