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비가 내렸다. 일찍 잠들었음에도 자정 무렵 갑자기 눈이 떠지더니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비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거세지고 새벽의 고요는 사라졌다. 숙소 주변 가게들의 불빛 아파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자동차에서 쏘아대는 불빛 그리고 늦은 시간아니 이른 시간까지 삶의 굴곡을 등에 업은 듯 들려오는 취기 가득한 고함소리 등 비를 타고 들려오는 새벽의 빛과 소리는 순순히 잠들 수 없게 만들었다.
잠들지 못하는 괴로움보다 잠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오롯이 스며들어 마음을 어지럽혔다.
단순하게 단순하게 또 단순하게 살아가자.
전날 발끝으로 전해지는 행복에 온 세상을 안겨주었던 표선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밤새 내린 비와 수평선 너머에서 밀려 들어온 바닷물에 전날의 흔적은 잠겨버렸다.
이번 코스(4코스)도 거리가 만만치 않았다. 물집이 잡혔던 첫날 코스(18코스)와 거의 비슷했다. 중간스탬프가 있는 알토산 고팡까지의 길은 지루했다. 새벽까지 내리던 장대비의 끝자락인 듯 안개비가 오락가락했다. 그때마다 겉에 입고 있던 점퍼도 입었다 벗었다 해야 했다.
제주에는 육지에서 보지 못한 식물이 많았다. 특히 걸으면서 의견이 분분했던 '갯강활'도 그중 하나였다. 속도를 같이하며 걸었던 J에게 누군가가 물었다. 바닷가에서 무리를 지어 튼튼하게 (나무라고불러도 좋을 만큼 기둥이 굵고 단단해 보였다) 자라고 있는 게 무엇이냐고, 검색의 여왕인듯한 J는 '천궁'이라 알려주었고, 지인이 농사지은 천궁으로 무침과 장아찌를 만들어 본 나는 맞는 것 같다고 맞장구를 쳤다. 심지어 단단한 줄기를 자르다가 손목이 나갈 뻔했다는 무용담까지 얘기하며 듣는 이들에게 '천궁'이 확실하다는 신뢰를 얻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의아했다. 천궁이라면 채취해서 판매하기도 바쁠 텐데 제주도 사람들은 천궁에 대해 모르는 걸까? 요즘 같은 세상에 모르고 있다는 게 가능한 것일까?
갸우뚱 거리며 걸어가는 동안 비는 그치고 조금씩 지치고 피곤이 느껴질 즈음 J가 커피 맛집을 찾았다며 일행을 이끌었다. 바다전망이 좋은 ○○연수원 바베큐장에서 허락도 받지 않고 행동식을 먹은 우리는 희망이 보이는 숲길을 걸어 M다방을 찾았다.
바닷가 도로변에 노랗게 자리 잡은 M다방은 커피광고의 촬영지라고도 했다.
맛있는 커피와 '처방약'으로 제공된 초콜릿은 피곤을 잊기에 충분했고 우리는 바다로 향하는 창가 자리에 앉아 서로를 카메라에 담아주느라 분주했다.
잠깐 동안의 행복을 누리고 나온 우리 앞에는
안개를 밀쳐내고 제대로 옷을 차려입은 하늘과 바다가,
수평선을 사이에 두고 자리다툼을 하고 있었다.
궁금한 걸 참지 못한다. 겉으로는 태연한데 속으로는 궁금한 게 해결될 때까지 머리에 담고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