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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으로 향하는 길

by 강다희 Nov 20. 2023

카야산도 마침 공주를 보며 사야를 떠올리고 있었기에 이런 우연도 없었다.     

“그 분이 누군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비밀이에요. 제가 짝사랑하던 분이었거든요.”     

“이런. 실례가 되는 질문을 했군요.”     

미안하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런 카야산 얼굴을 빤히 바라본 크리스탈 공주 시선이 땅으로 향했다. 

입모양이 움직이는 걸로 보아 뭐라 작게 중얼거리는 듯 했지만 들리지가 않았다.      

크리스탈 공주는 고개를 들어, 이번에는 크게 말을 뱉어냈다.     

“제가 누군가를 짝사랑 했었다는 것도 비밀이에요. 설마 숙녀의 비밀을 말하고 다니시는 분은 아니시겠죠?”     

“물론이죠.”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크리스탈 공주가 ‘다행이에요.’라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 공주가 갑작스레 무표정을 지은 것은 빠른 변화였다.     

“디릭스 영식.”     

“예.”     

“제가 왜 영식의 생일 파티에 오게 되었는지. 그 경유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능청스럽게 ‘글쎄요? 오히려 오지 않으셔도 되는 이유는 알고 있습니다만.’ 라며 답하자 무표정에서 희미한 미소가 다시 떴다.     

“대충 눈치 채신 모양이군요.”     

“무엇을 말이죠?”     

“이제 보니 짓궂은 분이시네요. ‘혼약’말입니다.”     

“죄송합니다. 갑작스러웠으니까요.”     

“저도 죄송하지만, 전 당신과 혼약하고 싶지 않아요.”     

미소를 지으며 ‘왜죠?’라고 묻자, 크리스탈 공주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으니까요.’라며 답했다.     

“과거형이군요.”     

그 말에 크리스탈 공주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눈을 보아서는 잊지 않은 게 분명한데 왜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일까.     

“죽은 사람을 더 이상 좋아할 수는 없으니까요. 아니, 좋아하지 말아야하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아직 내려놓지 못한 상태. 마음이 밖에 있는 한 영식과 결혼할 수 없어요.”     

“저런. 왕께 말씀은 해보셨는지?”     

“아버지는 가혹했어요. 싫다고 한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았지요. 이번 파티에도 억지로 가시라고 하신 분인데 이유를 말한다고 한들 제 말을 들어 줄 까요?”     

“그거야 모르는 일이죠.”     

크리스탈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모르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아버지가 그자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전 대답할 자신이 없어요.”     

노예라도 좋아했었던 것일까?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크리스탈 공주가 그 궁금증을 해결 해주었다.     

“어머니의 친우이셨거든요.”     

“.......”     

묘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과 비슷한 분위기에 현재 죽었으며 사야의 친구. 

그것은 자신 얘기가 아닌가?     

“누나 동생 하는 사이이면서 어머니의 기사이셨지요. 어머니가 기사일적에는 기사단장이기도 하셨고요.”     

이건 정말 커다란 결정타였다.      

혼란스러운 눈으로 크리스탈 공주를 바라봤지만 크리스탈 공주는 눈치 채진 못했는지 말을 이어갔다.     

“제가 듣기론 아버지는 그 사이를 질투했었다고 해요.”     

“......그거 참. 말하기 곤란하겠군요.”     

“네.......”     

그 다음 침묵이 이어갔다.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그 분위기를 떨치기 위해 크리스탈 공주가 입을 열었다.     

“디릭스 영식도 좋아하는 분이 있으신가요?”     

“저는 없습니다.”     

카야산은 태연한 얼굴로 거짓말 뱉어냈다. 

공주는 그런 그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렇군요.”     

잠깐 바람도 쐬겠다.      

다시 안으로 들어오자 이목이 집중되었다. 

할 수 없이 귀족들과 대화를 유연하게 해나간 둘에게 대놓고 묻는 한 영애물음에 멈칫해야했다.     

“저....... 디릭스 공자님과 크리스탈 공주님과는 혼약할지도 모르는 건가요?”     

크리스탈 공주가 역시나 소문이 나겠구나 싶어 난처한 얼굴을 하자 카야산이 입을 열었다.     

