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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으로 향하는 길

by 강다희

달빛조차 없는 푸른 밤하늘에는 어두운 구름만이 띄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불빛이 없는 마을 안에 부엉이 소리만이 낮게 울려 퍼져 모두가 잠을 자고 있는 그 이른 시각에 검은 후드를 싼 자가 거대한 저택에서 나와 마을을 벗어났다. 산속으로 향해 혼자서 중얼거려 말 하더니, 방향을 정해서 숲 안을 깊게 들어갔다. 무언가를 찾던 그자는 숲속에서 조용히 숨겨져 있는 오두막집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허락도 없이 영지 안에 오두막을 지은 거지?’

세금을 내야하기 때문에,

허락 없이는 집을 지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져 있는 오두막집이라니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자는 오두막에 귀를 가까이해 인기척을 살펴보았다.

“읍! 읍!”

“으브븝!!”

“으.......읍!”

한명 기척이 아닌 여러 명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인기척들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상황 같았다.

달칵. 문을 조심스레 열어 눈에 힘을 줘 안을 살폈다.

어두운 인기척을 봐선 사람 형상이었다.

“읍! 읍!”

사람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자는 가져온 등불로 불을 켜 안을 밝게 했다.

화악-.

오두막 어둠이 가셨다.

여성들과 아이들이 밧줄에 꽁꽁 묶여 입을 막고 있었다.

얼떨결 납치 장면을 발견하게 된 후드를 쓴 그자.

카야산은, 불을 껐다.

“캬아~~ 이게 뭐야~? 누가했는지는 몰라도 완전 마음에 드는데? 딱 내 취향저격이야.”

옆에서 그림자가 깐죽거렸다.

여전히 무시로 일관한 채 여성들과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쉿.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할 수 없이 뱉어낸 협박성어린 말에 여성들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 중 가까운 여성을 뽑아 입을 막고 있던 천을 벗겼다.

“푸하. 누.......누구시죠?”

여성은 자신들을 납치한 걸걸한 목소리가 아닌 앳된 중저음과 미성이 섞인 목소리가 들리자 의아해보였다.

하지만 미지의 무엇인가는 두려움을 만드는 법.

목소리는 공포에 질려있었다.

“우연히 이 오두막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당신들은 어느 영지 사람들인가요?”

“저........ 저는 쿠루잔 영주민이에요.”

쿠루잔?

미간을 모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어디선가 들어본 영지였다.

몇 초의 시간을 허비하며 생각해본 결과,

쿠루잔은 여기서 좀 더 먼 영지라는 것을 떠올렸다.

여기서 의문점이 들었다.

왜 다른 곳에 영주민들을 납치하여 이 디릭스 영지로 데려온 것인가?

그런데 그때 옆에서 키득키득.

웃는 그림자의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스치는 불안감에 카야산이 그림자를 바라봤다.

‘설마.’

그림자가 커다란 송곳니를 보이며 키키키 웃기 시작했다.

정말 재미있다며 웃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불쾌해짐과 함께 곤란해져 한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그러고 보니 에티븐이 지은 죄 중 하나가 납치라고 했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이들이었다니.

그것도 엄청 최근이다.

이 사실을 다른 영지의 영주가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게다가 가문의 명예가 바닥에 내리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을 다시 돌려보내기에는 어느 영지에서 납치했던 것인지 추론하는 것쯤은 시간문제였다.

많은 이들을 이동할 때 목격자들도 있을 테고, 흔적들이 수없이 남아 있을 테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둑질을 하기위해 숨길 장소를 찾고 있던 와중에 이게 뭔.......

“저.......저기?”

한동안 침묵으로 인해 더욱 두려움에 찬 여성 목소리에 상염에서 벗어났다.

“죄송합니다. 한동안 입 막고 계세요.”

“예?”

영문을 몰라 되묻는 여성 입을 천으로 다시 막았다.

영주민이 자신 때문에 더 두려워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해가 뜨면 올 이들을 기다리기 위해서는 그 모습도 중요한 함정이었다.

다음날 아침.

