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회장에서 사람들이 점차 모여졌다.
그런 시끄러운 분위기속에 카야산은 동화되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공주가 카야산에게 다가가 미소를 지었다.
“선물은 마음에 드셨는지요?”
이종족을 선물이라며 주는 거.
기분이 무척이나 더럽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아냈다.
이 나라에선 노예가 사고파는 게 합법이다.
인간을 납치해서 파는 것만 안 될 뿐.
이종족을 납치해서 파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 않았다.
아주 인간의 이기적이고 모순적인 역겨운 형상이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 이종족은 우리 인간들을 납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입니다.”
거짓 미소를 지어냈다.
능숙하게 숨겨낸 그 미소를 눈치 채진 못한 크리스탈 공주가 ‘다행이네요.’라며 같이 웃었다.
“아! 디릭스영식.”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인파를 헤치며 자신을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은발을 쓸어 넘긴 남성이 ‘휴‘하고 숨을 내뱉으며 땀을 닦았다.
“에티븐! 이렇게 인파에 숨어있으니 찾기가 힘들잖아? 오늘따라 답지 않게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거 정말 좋아하는군.”
정보에 의하면 이 자는 ‘아이한 사후’ 공작가의 영식이다.
에티븐과는 친분이 있다.
“아이한.”
이름을 중얼거리며 불렀다. 그러자 아이한이 어깨를 두드렸다.
“미안하네. 어제는 일이 있어 오지를 못했어.”
미안한 얼굴로 잠시 그를 바라보던 시선이 서둘러 공주에게 갔다.
아이한이 공주에게 물 흐르듯이 궁중 예법을 올렸다.
크리스탈 공주가 드레스자락을 잡아 무릎을 살짝 굽혔다.
“공주님. 이 친구를 잠시 빌려도 되겠습니까? 아주 중요한 말이 있어서 말입니다.”
“괜찮습니다.”
“배려 감사합니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카야산 팔목을 잡았다.
얼떨결 인파를 뚫고 끌려가다가 테라스 커튼이 쳐있는 것을 보고
아이한이 발을 멈칫하자 카야산은 입을 땠다.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할 얘기가 있다면 내 방에서 얘기하도록 하지.”
아이한은 할 수 없이 카야산을 연회장 밖으로 끌고 왔다,
혼자 걸을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상당히 성질이 급한 게 분명했다.
“이거 좀 놓고 가면 안 되나?”
“음. 미안.”
아이한이 손을 놓자 손목을 주물렀다,
꽤나 꽉 잡아서 욱신거렸다.
“뭔 일이기에 이러는가?”
“젠장. 야. 너 왜 이렇게 태연해?”
“천천히 말하도록.”
아이한이 화가 난다는 얼굴로 어깨를 잡았다.
“이건 또 뭔 말투래? 아무튼, 너 로테리 할로얀. 그 자식이 온다는 소리 못 들었냐?”
‘로테리 할로얀’ 마찬가지로 공작가문.
병력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다고 우연히 부가 설명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게 왜? 고걀 갸웃거리자,
아이한이 속 터진다며 가슴을 두드린다.
“너희 아버지와 어머니가 무슨 생각으로 그 자식을 초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잠깐, 그 반응 설마 네가 초대한 거냐.......? 대체 무슨 꿍꿍인데!?”
“내가 초대하지는 않았다만.”
“그럼 네 부모님이시겠군. 네들 부모님은 왜 이렇게 눈치가 없으신 거냐? 걔를 대체 왜 초대한 거야!?”
“버릇이 없군. 내 부모님에게 무슨 말버릇이지?”
아이한이 ‘허!’ 기가 차하며 어깨를 꽉 쥐었다.
“왜! 사실이잖아! 그 자식이 네게 어떤 짓을 해왔는데!!! 그런데 네 부모는 끝까지 눈치도 못 채고! 아니! 눈치 챈 것일 수도! 그런데 그 할로얀 가문이 두려워서 가만히 놔두는 것일 수도 있지!”
무슨 일이 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이 이렇게 화를 내주니,
좋은 친구를 둔 것일 수도 있다.
“작게 말해. 아직 복도야.”
아이한이 다행히도 씩씩거림을 낮게 뱉어냈다.
“아씨. 너 오늘 따라 왜이래?”
