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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파니 May 29. 2023

나의 첫사랑 소환귀 (6)

6화. 피칠갑 그녀





        

자정이 다 된 시각, 금식은 다이얼 자물쇠의 번호를 맞춰 고리를 푼 후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곤 현관문 안쪽 걸고리에 다이얼 자물쇠를 다시 걸어 잠갔다. 거실 불을 켜고 주방으로 직행한 그는 손에 든 검은색 비닐봉지와 어깨에 맨 회색 백팩을 식탁 위에 던져 놓고 옷방으로 향했다.

금식은 삼단 서랍장 세 번 칸에서 비닐로 네모 반듯하게 포장된 옷을 꺼내 들었다. 포장 비닐을 과격하게 뜯고 옷을 탈탈 털어 펼치니 상, 하의 검은색 깔맞춤 런닝복이 형태를 갖췄다. 상의 등 판에는 흰색 나이X 로고가, 왼쪽 가슴팍에는 농구공을 치켜들고 점프를 하는 사람 실루엣이 작게 새겨져 있었다. 바지 허리춤엔 농구 선수 이름이 간결하게 인쇄 돼 있었다. 금식은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런닝복으로 환복 했다.       


“오~! 수봉이 이 자식, 돈 좀 썼는데. 역시, 메이커라 원단이 다르구만!”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매만지던 금식은 매우 흡족해하며 다시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아~ 라면을 끓여 볼까요~”     


싱크대 하부장에서 냄비를 꺼내 흥겹게 물을 받던 그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냄비를 싱크대에 차분히 올려놓고 중얼거렸다.  


“아…. 가스레인지 없지.”     


미간을 잔뜩 구긴 금식은 정신 차리라는 듯 자신의 뒤통수를 조금 세게 툭! 툭! 쳤다. 이에 반항하듯 ‘꾸룩... 꾸르륵!’ 배에서 아우성이 들렸다. 금식은 식탁의자에 털썩, 주저앉고는 검은 봉지에서 라면을 꺼내 ‘퍽!’ 주먹으로 가격해 부셨다. 생라면을 와그작! 마뜩잖게 씹어대며 백팩에서 두툼한 노트를 꺼냈다. 노트를 가르니 볼펜으로 갈피를 해놓은 페이지가 단박에 펼쳐졌다. 2009년 9월, 10월. 지난달과 이번달 작업 일정이 쉬는 날 없이 빼곡했다. 일에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일정을 잠시 훑던 금식은 페이지 여러 장을 한 번에 뒤로 넘겼다. 1월이 펼쳐졌고 2, 3월로 넘겨지는 페이지의 작업 내역이 9,10월에 비해 확연히 단출했다. 4월에 이르러 페이지가 멈췄다. 거기엔 이사 날짜와 어머니 퇴원 날짜 그리고 이사 시 구입해야 될 물품 목록이 두 페이지에 걸쳐 가득 채워져 있었다.     

금식은 이미 적혀 있는 구입 목록에서 현재 필요한 물품을 찾아 볼펜으로 밑줄을 그어 댔다. 세탁기,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 세제, 비누, 슬리퍼.... 또다시 미간이 구겨졌다.     


“아오! 다 사야 되네.”     


다음 장에도 적어 놓은 물품 있나 싶어 페이지를 넘겨보니 5월이라고 적힌 페이지는 백지였다. 5월이란 글자를 물끄러미 보던 금식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흘렀다. 곧이어 회한이 서린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그는 백지뿐인 페이지에 넋을 빼앗긴 듯 눈을 떼지 못했다.  


'투둥! 쿠궁!' 진동과 함께 둔탁한 충격음이 금식의 정신을 번뜩 깨웠다. 2층에서 들린 소리였다.      


“뭐지?”     


금식의 신경이 곤두섰다. 노트를 덮고 2층 계단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동태를 살폈다.     


“으....”     


낮게 깔린 신음이 계단을 타고 흘렀다. 그 소리에 금식의 심장이 방망이 질로 반응했다.      


“도... 도둑?!”     


발레리노처럼 발끝을 세운 금식은 살금살금 뒷걸음치며 다용도실로 잽싸게 이동했다. 그곳엔 선반장을 만들기 위해 갖다 둔 다양한 굵기의 각목이 정갈하게 세워져 있었다.     


“하여간~! 저런 놈은 지 조상이 보일 때까지 처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그는 꿍얼대며 야구 망방이 정도의 길이의 각목을 골라잡고 종전과 같은 발레리노 스텝으로 2층 앞에 당도했다. 금식은 한 걸음씩 계단에 발을 디디며 조심스럽게 올랐다.  

‘ㄱ’ 자 형태의 계단 층계참에서 심호흡과 함께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그는 다시 발을 떼어 오르기 시작했다.

