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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리고딕 Oct 14. 2022

비운의 공주-오스트리아 마가렛 공주 이야기

공주로서의 책임과 운명에 대한 순종 그리고 운명을 거부함

중세 이야기를 하면서 왕궁과 성당 이야기를 빼면 사실 별로 할 얘기가 없는 데 그렇다고 맨날 성당과 왕궁 얘기를 할 수는 없으니 이번에는 중세 수도원에 얽힌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Royal Monastery of Brou가 있는 Bourg-en-Bresse는 제네바와  프랑스 파리를 이어 보면 그 중간 정도에 위치한 프랑스 도시이다. 과거 사부아가의 왕국이 번성하던 시절에는 크게 번성하면서 사부아의 수도 역할까지 할 정도였는데 지금은 왕실 수도원을 제외하고는 옛날의 번성하던 시절의 빛들은 많이 바랜 인상을 주지만 그래도 오랜 시절의 멋스러움이 있는 곳이다. 


Royal Monastery of Brou는 수도원으로 유명한 '퐁트네 수도원'과 '클뤼니 수도원'이 10~12세기에 걸쳐 지어진 데 비해 그 이후 당시의 고딕 양식의 최신식 기술로 지어진 건물로 1480년부터 지어져 1504년에 완성되었다. 이 왕실 수도원이 지어진 이유가 황제의 딸이자 오스트리아 공주였던 마가렛 공주의 슬픈 사연이 함께하고 있고 공주의 이야기를 통해서 일반인도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수도원이라 생각된다.  

 

여행지를 정할 때 주요한 대도시는 어느 정도 많이 가보았으므로 주로 남들에게 잘 안 알려진 도시나 마을을 정해서 찾아가고 있다. 대도시는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풍부하니 방문한 곳이 마음에 안 들어도 대충 먹는 것으로 충족하거나 다른 이벤트로 메꿀 수가 있는 데 작은 마을 같은 경우는 그 여행지가 가진 독특한 문화유산이나 이벤트를 보고 여행지를 결정하는 데 막상 여행지에 도착해보면 그곳만의 메시지가 나에게는 잘 전달이 안 되는 경우가 있고 그럼 볼 것도 없는 데 괜히 왔다는 생각도 들어서 사실 여행을 실패한 경험도 꽤 있다. 


또 유럽의 경우는 여행 방문의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특히 유럽의 중세도시 같은 경우는 성당이나 성 또는 왕궁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니 이미 다른 곳에서 유명한 성당과 왕궁을 많이 본 이후에는 왠 만한 왕궁과 성당은 이제는 눈에 차지도 않는 어려움이 있다. 걸작품을 두루 다니면서 본 이후에는 행복한 푸념일 테지만 웬만해서는 다 시시해 보이기도 해서 여행지를 고르기가 상당히 어려운 경우도 있다.


성당의 경우도 외적으로만 보면 화려하고 웅장하며 또 건축미가 듬뿍 담긴 대표적인 사례들을 여럿 본 이후에는  성당들이 아무리 멋있어도 이제는 거기서 거기로 보여 성당을 볼 때의 감흥에 적어져 여행의 흥분이 떨어지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문화적 역사적 유산이 주는 메시지가 있고 유산에 묻어있는 이야기가 남다르게 와닿는 곳을 여행지로 정하면 여행이 다시 흥미롭게 다가온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는 데 역사적인 배경지식을 알고 나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더욱 맞아떨어지면서 그 말이 더욱 실감 날 것이다. 

 

유럽의 중세도시를 방문하다 보면 그 도시와 마을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성당이 마을마다 있는 데 겉보기에는 다 비슷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파리의 ‘노트르담의 꼽추’처럼 가공의 이야기가 배경이 되었을지라도 이야기가 엮이면 유적지는 다시 새롭게 빛을 발한다.  


Royal Monastery of Brou에서는 동화 속의 공주처럼 공주는 다 행복하고 멋지기만 할 것 같은데 그런 이미지를 깨고 나라면 저렇게 힘들게 공주로 살기 싫었을 것 같은 그런 실제 공주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 흥미로운 곳이었다. 그곳을 방문하면 수도원의 새겨진 공주를 상징하는 글자들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말을 걸어오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왕실 수도원인 Royal Monastery of Brou는 오스트리아의 마거렛 공주의 사랑이 비극적으로 끝나지 않았다면 세상에 선보이지 않았을 중세시대의 중요한 유산이다. 1480년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언 (미래의 신성 로마 황제)의 딸로 태어난 마거렛은 1482년, 바로 그녀의 어머니가 사망한 해에, 프랑스의 루이 11세와 그녀의 아버지 막시밀리안과 진행된 조약으로 루이 11세의 아들 도팽 샤를과 미래에 결혼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녀의 나이는 막 2세였었고 결혼 조약인 아라스 조약으로 아직 세상도 뭔지로 모를 3세의 어린 나이 1483년 그녀는 약혼을 하고 어린 시절을 프랑스에서 보내며 미래의 왕비 역할을 교육받게 된다. 