카야산은 그저 한숨을 내쉬며 자신 방으로 걸어갔다.
정보가 없으니, 나도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
“엘프?”
아이한이 놀란 듯 입을 헤 벌렸다.
그런 아이한 등을 툭 쳐 소파에 앉았다.
마찬가지로 아이한이 맞은편에 앉자 입을 열었다.
“아까 얘기마저 하지.”
“아아. 그래.”
입을 벙긋벙긋하다 본론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공작과 공작부인이 만약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바보인 게 틀림없어. 이럴수록 만만히 본다는 것을 왜 아직도 모르셔!?”
[수수께끼투성이] 라는 단어가,
얼마나 머릴 아프게 하는지 깨달았다.
한숨을 내뱉으며 그림자에게 시선을 두자 꾹 입을 다물고 있던 그림자가 입을 땠다.
“에티븐은 고문을 당한 적이 있어.”
“.......”
놀라웠다. 고문이라니?
그것도 곱게 자란 공작 영식이 고문이라니?
-
오랜만에 오는 디릭스 영지 땅은 풍요로웠다.
크게 자란 벼와 건강한 가축들이 그 예였다.
‘로테리 할로얀’은 비릿한 입매를 지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이 좋은 땅을 그 덜떨어진 녀석의 손으로 가게 된다니 참으로도 미래가 안타깝다.
로테리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훑었다.
왜 생일파티 주인공이 안 보이는 거지?
원래라면, 사람들 품에 숨어 이쪽의 눈치를 보고 있어야 할 것이었다.
생일파티이다.
주인공 본인을 축하하는 자리에 그가 없다니?
‘도망?’
로테리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주제에 자존심만은 드높은 그 자식이 그럴 리는 없다.
그때도 그랬다.
그는 두려워하는 주제에 울지는 않았다.
“로테리.”
그때 자신을 부르는 미성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금발의 영식 ‘흐린 투트른’이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흐린. 오랜만이야.”
“여전히 재수 없는 면상이군. 음식 잘 먹고 잘 싸고 잘 뻗고 자나보지?”
“친구에게 재수 없다니. 그 불량스러운 말투는 영웅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거 같은데?”
“흥. 그나저나 네가 여기에 오다니.”
로테리는 자신의 진홍색 머리를 쓸어 올렸다.
“심심하니 찾아왔지.”
“심심? 나 참. 어이가 가출이군. 초대는 잘 받고 오신 건가?”
“당연하지. 내게 약점이 잡힌 공작은 내 말을 따를 수밖에 없어.”
“악질 같으니라고. 누가 보면 우리 쪽이 악역이라 생각하겠군.”
로테리가 ‘뭐. 어때.’라며 어깨를 으쓱이다 입을 다시 땠다.
“그나저나, 우리의 악당은 어디가신건지?”
“안타깝게도 혼자 속고 있는 ‘아이한 사후’가 네가 오고 있는 소식에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어.”
“어차피 임시방편인 것을. 그는 여전히 바보네?”
“그래서 기다릴 건가?”
로테리가 ‘당연히. 아니지.’라며 싱긋 웃었다.
흐린은 쯧. 혀 찼다.
왜 이렇게 저 자식은 떨떠름한 기분이 드는 건지.
‘에티븐 디릭스’보다 더했다.
“로테리!!!!”
그런데 그때 우렁찬 목소리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흐린과 로테리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곰같이 생긴 공작의 영식.
‘스딩 셀렌비’가 쿵쿵대는 걸음으로 다가 오고 있었다.
흐린은 그 모양새에 눈살을 찌푸렸다.
교양 없는 놈.
“오! 나보다 더 의외군 스딩! 네가 에티븐 디릭스 파티에 오다니!”
“가고 싶지는 않았는데 같은 공작끼리는 꼭 가야한다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욕이란 욕은 다 먹었거든! 하하! 그래서 난 아마 오래 살지 않을까 싶은데. 넌 왜 온 거야?”
“당연히!”
“당연히?”
“심심해서지!”
“뭐? 우하하하하! 여전히 재밌는 녀석이야 넌!”
스딩이 팔을 크게 휘둘러 로테리의 등을 호탕하게도 쳤다.