땅거미가 가시고 해가 뉘엿뉘엿 올라오고 있었다.

“네가 소개했던 발랑 까진 그 계집년 속살이 맛있던데 오늘 돈 받으면 그 계집년 맛 좀 보려 하는데 어때? 같이 갈래?”

“흐흐. 그딴 헐어가지고 낡아빠진 걸레년 보다는 여기 있는 아무 계집이 더 죽일 거 같은데 말이지.”

오두막 밖에서 귀가 썩을 거만 같은 추잡한 소리가 들려왔다.

오두막에 앉아 인상을 찌푸린 채 자리에서 일어나 오두막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이라는 소리와 함께 사내들의 시선이 카야산에게 옮겨졌다.

수상한 후드 차림의 남자가 서있자 사내들은 급히 허리에 차 있던 검을 빼들었다.

‘챙.’

‘챙.’

두려움을 자극하는 쇳소리에 오두막에 있던 영주민들이 ‘웁. 웁.’ 발버둥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슬며시 닫아, 그들을 잔잔히 훑은 후 후드를 벗었다.

“귀족나리?”

후드를 벗자, 사나운 용모에 사내들이 안심한 얼굴로 칼을 집어넣었다.

“사람 놀라게 왜 후드를 쓰고 그러슈?”

사내 한명이 투덜거리듯 말하자 삐딱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럼 얼굴을 보이며 다니라는 소리인가?”

“아니....... 그건 아니지만.”

사내가 당황해 말을 얼버무리자 무심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하는 일은 잘 되가는가?”

“당연하죠. 우리 산적을 무시하면 섭섭하죠. 귀족나리.”

“그런데 그.......돈은?”

카야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품안을 뒤졌다.

“........일로 와서 받아가.”

평소에는 싸가지 없게 던지던 인간이 가까이 오라는 듯이 고개를 까닥이자 의아함을 느낀 사내 두 명이 가까이 다가갔다.

느긋하게 짝이 없는 얼굴로 품안을 뒤적이다가 한 주머니를 꺼내 한 사내에게 가슴팍에 누르듯 건넸다. ‘고맙슈.’ 라는 말을 내뱉으려던 사내의 눈이 핏발이 되어 커져갔다.

“컥!?”

주머니 안에서 날카로운 무언가가 튀어나와 사내의 심장을 찔렀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다른 한명 사내가 검을 뽑으려 했지만 다른 손이 발검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팔꿈치가 관자를 가격했다.

“컥!!”

골이 흔들리는 느낌에 사내가 뒤로 주춤하자,

심장이 찔린 사내가 가까스로 움직여 검을 휘둘렀다.

‘훙-!’

커다랗게 원을 그리듯 휘둘러진 검을 뒤로 움직여 피해 무거운 검을 들고 있는 그 손목을 잡아 꺾었다.

“크악!”

결국 검을 놓친 사내의 모습을 가만히 둘 생각이 없었다.

바로 검을 꺼내 목을 그었다.

푸슉.

튀어나오는 피가 아찔했다.

그리고 그 피에 분노한 다른 사내가 달려들었다.

아무렇게나 휘둘러지는 검과 카야산 검이 충동했다.

쨍! 이라는 쇠끼리 부딪힌 맑은소리가 청각을 자극시켰다.

카야산은 비죽 웃으며 사내의 검을 내려트린 후 검을 위로 휘두르듯 목을 쳤다.

사내 목이 날아가 땅을 굴렀다.

그럼에도 그 치욕스러움과는 달리 살기가 푸른 부릅뜬 눈은 카야산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후. 하고 숨을 내쉬며 부들거리는 손목을 바라봤다.

역시나 아직도 약하다.

더 훈련이 필요하다고 느끼며 피를 대충 털어내고 서는 검집에 넣었다.

“이야~. 배신을 하다니 최악의 악당이신데?”

옆에서 그림자가 깐죽거렸다.

그런 그림자의 태도에도 아랑곳없이 무표정으로 응수하며 말했다.

“닥쳐. 죄 두개 더 추가다.”