“오해를 하셨군요. 공주님과는 어쩌다가 연이 닿아 제 생일파티에 고맙게도 와주신 것일 뿐입니다.”     

발 빠른 카야산 대처에 크리스탈 공주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그런데 그때 이 근처로 오던 시녀의 발이 삐끗했다.      

와인이 땅 바닥에 깨지고 공주의 드레스와 영애의 드레스가 젖게 되어버렸다.      

화가 난 영애가 막 욕설과 함께 입을 열려던 참에, 

찬물이 확 끼얹어버린 사람처럼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여긴 영식과 공주 앞이었다.      

간신히 참아낸 영애가 불쾌한 눈초리로 엎어져 있는 시녀를 노려보았다.      

“이게 뭔 짓이지?”     

딱딱한 어조였다.     

재빠르게 무릎을 꿇은 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반복하는 모습조차 불쾌했다.      

앞에 공주와 공자만 없다면 막말을 하려던 것을 겨우 참아내고 있던 영애는 막상 시녀를 일으키는 공자를 보며 눈썹을 휘었다.     

“제 쪽에 있는 아이입니다.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군요. 죄송합니다. 공주님과 영애의 아름다운 드레스는 꼭 보상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자가 사과를 하자 할 말을 잃은 영애가 ‘괜찮습니다.’라고 말한 후 입은 다물었다.      

사과를 했음에도 불쾌함이 사라지지 않아보였다. 

한편 공주는 젖은 드레스를 빤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축축하군요. 마음 같아서는 저 아이의 뺨을 후리고 싶지만 영식의 생일이니 그나마 참도록 하겠습니다. 영애. 저와 같이 드레스를 갈아입으러 가도록하죠.”     

영애 얼굴이 환해졌다.      

공주와 단 둘이 같이 있을 기회라니. 

쉽게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 공주 속 깊은 의도를 깨달은 카야산이 자그마하게 입모양으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자 공주가 미세하게 웃었다.      

그리고선 영애와 눈이 마주칠 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억지로 짠 불쾌한 무표정이 되는 모습이 하여간 색달랐다.     

공주와 영애가 연회장을 나가고 새파랗게 질려있던 시녀가 이번에는 카야산에게 사과를 해댔다.      

카야산은 예전 자신의 전속 시녀였던 헤르를 보면 한숨은 내쉬었다.      

보나마나 자신을 보고서는 두려움에 실수를 저지른 것일 거다.     

“되었다, 가서 일이나 마저 해라.”     

헤르는 고개를 크게 숙이더니 후다닥 벗어났다.      

다친 것인지 절뚝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이 가까이 가면 두려워 할 것이기에 지나가는 시종을 붙잡아 그녀를 치료하게 해두라고 일렀다.     

“착한 척이라니 우습네.”     

그런데 뒤에서 잔뜩 비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갤 돌리자, 금발 영식이 비뚤하게 입가를 올리고 있었다.     

누군지 파악이 안 되어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 영식이 카야산을 지나쳤다.     

“생일축하는 개뿔. 네가 태어난 건 참 세상이 낳은 불운일 터인데.”     

도발하듯이 말을 뱉어내며 지나간 자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옆에서 그림자가 ‘저 새끼.’라며 욕을 했다. 

그림자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 시선이 ‘누구?’를 담고 있자 그림자는 짜증이 깃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햇병아리 용사라고 해야 하나. 용사 흉내 내는 새끼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비스무리 한 놈.”     

바본가? 설명이 제대로 되어있지가 않았다.      

나중에, 

방에 가서 천천히 묻기로 하고 발을 돌려 귀족들과 어울렸다.      

그 겉은 친절함을 담았지만 속은 무척이나 불편한 채로 말이다.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은근히 악의로 가득 찬 눈들이 많군.’     

무리들의 영식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가 눈동자를 굴러 연회장을 훑었다.      

‘증오.’     

‘질투.’     

‘원망.’     

여러 가지 섞인 감정들이 찐득했다.      

그럼에도 옆에서 그림자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 감정들을 즐기는 듯 말이다.      

카야산은 불쾌하기만 했지만 인내하며 표정에는 구김살을 보이지 않았다.     

이들 감정을 잠시 모른 척 흘려버리자 판단 때문이었다.     

