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무더운 가을이었다.
신혼집을 알아본다고 여기저기 찾아보고
스트레스에 절여 사느라 이번 가을은
평소보다 더 무덥고 힘겹게 느껴졌다.
현실의 벽을 느끼며 고뇌하던 여느 날
우리에게 갑갑한 무더위를 씻겨 내려줄 단비 같은
소식이 찾아왔다. 정말 감사하게도 그분의 부모님,
그러니까 나의 예비 시부모님께서 집을
마련해 주신다는 소식이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사막을 헤매다 발견한 오아시스보다 더 반가운 이야기였다. 그분과 나의 암울했던 미래가 핑크빛 미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스트레스로 점철된 시간에서 드디어 해방되는구나...
그 소식을 듣자마자 안도감과 동시에 감사함과
죄송한 마음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예비 시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큰 마음을 덥석 받을 순 없었다.
정중하게 마음만 받겠다며 거절의 의사를 표했지만
너희들이 잘 살길 바라는 마음뿐이라는
예비 시부모님의 말씀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집을 받게 되었다.
부모님의 도움 없이 결혼하는 건 쉽지 않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내가 결혼을 준비해 보니
그 이야기가 더 실감 났다.
특히 집을 마련하는 건 정말 최고난도 미션이었다.
어렸을 땐 혼자서 열심히 돈 벌고 저축하면
결혼할 돈은 충분히 모을 줄 알았다.
그땐 몰랐던 거다.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어마어마한 세상의 위력을 알기엔 너무 작고 어렸다.
게다가 지금의 세상은 내가 알던 그때의 세상보다
더 레벨 업한 상태이다.
집값은 끝도 없이 오르고 있고
거기에 합세하여 물가도 신나게 오르고 있다.
생필품의 가격은 전혀 내려갈 기미 없고 오르막만
계속되고 있다. 이지경까지 되니 이 고물가 시대에
결혼을 해낸 모든 분들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이 모든 고난과 역경을 뚫은 분들이 아닌가.
집이 해결되자 골칫거리가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그 덕에 우리는 결혼 준비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길일을 잡는 거였다.
요즘은 원하는 결혼식장을 먼저 정하고 남는 날짜에 결혼을 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양가 부모님의 뜻을 따라 길일을 잡고 식장을 정하기로 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궁합을 보고 길일로 두 날을 받아왔다. 이전에는 아무 의미 없던
그 두 날이 갑자기 엄청나게 중요하고 소중한 날짜가 된 기분이었다.
결혼 날짜를 결혼식장의 일정에 맞춰 덜컥 결정하는 것보다 이런 과정을 거치니 더 의미가 있었다.
우리에게 특별한 날이라는 마음으로 바라보니
그 날짜들이 더 예뻐 보였다.
나에게 생일 말고도 또 다른 기념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나만의 기념일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하는
소중한 기념일이라서 더 좋았다.
우리의 소중한 결혼기념일이 될 길일을 받은
특별한 날, 늦은 저녁으로 따끈한 수육을 먹고
스티커 사진을 찍으며 우리끼리 신나게 자축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