끼이이익. 또다시 오두막이 열렸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불안으로 떨고 있던 영주민들이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극도 두려움에 아이들은 갈기를 문채 울고 있었다.

왠지 한숨만 늘어난다고 느끼며 후드를 다시 썼다.

며칠 동안 부지런히 움직여 이들을 다른 영지에 옮겨놔야겠다.

완전범죄는 아니라도 제발 들키는 날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카야산이었다.

“에이 설마. 이 인간들을 다시 돌려놓을 생각인 건 아니겠지?”

그림자의 당황스러움이 묻은 물음에 카야산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설마가 설마다.”

“뭐!? 계약과 반대되는 짓을 하면 네 영혼은 내 것이 된다니까!?”

웬일로 평소답지 않게 흥분한 그림자의 물음에 카야산은 그림자를 바라봤다.

저 녀석도 당황하긴 하는군.

“내가 계약 진행 계속 하되. 자신이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을 것. 자신이 무엇을 하든 위반되지 않을 것. 그것이 새로 집어넣은 계약이지 않나?”

하. 그림자가 기가 찬 소리를 내뱉었다.

설마, 그 무엇을 하든이 착한 짓이라니.

어이가 가출할 거 같은 심정이었다.

분명 소문으로 듣기론 흑기사는 무시무시한 놈이었는데

실상은 아주 조금은 다른듯했다.

“그나저나. 그림자. 너”

“그림자라고 하지 말라니깐?”

“땅 파는 재주라던가 그런 거 비슷 무리한 거라도 있나?”

그림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두더지야? 재주라고 하지 말고 능력이라고 하지 그래?”

아무튼 있다는 거 아닌가.

“그럼 파.”

“돌았어!? 날 부려먹으려고 해? 내가 네 사역마야?”

“옆에서 말만 쫑알쫑알 거리지 말고, 좋은 능력 있으면 쓰지 그래?”

“난 악마야. 대가없이 안 움직여.”

“흠. 그럼 지금 당장 죄 하나를 지으면 들어줄 건가?”

그림자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서 지을 죄란 여인들 겁탈과 아이들 아동폭력 밖에 없었다.

여인 겁탈은 전에 했으니, 이번엔 아동폭력에 해당할 것이다.

“좋아. 지금 당장 죄 하나를 지으면 들어주지. 단, 약하게 하는 게 아닌 화끈하게 행동해야 들어줄 거야.”

카야산이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그림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관계로 혼자서 얘기하고 있는 듯이 들리고 있어서 두려움 찬 여인들과 아이들은 온갖 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미친놈이 우릴 어떻게 하려거지?

저 미친놈이 혼자서 중얼거린 말 중에 당장 무슨 죄를 저지른다고 했으니,

우릴 어떻게 할 심산인건가????

알 수 없는 미지의 공포에 벌벌 떨 때쯤,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을 베는 소리였다.

“으으으으읍!!!”

“으으으으읍읍읍!!!!!!”

여인과 아이들은 두려움에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몸부림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야산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턱 선을 타고 땅바닥에 뚝하고 떨어졌다.

허벅지에 깊게 들어간 칼날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자해.”

그림자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거 참 젤 무서운 죄악이지.”

악마가 만들었던 구덩이로 들어가 창문으로 자신의 방에 도착한 카야산은 노크소리가 들리자 어서 후드를 벗어 침대 밑에 숨기고 서는 욕실로 들어가 피를 씻어내 대충 붕대로 피를 압박했다.

씻고 나오자 여전히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입가를 만져 표정 흐트러짐을 검사한 후 방문을 열었다.

“편안히 주무셨나요? 도련님. 오늘은 아침 식사가 조금 늦어졌습니다. 어서 빨리 가시죠.”

예전에 자신의 전속이었던 시녀가 아닌 다른 시녀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시녀는 자신을 보며 부들부들 떨기에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바꿔달라고 명했었다.

고개를 까닥 이고서는 식당으로 걸어 나갔다.

식당에 모두 모여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때 부인이 입을 열었다.

“에티븐 뭐 가지고 싶은 거 없느냐?”

“.......?”