당시 귀족과 왕가의 결혼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의 이 약혼도 지극히 정치적이 이유에서 진행되었지만 어린 마거렛은 프랑스로 옮겨져 교육을 받고 자라며 미래 남편에 대한 애정을 키워 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1491년 가을에 갑자기 결혼에 대한 조약이 파기되고 프랑스 법원은 마가렛을 미래의 왕비로 인정하는 것을 법으로 중단했다. 마거렛은 졸지에 프랑스 왕비가 될 수 없는 상태가 돼서 프랑스에 남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모가 있는 옛날 궁정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공중에 붕 떠버린 비참한 처지가 돼버린다. 


고작 3세 때 프랑스 왕비가 될 것으로 계약되어 가족과 떨어져 프랑스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정을 붙이고 교육받고 자란 그녀에게 프랑스를 떠나야 할 비참한 상황이 되었을 때 이제 있을 곳이 없게 된 그 상처가 무척이나 컸으리라.

 

그녀의 아버지 믹시 밀리안은 결혼 조약이 파기되자 새롭게 다른 결혼 계약을 세우는 데 바로 스페인과의 동맹을 위해 마가렛을 스페인 왕자와 결혼시키는 계약이었고 그 결혼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아버지 막시밀리안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 1세 여왕 (콜럼버스를 후원해 신대륙과 식민지를 개척하고 스페인을 전성기로 이끈 여왕으로 중세도시 바르셀로나 고딕지구에서 소개됨)과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와의 동맹을 이루기 위해 그들의 유일한 후계자 아스투리아스공 요한과 마가렛의 결혼 협상을 성사시켰고 결혼 계약 후 곧바로 마가렛은 스페인으로 갔다.


아스투리아스 왕자 존과 마가렛은 1497년 4월 3일 부르고스 대성당에서 결혼했으나 결혼 후  6개월 후인 10월 4일에 존은 갑자기 열병으로 사망하고 마거릿은 17세의 어린 나이에 미망인이 된다. 


미망인이 된 마가렛은 다시 가문의 필요에 의해 정략적으로 1501년에 사보이 공작 필리베르트 2세와 결혼했는데 이 결혼의 성공은 마가렛의 아버지인 황제 막시밀리안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필리베르트 2세의 왕국은 서알프스의 전략적 위치 때문에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 사이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보이 가문은 저의 다른 이야기 '제네바 풍속'편을 보면 전략적 요충지인 제네바를 사보이 가문이 침략하여 제네바 시민이 용감하게 물리친 내용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마가렛이 사보이에 왔을 때는 남편이 된 필리베르트의 배다른 형제인 르네가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으나 마거릿은 르네의 권력과 재산을 없애기 위해 싸웠고, 아버지 막시밀리안 (신성 로마 황제)과 함께 르네의 권력에 합법성을 부여한 편지들을 무효화시켜 반역자로 선언된 르네는 프랑스로 피신하게 되고 마가렛은 아버지 막시밀리안의 지원으로 권력을 잡게 된다. 


마가렛은 사보이 정부를 장악하게 되었고, 그녀의 남편 필리베르트는  권력보다는 사냥과 같은 취미에 관심이 많았으며 마거릿과는 대립되는 사항이 없이 둘의 사이가 무척 좋았다고 알려져 있다. 다행히 정략결혼이라고 해서 다 불행하지는 않았던 것인데 마거렛과 필리베르트는 조화롭고 잘 살았기 때문에 마가렛은 이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정치에 능한 마가렛은 사보이의 평의회를 소집하고, 장교들도 그녀가 직접 임명했으며, 그녀는 프랑스와의 승인업무와 계획도 직접 다 승인했다고 한다. 