그들 감정을 하나하나 상대하기도 그랬으며 에티븐인 척 하는 연기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 지루한 생일 파티가 끝나면 이 연회장에서 생긴 의문들은 차차 알아갈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          

인기척으로 뜨거웠던 연회장이 점차 사람들이 빠져나가면서 식어갔다.      

시간이 흐르고 아직 밤인 시간, 

어느 누군가가 창문을 통해 카야산 방에 들어왔다.      

조용히 눈을 감아 잠을 청하고 있던 카야산 목 언저리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천천히 눈을 뜬 시선이, 

한 인영을 고정시키게 되었다.      

날카로운 송곳니와 비슷한 무기류를 목에 가까이 되어 있는 모습은, 

꼭 암살하러 온 사람이었다.     

아무리 시간과 수련이 부족해 옛날 실력을 끌어 오지 못한 카야산일지라도, 

그동안 나름 실력을 쌓아두었을 터인데 그 인기척을 못 느꼈다.      

은밀함으로 보아 뛰어난 암살자다.     

그러고 보니 오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고깝지는 않았다. 

그 시선 중 한명이 보낸 자인 것일까........?     

“에티븐 내가왔어~!”     

그런데 그런 의문을 깨도록 만드는 발랄한 여성 목소리에 살짝 눈썹을 휘었다.      

그 반응과는 달리 여성은 느끼한 손놀림으로 카야산의 옷 속에 손을 집어넣어 배를 쓰다듬었다.     

“헤에~? 못 본 사이에 복근 만든 거야? 이건 이거 나름 좋을지도”     

여성은 더욱 은근한 손놀림으로 배를 쓰다듬더니 점점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 손을 잡아 떨어트려 상체를 일으켰다.      

“당신 뭐야.”     

경계가 잔뜩 낀 목소리에 여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웬일로 싱거운 장난이야?”     

장난?      

자신을 암살하려고 온 자가 아닌 아는 사이인가?      

복잡한 느낌에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자, 

여성이 손을 뻗어 카야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네가 시킨 임무를 완성했으니 보상을 주셔야죠? 공자님?”     

“무엇을?”     

“또 장난~. 당연히 섹스지.”     

“.......”     

카야산은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또 눈 떠보니 얼굴도 모르는 여인네랑 성관계라니 무슨 말 같지도 않는 개소리인가. 

카야산이 조용히 머리를 집었다.     

“.......우선 임무 보고부터.”     

“그래. 그래. 그게 우선이지~”     

여성이 안주머니에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오리온 드래곤 산맥에서 겨우 찾아낸 거야.”     

세상에나. 드래곤 산맥에 갔다 왔단 말인가?      

놀라움과 함께 꺼내들은 무언가를 바라봤다.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녹색 액체였다.      

“한 번 먹으면 눈치 채지 못하게 서서히 죽어가는 데다가 몸에서 독극물이 절대 발견하지 않는 독을 찾으라니. 얼마나 찾기 어려웠는지 알아?”     

상의 안속으로 또 다시 들어간, 

여성 손놀림이 은근해졌다.      

불쾌해짐을 느꼈다.      

이러면 마치 남창 같지 않는가?      

돈이 아닌 독이라는 점이 좀 미묘했지만 무언가의 계약으로 이 여성에게 몸을 팔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거절 표시를 하려했던 카야산은 갑작스런 그림자 목소리에 움찔했다.     

“안 돼. 그 독은 꼭 필요한 거야.”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듯,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두었다.     

“왕을 시해할 거 거든.”     

뭐?      

귀가 잘 못 되었는지 의심이 들었다.      

맙소사 이놈 에티븐이라는 자식은 대체 어떤 꿍꿍이기에 왕을 시해하려 든다는 것인가?     

속으로 경악하고 있을 때 여성 손이 아래로 향했다. 

하의를 벗기려는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아 손을 덥석 잡았다.      

지금은 여성과 관계가 아닌 설명이 중요했다.     

“씻고 와.”     

카야산 말이 의외였던 건지 고개를 갸웃거린 여성이 말했다.     

“오늘 따라 이상하네. 에티븐? 뭐, 네가 이러니까 감칠맛 나기는 하지만 서도~. 좋아 씻고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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