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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들 Jun 10. 2024

하긴 내 것이 네 것인데

온통 나의 뇌세포는 너의 기억장치로

아름다운 나의 사람, 浩兄아!

 

         

편지 잘 받아 보았다. 요즈음 바빠서 편지 쓰는 걸 미루고 말았어.


오늘은 ‘학교에서 오면서 꼭 집에 가봐야지’ 하면서 행복스러운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단다. 며칠 전부터 담아 놓은 김치가 시어져서 오늘은 결심했지만 못 가고 말았어.

    

2시간 체육을 했다. 어느 시간이고 열심히야. 내 몸은 내팽개치고 열심히 뛰다 보면, 연약한 육신에 나른한 피곤이 쌓이고 만다. 순간적으로 서글퍼지고 나이가 들었다는 웃지 못할 생각이 든다.

      

주님만 생각하고 세상 것을 너무 외면하고 말았던 지난날과 현재, 인간적이고 감정적인 어느 교수의 말에 2시간 동안 눈물을 흘려야만 했단다. 하지만 그렇게 눈물겨운 세상 것들에서 초월한 지금을 버릴 수는 없을 것 같아. 무감각스럽게 느껴지더라도 나는 이상(理想)과 주님의 세계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단다.  


        

나의 浩兄아!  

   

오늘 집에 와 음악 피스(piece) 묶음을 잊었다는 사실 때문에 짜증을 냈단다. ‘왜 그렇게 뭘 잘 잃어버리는지를….’ 피아노 교본과 오르간 교본은 되찾았지만, 어찌 화가 나고, 내가 미웁든지 사랑스러운 동생들에게도 가보지 못했구나. 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더욱 그들도 사랑하려 하지만 실천이 없는 게 아쉬움뿐이야.

      

학교생활이 매우 빡빡해지고 바빠졌단다. 시간의 낭비를 줄이기 위해 7~8시까지 피아노 레슨하고 학교 가기로 했어. 두암동은 너무 멀어서 임동에서 오늘부터 친단다. 나 때문에 오고 싶은 광주도 못 오고 거기서 멀쩡하게 보내야만 하다니, 나 자신이 때로는 매우 미웁기도 하단다. 이런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나를 너는 잘 이해하겠지?

    

교수님의 훈화 속에서도 너를 발견하고 마니, 온통 나의 뇌세포는 너의 기억장치로 바꿔지던지, 늘던지 하는 것 같아. 너무 피곤할 때는 귀찮다는 생각이 들어. 너에게 공부하라고 강요하기가 싫어. 그냥 만족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


          

浩兄아!

     

너 자신을 위해서는 결코 쉬거나 안일한 마음은 갖지 말자. 자신의 인생이 보다 힘들지 않고 중량감을 느껴야 될 것 같아. 전직(轉職)하는 게 너로서는 좋을 것 같아. ‘능력과 이상이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은 그곳에 가야만 만족과 행복감에 젖을 수 있다’라고 사람들은 말하고, 내 경험으로도 그런 것 같아. 그러니 나중에 잘 생각하자.

    

안경값과 남은 돈이 다 15,000+9,000=24,000원, 나머지는 책 3권(6,000원) 사고 시골 참고서 2권 사 보내고, 치마 3,000원, 영화(1,600 ×2명), 봉사비 1,000원, 녹음기 수리비 3,000원, 용돈 4,000원, 집에 먹을 것 1,000원, 이럭저럭 써서 내 옷은 생각과는 달리 살 수 없었단다. 책 사서 일부러 안 샀어.


빨리 졸업해서 너의 고마움을 갚아야 할 텐데. 하긴 내 것이 네 것인데, 그럴 필요도 없어져 버리겠군.


          

浩兄아!!  

   

심심하지 않게 잘 보내.
건강 유의하고, 기도 열심히 하고, 책과 가까이하고, 나를 많이 생각해라.
음악이 흐르고, 너와 내가 있고, 우리들의 쉴 곳이 있을 때,
나는 좋으리. 행복하리.


          

1980년 9월 4일

     

너의 承弟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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