그 억센 손아귀에 로테리가 주먹을 쥐어 스딩의 등을 여러 번 쳤다.
“하하하! 너도.”
퍽! 퍽! 퍽!
그 귀족스럽지 않는 자태에 흐린이 미간을 와락 찌푸리며 한발자국 뒷걸음쳤다.
강하고 믿음직한 친구들이지만 품위가 없다.
“후후.”
뒤에서 들리는 꺼림칙한 웃음소리.
이 웃음소리는 설마?
흐린은 어깨에 긴장을 주며 뒤를 돌아봤다.
나른하게 팔짱을 끼며 웃고 있는 공작의 영식.
‘데오드 마일드’였다.
“......데오드.”
흐린은 팔에 소름이 나는 것을 느꼈다.
저 자식 대체 언제 온 거지?
경직되어있는 흐린을 뱀 같은 눈으로 위아래 훑은 데오드가 흐린 어깨에 손을 얹었다.
“뭘. 경계하고 그래? 섭섭하게~. 긴장 풀어. 흐린은, 내 타입 아니니까.”
불쾌하게 찌푸린 얼굴로 데오드의 팔을 쳤다.
데오드는 그저 웃으며 서로 장난을 치고 있는 그 두 명에게 다가갔다.
“안녕. 로테리. 스딩.”
“안녕하지 못하겠는데 데오드. 안보여서 오늘은 안 왔나 싶었는데 역시나 왔구나?”
로테리는 싱긋 웃는 표정을 지어내고 있으면서도 말투는 가시를 뱉어냈다.
데오드가 섭섭하다는 듯 ‘왜 자꾸 경계해.’라며 중얼거렸지만 로테리는 ‘몰라서 물어?’라며 되물었다.
옆에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상태였던 스딩이 반갑다는 듯이 데오드 어깨를 둘렀다.
그 모습을 보며 둘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너도 왔네! 데오드!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목소리 높이가 상당히 높아서 들떠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데오드는 그런 스딩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다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은근한 손놀림에 왜 그런지 모르겠다며 눈을 깜빡이자,
데오드는 손을 땠다.
곰 같아서 재미없어라.
“나의 사랑을 보기 위한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응? 네가 좋아하는 영애가 이 파티에 있다는 거야?”
순진무구하게 스딩이 고개 갸웃거렸지만,
데오드는 싱긋 웃는 얼굴 유지하며 입 때지 않았다.
로테리와 흐린은 저 바보가 참으로도 걱정되었다.
우리 셋의 몸을 보고 발기한 저 녀석의 것을 보면 모르는가!?
왜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인지!?!?
로테리와 흐린이 데오드를 처음부터 어려워하지는 않았다.
자신들에게 ‘그 자식’을 좋아하는 남색가라고 밝혔을 때도 친구니까 애써 이해하려 했다.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만이 아닌 외간 남자의 몸을 보고 흥분하는 모습을 본 뒤 아주 껄끄러워졌다.
남색을 밝히는 귀족이 있다는 풍문은 들어봤지만 설마 주위 사람이었다니.
이것이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안 격어 본 사람은 모른다.
게다가 데오드는 플러스 작용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변태였다.
우리가 에티븐에게 한 짓을 보고 왜 가만히 있었냐고 물으니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흔하지 않고 오히려 흥분되었으니 가만히 놔뒀다는 정신 꺾어진 소리를 내뱉는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제일 많이 괴롭힌 쪽은 데오드였다.
그 후로부터 데오드의 곁에는,
정말 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나저나 나의 그가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지? 나도 갈래.”
‘나의 그?’
스딩이 뭔 소리냐는 듯 되물었지만 데오드는 답해주지 않았다.
로테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저 환하게 웃을 뿐이었다.
분명. 원래부터 같이 갈 심산이겠지.
뭐, 상관없지만.
여러 개의 멋진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 복도를 4명의 공작 영식들은 걷고 있었다.
지나가던 다른 영식, 영애가 움찔했다.
그럴만했다.
뭐니 해도 그 공작가문인데다가,
그 4명은 각 분야로 소문난 천재였다.
유난히 커다란 방문 앞에 선,
로테리는 입가를 씨익 올리며 문을 두드렸다.
똑똑, 이라는 박자가 울리고 몇 초 침묵이 이어지며 방문이 열렸다.