그러나 승승장구였고 찬란한 앞길이 영원할 것 같았던 어린 부부의 결혼생활은 결혼 3년 만인 1504년에 필리 베르트가 25세에 갑자기 죽음으로 인해 그 결혼은 비극으로 끝나버린다. 필리 베르트가 갑작스레 늑막염으로 죽음에 이르자 정략적 결혼으로 만났었지만 사랑하게 되었던 남편이 죽음에 그녀는 슬픔에 잠겨 자신도 바로 따라 죽으려 창문 밖으로 자신의 몸을 던져버렸다고 한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이후에는 생각을 바꿔서 자신이 남편을 따라서 바로 죽기보다는 죽은 남편을 추모해주기로 결심하고 그녀는 남편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남편의 심장을 방부 처리하여 간직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긴 금발의 머리를 자르고 상복을 입고 지냈는 데 당시 궁정 역사가였던 장 르메르드 벨 제스는 마거렛에게 "Dame de deuil" (상복의 여인)이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고 한다.

브루 교회 내 사보이 필리베르 2세 무덤(프랑스 앵주 부르앙 브레스)



사보이 공작부인이었던 마가렛은 이후 성공적인 경력을 쌓으며 여성 통치자의 영역을 개척했다고 평가받으며 네덜란드 일대 저지대 지역의 총독으로까지 임명되고 1519년부터 1530년 사망할 때까지 무기한 재임명될 정도로 성공적인 여성 리더십의 여성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녀의 남편이 사망한 후 아버지인 황제 막시밀리안은 영국의 헨리 7 세 와 마거릿의 결혼을 협상하며 그녀에게 다시 결혼할 것을 강요하였으나 마가렛은 남편 사망 후 2 년 동안 사보이에 머무르며 상복을 입고 이후부터는 막시밀리안의 결혼 협조 요구를 거부했다.


Royal Monastery of Brou는 자식이 없었던 마가렛이 죽은 남편의 시신과 함께 자신도 그곳에 그녀의 사후 묻히기 위해 1506~1532 동안 건설되었다. 황제의 딸이었으며 최고 부유한 자산가였고 총독으로 성공했던 그녀답게 당대 고딕의 최신의 걸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최고의 기술자를 동원해서 이곳은 건축되었다. 


외부 지붕은 부르고뉴 스타일의 타일이 장식되었으나 내부는 고딕식 최신식의 유행 스타일로 정밀하게 지역색과 당시의 유행을 조화시킨 걸작품이 완성되었으나 1530년에 그녀가 죽었으므로 1532년의 완공된 모습을 보지 못하고 그녀는 죽었다. 그 공간의 바닥과 천장 그리고 이곳의 정원을 바라보면 마가렛이 생전에 이곳을 방문하여 건축현장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남편을 그리워하고 자신도 묻힐 이곳의 건설현장에서 어떤 복잡한 심정과 애정을 가지고 이 건설 현장을 지켜보았을지 그녀의 시선이 느껴진다. 특히 그녀와 남편이 이니셜이 새겨진 곳에서 그녀의 안타까우면서도 간절한 마음이 전해져 온다.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이 무엇인지도 모를 나이에 그녀는 공주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감내하면서 결혼 계약과 결혼 계약 파기를 겪었지만 모든 운명을 다 받아들였다. 또 어린 나이의 결혼 후 첫 남편의 죽음과 두 번째 결혼 등 자신이 선택한 삶이 아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교육받은데로  운명들을 자신이 지켜야 할 약속이라 믿으며 운명을 따르며 살았다. 