카야산이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머. 얘. 좀 봐. 설마 일주일 뒤가 네 생일이라는 것을 까먹은 거니?”

전혀 몰랐지만 태연하게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럴 리가요. 갑작스러워서 그랬을 뿐입니다.”

거짓말은 수준급이었다.

그 모습에 부인이 흐뭇하게 호호 웃었다.

“하긴. 너는 네 생일만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아이지. 커서도 여전하구나.”

카야산은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지고 싶은 게 무엇이니?”

생각해보지도 못한 질문에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엇을 가지고 싶은가.

마침내 무언가를 생각해내 입을 열었다.

“선물이라고 하기보단....... 기사 시험을 보고 싶습니다.”

“........뭐?”

공작과 부인. 그리고 그 마타리 조차 놀란 눈이 되어 바라봤다.

그런 셋 반응과는 달리 무덤덤한 얼굴로 말 이어갔다.

“죄송합니다. 기사가 되고 싶어졌습니다.”

공작이 이마에 손을 얹으며 한숨 내쉬었다.

“에티븐. 우리는 공작가문이란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왕궁에서 훈련을 받지도 않은 네가 어떻게 기사가 된다는 게냐? 게다가 너는 검술 검자도 모르지 않느냐?”

“이 나이 때부터 왕궁에 들어가면 됩니다.”

“하!”

공작이 기가 차다며 인상 찌푸렸다.

부인도 마찬가지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에티븐. 다른 걸 생각해보렴. 왜 하필 기사니?”

“무언가를 지켜나가는 기사가 되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정 이 나이 때에 들어가는 게 꺼려지신다면 공적을 세우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아니? 제발. 그런 헛소리 하지를 말거라.”

“헛소리가 아닙니다만.”

부인은 에티븐이 아무리 우겨도 헛소리를 들렸기에 간절한 얼굴로 두 손을 모아 ‘제발. 에티븐. 이러지 말렴.’이라며 에티븐에게 빌기까지 했다.

공작 또한 엄격한 얼굴을 지으며 ‘안 된다.’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역시 들어 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예상했기에 쓴웃음 지었다.

“저는 괜찮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때 의견을 잘 내지 않던 마타리가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카야산 눈을 바라봤다.

아아. 역시나, 직진을 바라보는 눈이다.

그 직진이 어떤 것일지는 아직 [직감]이 얘기 하지 않았다.

“최근에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오라버니가 검술 훈련하고 계시더군요. 비록 독학인 모양이었으나 문외한 제 눈으로 봐도 실력이 느는 오라버니가 보이더군요.”

공작과 부인이 놀랍다는 듯이 카야산을 바라봤다.

“그 말이 사실이냐?”

공작 물음에 얼떨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 훈련을 하게 된 것이냐?”

아주 최근이었지만 거짓말을 보태기로 했다.

“조금 오래 되었습니다.”

한 달 전을 조금 오래전이라고 한다면 조금 오래 되었다고 표현 할 수도 있겠다.

약간의 속임수를 눈치 채지 못한 공작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게으른 자식인줄 알았더니 부지런한 자식이라니.

어느 부모가 기쁘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그렇다고 한들. 그 나이에 왕국으로 가기에는 좀 그렇지 않느냐?”

“배움에는 나이를 벽이라 생각해선 안 된다고 생각됩니다. 그 배움을 배우는데 있어 나이가 있다고 망설이게 되면 미래의 저는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심하게도 망설였던 미래 저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겠죠.”

어느새 혀가 미꾸라지 같아졌다.

옆에서 그림자가 “기사 말고 미꾸라지로 전업해” 시비 걸었지만, 무시로 일관.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는 하나.......

그렇지만 꺼려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리 하는 건 어떠한가요? 두 달 뒤 한명의 기사와 결투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그 기사를 이긴다면 기사가 되는 것을 허락해주세요.”

공작과 부인 눈이 커다래졌다.

“기사라니. 기사훈련생이 아니고 말이냐?”

“예.”