끝까지 오르지 않은 채 계단 손잡이와 연결된 2층 난간대를 사이에 두고 머리만 빼꼼히 올려 거실을 훑었다. 베란다 창가와 창문으로 스며든 달빛에 어렴풋하지만 형태는 살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떠한 움직임도 인기척도 없었다. 금식은 각목을 단단히 거머쥐고 계단을 마저 올라 거실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어쩐 일인지 전등이 안 켜졌다. 다시 계단 난간대 뒤로 금식은 몸을 숨겼다. 이제 도둑이 있을 만한 곳은 난간대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방뿐이다.

금식은 활짝 열린 방문 안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달빛이 닿지 않아 어둑한 방안엔 다양한 크기의 박스들이 들쑥 날쑥한 실루엣을 드리울 뿐, 역시나 어떠한 움직임도 인기척도 없었다.

각목을 가지러 간 사이에 도망친 건가? 금식은 혼란스러웠다. 직접 방안을 살피는 것이 가장 확실하지만 불도 안 켜지는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에잇, 그냥 신고하자.’ 마음을 굳힌 금식이 계단 아래로 몸을 움직이려는데      


“으......”     


또다시 신음이 들렸다. 동시에 어떤 형체 하나가 박스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공포가 금식을 덮쳤다. 일순, 전신이 마비된 그는 손가락 하나 꼼짝 할 수 없었다. ‘으... 으...’ 신음을 멈추지 않으며 서서히 일어선 형체는 몸을 가눌 수 없는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댔다. 길게 늘어 뜨린 팔도 흔들리는 몸에 맞춰 찰랑 거렸다. 기괴한 동작에 공포가 극대화된 금식은 정신줄을 놓기 일보 직전이었다. 비틀비틀, 찰랑찰랑, 그렇게 거실 중앙까지 걸어 나온 형체는 달빛에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긴 생머리에 분홍색 카디건, 흰 원피스를 입은 여자였다. 풀어헤친 긴 생머리 사이로 왼쪽만 드러난 피칠갑된 얼굴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끔찍했다. 금식의 존재를 알아 채지 못 한 여자는 멈춰 서서 비틀대며 팔을 찰랑이는 행동을 이어갔다. 극강의 공포 앞에 손아귀에 힘이 풀린 금식은 그만, 

'우당탕! 퉁! 퉁! 타당! 또르르르르....' 들고 있던 각목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각목은 1층 거실까지 튕기고 구르며 요란을 떨었다.

여자는 즉각 반응해 난간대로 시선을 꽂았다. 목만 빼꼼히 내놓고 있던 금식을 그제야 알아챈 그녀는 눈을 부라리며 섬뜩하게 노려봤다. 그녀와 시선을 교환한 금식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제는 죽는 일만 남았구나, 마음의 준비를 하며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그녀가 낯익게 느껴졌다.

맞다! 새벽에 봤던 그 흉측한 얼굴, 그리고 꿈속 소라의 옷차림,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저 여자가 소라?! 도대체 내가 뭘 불러 낸 거지? 금식은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후회에 망연자실했다. 대치하듯 노려만 보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다다닥!!’ 금식을 향해 달려들었다.     


“으헉!!”     


기겁한 금식은 반사적으로 몸을 젖히다 발을 헛디디고 휘청였다. 우당탕! 이리 쿵! 저리 쿵! 떼구루루... 각목처럼 요란하게 계단을 굴러 1층 거실까지 나동그라졌다.     


“아아!... 아....”     


말도 못 하게 아픈 상황에도 계단을 돌아본 금식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소라가 뒤따라 내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금식은 온몸의 통증을 감내하며 현관문을 향해 네발로 뛰듯 기었다.         


“으아아아~~~”     


비명을 지르며 현관에 도착한 금식은 다이얼 자물쇠의 비번을 허둥지둥 맞추기 시작했다.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다이얼을 맞추려다 보니 더럽게 안 맞았다.     


“으아아아~~~”     


비명을 지르는 금식 뒤로 바짝 다가선 그녀가 그의 어깨를 움켜잡으려는 찰나, 마지막 번호가 맞춰지며 자물쇠가 풀렸다.     


“아아아악!!!”     


혼신을 다한 비명과 함께 현관문 밖으로 튕기듯 몸을 날린 금식은 마당에 대차게 나뒹굴었다. 통증이 온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다.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난 그는 맨발인 채로 대문을 향해 내 달렸다. 손을 뻗어 대문의 걸쇠를 잡으려는데 “악!” 왼발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발바닥을 보니 1cm 정도 되는 유리 조각이 박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아! 아아!”     


어서 빨리 유리조각을 뽑고 도망쳐야 하는데 엄두가 안 났다. 왼발을 붙들고 망설이고 있는 사이, '쾅!’ 그녀가 현관문을 부서져라 열어젖혔다. 질겁한 금식은 오른발을 디뎌 필사적으로 일어서려 했지만 균형을 못 잡고 쓰러졌다. 그런 금식을 싸늘히 바라보던 그녀는 천천히 현관 밖으로 몸을 뺐다. 그런데 그녀의 몸이 순간, 물결치듯 너울너울 일렁이며 투명하게 형체를 잃어갔다. 해괴망측한 그녀의 모습에 금식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란 그녀는 두려움이 역력한 기색으로 황급히 몸을 거뒀다.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의 몸이 서서히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됐다.      


