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는 고마움과 안타까움을

하지만 당신은 무척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분입니다

by 초들

한없는 고마움과 안타까움을


밝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둘째 동생이 왔어요. 하지만 나는 안타깝고 애처로워요. 사실 동생은 대학 진학을 할 수 없어 포기하고 전기기술학원에 등록하려고 왔거든요. 우울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미안합니다.


J 씨! 구김살 없이 사람과 사람과의 갈등(葛藤)을 진솔하게 표현해 주었네요.

새언니가 나쁜(?) 성격 때문이라며 그간의 처사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니, 참 다행스럽습니다. J 씨와 동생은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듯 숨 죽이고 무조건 이해하며 살았을 텐데. 어쩌면 새 언니도 신혼생활인데, 두 시누이와 함께 지내고 있으니 힘들 거예요. 우리는 신앙인이라서 어떠한 악인(惡人)도, 철면피한(鐵面皮漢)도, 냉혈한(冷血漢)도 언젠가 원초적인 양심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소망으로 꾸준히 인내하며 아량을 베풀어야 하는데,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요. J 씨! 아주 큰 실수를 하셨어요. 본 대로, 느낀 대로 제 별명(別名)을 붙이는 것은 자유(自由)이지만, 하필이면 별명이 ‘독사’라니요. 뭡니까? 제가 독사(毒蛇)같이 생겼나요? 독사같이 행동했나요? 참, 너무 하세요. 하지만 J 씨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까짓 별명이 뭐 그리 대수롭습니까? '람' 줄여서 '독사'라 하셨다는데, 어쩌다 독사가 되고 말았군요. 흐흐흐


얄미운 J 씨!

괜찮아요. 나는 이런 별명에 신경 쓸만한 겨를이 없으며 또 신경 쓰지 않으려고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려고 발버둥질 쳐야 하거든요. 제가 진정으로 우려하는 것은 평범한 말을 곱씹어보면 무서운 말이 될 수 있어요. ‘말속에 뼈가 있다’라고 하잖아요. 글은 쓰다가 잘못된 표현이 있으면 고칠 수 있지만, 말은 내뱉으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어요. 현재 저는 J 씨에게 눈멀고 귀먹어서, J 씨가 무슨 말을 해도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때는, ‘조심스럽게 신경을 써주십사’하는 뜻으로 말씀드렸사오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때때로 마음과 반대로 행동합니다. 고통스러울 때는 한없이 명랑하게, 반대로 기분 좋을 때는 냉정하게 행동합니다. 아픈 현실(現實)을 쉽게 살려는 묘안(妙案)이랍니다. 온통 현실을 외면할 수 없고, 그렇다고 너무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건 너무 혹독한 일이라서 순간순간 자신을 놔버리는 방법을 쓰는 것이지요.


벌써 세 번째, 아버지로부터 4급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라는 명(命)을 받았습니다. 시작이 4급이지 나중에는 사법고시를 보라고 하실 거예요. 아버지께서 못했던 꿈을 자식에게 대행해 보려는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곧 교단에 설 예비교사인데 이를 내동댕이치고 제2, 제3의 길을 나서는 건 아닌 것 같아 포기하려고요.


J 씨!

유쾌한 당신의 글월에 저는 씁쓸한 글로 계속 답하여서 죄송합니다. 막연하게 겉치레 언어유희로 당신을 좋아하는 것 아니니 염려하지 마세요. 좀 더 절실하고 끈끈한 만남을 가지려 굳게 마음먹었거든요. J 씨가 어떤 사람일지라도 나는 좋아하고 싶지만, 당신이 나는 좋아하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일 거예요. 그야말로 자신을 헌신(獻身)한다는 생각으로 나를 속속들이 이해해야 할 겁니다. 나만을 좋아하는 것도 좋지만, 내가 담당하고 있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사랑해야 할 텐데. 이를 어쩌지요. J 씨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에는 한없는 고마움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갖는데...


J 씨!

나를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랍니다. 다시 한번 분명히 감지(感知) 하시고 나를 사랑하던지, 그렇지 않던지 당신의 자유의지에 맡깁니다. 하지만 당신은 제게 무척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분입니다.


아, 오늘은 너무 무거워서 이만 그칩니다. 건강(감기 조심)과 행운을 주님께 기도드리면서

1979.03.23. (금) 오전 12시 5분 전 浩야


추신: 1. 양면지도, 글씨도 몹시 비틀어지고 말았어요. 2. 주소가 약간 바뀌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