단호하고 자신 있게 말하는 모습에 공작과 부인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이긴다 해도 어엿한 기사를 이겼으니 왕국으로 가도록 전폭 지지할 수가 있으며, 진다고해도 왕국으로 가지 않을 테니 그건 그거대로 좋았다.

하지만 허락을 했다고 해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크게 다치면 어쩌나. 자존심에 금이 가면 어쩌나.

공작으로썬 비밀로 할 것이기에 만약 에티븐이 지게 된다면 기사의 입을 막아 소문을 막을 수는 있겠지만,

그 본인에 자존심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식사가 끝나고 각자 방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카야산은 자신의 방으로 가지 않고 마타리 방으로 올라갔다.

똑똑 노크를 하자,

방안에서 듣기 좋은 미성이 들려왔다.

문을 열어 소파에 앉아있는 마타리를 바라봤다.

마타리는 카야산이 방에 찾아오자 의문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앉으세요. 그나저나 웬일이신지?”

“묻고 싶은 말이 있어 찾아왔다.”

마타리가 차를 꺼내어 카야산 잔에 따랐다.

차를 우리고 차를 따르는 몸동작이 마치 흘러가는 강물 같았다.

쪼르르 흘러내려가는 물줄기를 잠시 바라보다가 입이 열렸다.

“왜 나를 도운 게냐?”

“오라버니 눈이 평소와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내 눈이?”

의아해 고개를 갸웃거리자 마타리 입가에 호선이 그어졌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정직하고도 무언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눈입니다.”

“잘 모르겠군. 나는 너를 때렸다. 그거 가지고 설명이 되지 않아.”

입가에 찻잔을 갖다 되던 마타리 손이 멈칫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오라버니가 분명할 터인데 왠지 오라버니가 오라버니 같지가 않고, 오라버니 곁에 앉아 있는데도 그 때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저도 커다란 의문입니다.”

마타리 눈을 바라보고 있던 카야산은 저절로 소름이 다 끼쳤다.

투명한 유리처럼 반짝이는 눈.

저 눈은 어째서 저리도 진실을 파악하는 것인가?

“.......그렇군. 잘은 모르겠지만 도와줘서 고맙다.”

“별말씀을.”

희미하게 짓는 미소에 눈을 돌렸다.

마타리의 친 모친......... 분명 천사가 아닐까?

그런 뜬금없는 생각을 하며 방을 나왔다.

“우와 저 계집애 진짜 싫어! 우웩!”

그런데 옆에서 그림자가 몸서리 쳤다.

얘는 왜 이런담.

카야산은 그림자를 무심히 바라봤다.

디릭스 영지와 저택 안이 바빠졌다.

곧 있음 올 디릭스 장남의 생일 때문이었다.

그 중 바쁜 쪽에 속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 디릭스가의 장남 ‘에티븐 디릭스’가 지친 표정으로 양팔을 벌리고 있었다.

그 나름대로 이 몸을 살펴본 결과, 쇄골에 있는 키스마크 며칠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팔목밴드와, 발목밴드를 벗길 생각은 안하고 있다.

“에티븐 도련님의 윤기 있는 잿빛 머리에 맞춰 블루블랙색인 재킷을 맞추어 보았어요. 어떤가요?”

“너무 어두운 계통은 칙칙해 보이지 않을까요? 오히려, 도련님의 머리색과 비슷한 흰색 재킷은 어떤가요?”

“셔츠는 붉은 계통도 오히려 좋을 거 같아요. 넥타이는 검은색으로 하고요. 재킷도 붉은색 어떤가요?”

“에티븐 도련님은 평소에 프릴을 좋아하셨으니 프릴도 다는 게 어떤가요?”

그놈의 ‘어떤가요?’를 계속 듣고 있자니 속이 메스꺼워진다.

드디어 가지 않던 시간이 흘러 복장 선택을 다하고 나서야 춤 연습을 하러 가야했다.

2시간동안의 지루한 춤 연습을 하고 나면 훈련.

그리고 밤이 되면 영주민들을 몰래 이동시키는 일 또한 해야 했다.


남모르게 바쁜 것 또한 있었던 카야산 시간은 정말 빠르게도 흘러갔다.