“뭐... 뭐야?! 집 밖으론 못 나오는 건가...?!”     


현관 안에서 피칠갑 그녀가 금식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쏘아봤다. 그는 바닥으로 고개를 수그려 외면했다. 도어 클로져로 인해 현관문이 자동으로 닫히며 그녀의 모습은 문 뒤로 사라졌다. 그제야 금식은 고개를 들었다. 호흡을 깊게 들이마신 그는 단숨에 유리파편을 뽑으며 '윽!' 얕은 비명을 토했다. 찢긴 피부로 쓰리고 욱신대는 통증이 밀려 들었다. 곧이어 통증 보다 더한 걱정이 덮쳐왔다.      


“하아...노트랑 핸드폰... 어쩐다?”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하던 금식은 작금의 위기를 타파할 최후의 보루가 번뜩! 떠올랐다.     


“부적이 있었지!”     


해결책을 찾았다는 벅찬 기쁨에 희망차게 절뚝이며 공방으로 향했다.     



***     


밤길을 가르며 진땀 나게 공방 문 앞에 도착한 그는 밥 먹듯이 또 경직됐다.      


“아놔~ 열쇠도 두고 왔네...”      


하는 수 없이 건물 뒤편 기계실 환풍기를 뜯어내고 공방 안으로 들어선 금식은 분진을 알차게 뒤집어쓴 채 실내등을 켠 뒤 입구 쪽에 있는 쓰레기통을 뒤집어 바닥에 쏟았다. 쓰레기를 이리저리 휘저어 구겨진 부적을 찾아냈다.     


“됐어! 이것만 있음 소라를...”     


이 말끝에 금식은 달갑지 않은 죄책감이 밀려왔다. 소라를 불러낸 건 본인이었다. 그래 놓고는 퇴치하겠다고 부적을 찾는 꼴이라니...

거지 같은 행색으로 부적을 들고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공방 출입문 폴딩도어 창문에 비쳐 보이자 금식은 허탈했다. 만약, 끔찍한 몰골이 아닌 대학 시절 아름다운 모습의 소라였다면 이 지경이 돼서 도망쳤을까?

'후우~~' 깊은 한탄에 힘이 쭈욱 빠지려다, 이제와 이런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내가 죽게 생겼다,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어?” 폴딩도어 창문에 비친 런닝복 상의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 금식은 옷을 벗어 유심히 뜯어봤다.     


“잠깐만. 이거...”     


농구공을 들고 점프하는 사람 가랑이로 돼지 꼬리가 달려 있었고 하의에 새겨진 이름도 자세히 보니 ‘JORDON’ 조돈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자식이 그럼 그렇지.”     


수봉의 짓거리에 금식은 헛웃음 났다. 헛웃음도 웃음이라고 마음이 조금은 안정됐다. 작업대 옆 스툴에 앉아 맞은편 벽에 걸려있는 원형 시계를 바라보니 새벽 1시였다.     


“에휴... 낼 아침에 가지 뭐....”     


삽시간에 당한 일로 피로가 급격히 밀려왔다. 그녀를 상대할 기운이 일도 남아 있지 않았다. 2평 남짓한 사무실로 들어가 캐비닛에서 접이식 야전침대를 꺼내 펼쳤다. 그리고는 사무실 선반장에서 흰색 구급 약통을 꺼내 들고 침대에 걸터앉아 발바닥을 소독하고 붕대를 휘감았다.      


“첫 사랑하고 꽃 길 일 줄 알았는데... 젠장, 황천길이네.”     


그는 스스로를 자조하며 야전침대에 누웠다. 초가을 새벽은 은근 쌀쌀했다. 문득, 선반장에 구겨 넣은 오줌 지린 이불이 떠올랐다. 더러워도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에 선반장에서 이불을 꺼내 들고 침대로 돌아왔다.    


“아흐~! 구려~!”     


지린내가 괴롭지만 어쩌랴, 내 오줌인걸. 금식은 불안한 마음에 불을 켠 채 이불을 끌어안고 침대에 누웠다.       

***     

얼마나 지났을까?

금식은 얇은 깃털 여러 개로 얼굴을 간지럽히는 느낌에 비몽사몽 게슴츠레 눈을 떴다. 분명 불을 켜고 잤는데 사방이 캄캄했다. 그는 얼굴을 간지럽히는 것이 무엇인지 손을 뻗어 만져 본 순간! 실체를 깨닫고 숨이 멎는 듯했다. 금식에게 올라탄 피칠갑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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