마가렛 공주. 결혼으로 인해 온갖 마음의 고난을 겪으며 공주라는 인생의 현악기를 아슬아슬하게 연주하던 그녀는 2번째의 결혼으로 비로소 사랑과 행복도 알게 되었지만 3년의 결혼생활 도중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주변에 기댈 곳이 없었던 외로웠던 그녀의 인생 현악기는 팽팽하게 줄이 당겨져 더 이상 당겨질 수없을 만큼 팽팽해진 그녀의 인생의 현속에서 그녀의 더 이상은 삶을 지탱하지 못하고 그녀 자신을 창 밖으로 던져야 했을 만큼 숨쉬기조차 힘든 고단한 삶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목숨을 던지기로 작정할 만큼 고단하고 팽팽한 숨 막히는 삶을 살면서 자식도 없었던 그녀가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죽지도 못하고 살아야 했던 이유를 찾아야 했었으므로 그 괴로운 마음을 달래보고 살아보기 위해 삶의 그 어떤 이유를 찾아보려고 이 아름다운 유산을 건설하기로 마음먹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숨쉬기 힘든 팽팽한 현과 같은 공주의 삶에서 조금만 더 힘주면 끊어져버릴 것만 같은 슬펐던 그 삶 속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죽은 남편과 그녀가 함께 묻힐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어야겠다는 그 소망이 어쩌면 그녀의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찌 되었건 그녀의 삶의 고통의 경험이 이렇게 아름다운 유적을 만든 이유가 되었고 후대에게 이곳을 돌아보면 마음에 그녀의 고통이 전해져 와 애잔한 여운을 남기는 걸작품 선물을 주었으니 역사의 위대한 유산을 파헤쳐보면 그 과정에서 위대한 걸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 눈물의 과정 없이 이루어졌던 걸작품이 과연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찌 보면 아름답게만 보일 수 있는 것이 공주라는 삶이겠지만 그 실상은  태어나면서부터 계약으로 결혼이 예정되고 왕비 교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정확한 이유도 모르게 파혼 후 다시 공주라는 운명을 감내하며 계약결혼을 계속해야 했던 그녀.  남편의 죽음 직후 자신도 바로 따라 죽으려 했을 만큼 갑갑한 그녀의 인생이었지만 남편의 죽음 이후부터는 다른 삶을 살기로 작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부터는 공주로서 주어진 결혼 계약의 운명을 거부하고 다른 나라 왕가와 진행하려던 결혼 계약에 협조하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결혼으로 공주의 의무를 하는 대신에 정치적으로 성공적인 리더십을 보이고 훌륭하게 통치하였으며 아름다운 문화적 유산들을 남겼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녀에게 강요된 공주의 운명이 결코 행복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강요된 공주로서의 결혼 계약 의무를 이행하기 노력하였고 남편의 죽음 이후에는 강요된 운명을 이제는 순순히 받아들이지만은 않았고 그녀의 삶에 강제로 부여된 결혼 계약의 의무를 거부였지만 그것은 공주로서의 그녀의 의무를 저버린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녀는 공주로 주어진 강제로 강요된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 것이었고 대신에 새로운 공주로서의 삶을 그녀 자신이 개척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에서 자라 그녀를 외국인으로 취급하며 그녀를 정치인이자 총독으로 인정하지 않던 네덜란드 일대에서 당당히 총독으로 임명되고 위대한 유산들을 남기며 사망할 때까지 존경받은 여성정치가로서 그녀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유아기 어머니의 죽음 이후 계속된 고난이 그녀를 단련시켰고 그녀만의 새로운 방식으로 현명한 통치자의 역할과 정치가로서 또 그녀에게 주어진 공주의 의무와 그녀 자신의 살았던 사회 속의 역할들을 훌륭하게 잘 수행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건설한 수도원과 교회에는 남편과 그녀의 이니셜 필리베르트와 마가렛의 P와 M글자가 새겨져 있다. 아마도 그녀가 그 글자를 새기기를 원했으리다 생각한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묻혀있는 이곳을 걸어보면 마가렛이 공주로서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녀가 새긴 필리베르트와 마가렛의 P와 M글자를 보면 고단의 표정의 그녀를 이후에 태어난 내가 엄마 같은 마음으로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필리베르트2세와의 결혼도 정략적인 결혼이었지만 사랑하게 된 남편의 죽음 소식을 듣고 그녀의 삶이 무너져 내림을 느끼고 얼마나 낙심되었을지 그 시대의 그녀를 만나서 정말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무섭고 또 외롭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너무 팽팽한 현 같아서 이제 이 세상에서 튕겨져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공주고 뭐고 도저히 힘들어 못살겠다 싶어서 죽으려고 창밖으로 뛰어내렸던 그 고통을 겪을 후에야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곳의 아름다움을 보라. 비록 이곳뿐 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의 아름다운 작품과 유물 중 창조자의 고통의 눈물 없이 만들어진 것이 있을까?


마가렛의 눈물로 만들어지고 세워진 이곳의 의미를 느끼며 이곳을 바라보기 바란다. 어찌 보면 이곳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세상에 아름다운 수도원과 교회가 많아서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곳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그녀와 그녀 남편의 무덤이 있는 이곳에 새겨진 필리베르트와 마가렛의 P와 M글자를 보는 순간 이곳의 아름다운 창과 지붕,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는 이제 남다르게 보이기 시작하는 놀라운 경험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곳에 새겨진 필리베르트와 마가렛의 P와 M글자가 나에게 무슨 얘기를 하는지 귀를 기울여 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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