턱을 위로 향하자 잿빛 머리가 어깨까지 흘러내려 움직였다.
무표정하게 그들을 훑었다.
그런 그의 표정에 못 참겠다는 듯 부르르 떨던 데오드가 에티븐을 껴안았다.
움찔한 에티븐이 이건 뭐냐며 데오드를 바라봤지만 데오드는 코를 벌렁거리며 에티븐의 머리에 코를 박았다.
“아아. 이 향기~. 좋아! 좋아!”
데오드가 흥분한 목소리로 에티븐 머리채를 강하게 쥐었다.
굳센 손아귀에 눈썹이 꿈틀거렸다.
에티븐은 자신의 소매에 있는 나이프 고리를 손으로 휘릭 돌려 그 머리카락을 아무런 미련 없이 잘랐다.
잿빛의 머리카락과 핏방울이 공기와 함께 휘날렸다.
순간 팔을 베인 데오드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으아아악!!”
“개자식!!!”
스딩이 뛰쳐나가 에티븐을 덮치려하자 로테리와 흐린이 막았다.
로테리는 차분한 눈으로 에티븐을 훑었다.
무표정한 얼굴.
반은 단발이 된 머리카락.
그 긴 머리마저 반으로 귀찮은 태도로 자르고 있었다.
예전에 보이지 않았던 태연한 모습이다.
로테리는 미간을 구겼다.
무엇이 바뀌었지? 평소 모습이 아니다.
“남색가인가? 처음 보는군. 그렇다면 같은 남자끼리 하여도 성추행이야.”
에티븐이 덤덤한 어조로 고통에 찌푸려져 있는 데오드를 바라봤다.
데오드가 신음을 흘리다가 ‘으아아악!’하고 소리쳤다.
많이 아픈가 싶었지만, 그 다음 뱉어낸 말은 상상을 초월했다.
“나의! 나의! 머리카락이! 나의 에티븐! 대체 왜!”
“옳은 표현은 아니군. 너의 머리카락이 아니다만? 그리고 너의 에티븐도 아니지.”
“에티븐! 에티븐! 나의 에티븐! 날 위해 머리를 길렀잖아! 에티븐 왜 자른 거야!”
“당연한 걸 묻는군. 벌레가 기어들어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카야산은, 에티븐이 왜 머리를 길렀는지 대충 눈치가 갔다.
아마 저 변태가 협박을 했겠지.
데오드가 흑흑 울며 무릎을 꿇었다.
좌절의 표본을 보여주는 그 모습에 귀찮은 얼굴로 고개 들었다.
하나같이 굳은 세 명의 얼빠진 표정이 보였다.
“볼 일을 말하도록.”
로테리는 손아귀에 빛을 뿜으며 데오드의 팔을 치료해나갔다.
그 성스러운 힘에 카야산의 눈동자에 흥미가 스쳐지나갔다.
“이런 짓을 하다니. 어떻게 되고 싶은가 에티븐?”
로테리의 차가운 목소리에 입가를 비틀었다.
“고문한 네가 할 말은 아니지.”
“내말은 공작가의 싸움이 아닌. 내 손아귀에서 어떻게 되고 싶냐고 묻는 거다.”
한쪽 무릎을 꿇어 데오드를 치료하던 로테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티븐도 사납게 생겼지만 로테리도 만만치가 않았다.
에티븐이 차갑게 사나웠다면 로테리는 타오르게 사나웠다.
“이번엔 어떤 고문을 할 심산이지? 마음껏 하시던지. 그런데 몸에 남아 있는 이 흉터들은 국왕에게 갖다 바치면 넌 어떻게 되는 거지? 아아. 우리 부모님에게 협박을 하고 있는 중이니 그러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나?”
에티븐의 부모님은 아마 자세한 내용은 모를 것이다.
단지 무슨 짓을 당했다는 사실만 알 뿐.
그렇지 않는다면 그렇게 태연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쥐의 자식이라는 거 알고 있는 사실이야.”
카야산은 까슬까슬한 입술을 매만지면 입꼬리를 올렸다.
서식지가 불분명한 쥐 이종족 ‘그라이’
이 가문이 인간도 아닌, ‘그라이족’이라니 뭐 이런 독특한 일이 있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