그리고 현재 생일 당일.

디릭스 영지엔 마차들이 한 줄로 서있었다.

방안에서 카야산 치장을 돕고 있던 시녀들이 어머. 하며 볼을 붉혔다.

말라서 뼈 밖에 없을 줄 알았던 몸이 아니라 적당히 붙은 근육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겉옷을 벗어있던 상태에서 붉은 셔츠를 입히고 블루블랙 재킷에 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검은 넥타이로 의상을 마친 후 긴 머리카락은 한줄 위로 묶어두었다.

마지막으로 액세서리와 함께 치장이 끝났다.

어느덧 파티가 시작되고 눈부신 샹들리에가 달려있는 연회장 안에 귀족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허나 무표정을 없애기 위해, 억지로 입 고리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전에도 느끼는 거지만 카야산에게 있어서 파티는 무척이나 무료했다.

“제1공주 크리스탈 류안 브리지아님 드십니다!!”

그런데 그때 카야산 귀를 자극할 만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천천히 옮긴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사야와 닮은 푸른 머리 소녀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사람들 수군거림이 강해졌다.

어떤 귀족 영애도 아닌 제1공주가,

디릭스 영식 생일파티에 온데다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이 공주와 디릭스 영식과 이어주려는 심산이 아니냐는 추측이 일어났다.

“제1공주 크리스탈 류안 브리지아님을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카야산이 크리스탈 공주에게 먼저 예법으로 인사를 했다.

공주는 살포시 웃으며 드레스자락을 잡아 무릎을 살짝 굽혔다.

“저도 만나 뵈어 영광이에요. 에티븐 디릭스 영식.”

눈부시게 된 사야 아이는 어느새 많이 컸는지 숙녀가 되어 카야산 앞에 서있었다.

쓴 미소와 함께 손을 건넸다.

“제게 또 한 번의 영광을. 에스코트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디릭스 영식.”

손을 수줍게 잡은 크리스탈 공주의 손등에 가벼운 입맞춤을 한 뒤 귀족들 사이로 걸어 나갔다.

“잠시만. 디릭스 영식.”

귀족들과의 담소를 위해 걸어가려던 카야산은 크리스탈 공주 발걸음이 멈추자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아직, 사람과 얘기를 하기에는 제가 낯을 많이 가려요. 조금 이 분위기 익숙해지고 난 후 영식들과 영애들과 얘기를 하고 싶은데 괜찮을 까요?”

제1공주다. 많은 사교를 나누었을 테니 낯을 가릴 리가 없다.

게다가 카야산이 알던 크리스탈은 밝고 명량하고 낯을 가리지 않았다.

이 뜻은 남들이 몰래 할 말이 있단 뜻이겠지

친절한 미소를 지어내며 ‘물론이지요.’라며 그녀를 테라스로 데려왔다.

공기가 확 트이는 테라스는 인기척으로 뜨거워진 안과는 달리 무척이나 시원했다.

그녀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내자 카야산 또한 미소를 지어냈다.

크리스탈 공주가 테라스 난관에 손을 얹었다.

그때 시원한 바람이 스쳐 그녀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바람과 섞인 비누향이 카야산 코를 스쳤다.

“디릭스 영식. 제가 보낸 선물은 보셨나요?”

카야산이 ‘아.’ 하며 탄식을 내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요즘 바빠서 아직 보지는 못 했습니다. 혹 무슨 선물이었는지?”

크리스탈 공주가 희미하게 웃었다.

“선물을 미리 말해주면 재미없지요. 하지만 무척이나 신기한 선물이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기대가 되는군요.”

공주가 ‘후후’ 웃음소리를 내며 밤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커다랗게 떠있는 보름달을 가만히 바라보던 공주가 입을 땠다.

“놀랐어요.”

“무엇이 말입니까?”

카야산 물음에 하늘로 향해있던 고개가 카야산에게 향했다.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바라보는 것이 사야를 떠올리게 했다.

“제가 아는 분과 닮았어요. 용모가 아닌 뭐라 말할 수 없는 분위기가 닮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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