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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이 이미 낙원이다.

여행, 그 합법적 도망에 대하

by 고요 Feb 07. 2025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다른 것들을 꿈꾸는 이들에게 가끔씩 들려오는 말이다. 

'괜히 다른 생각하지 말고 살아.' 

'다른 회사라고 뭐가 더 나은 줄 알아?'

'지금 여행을 가서 뭐하려고?'


작년 여름,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고 힘들었을 때 무작정 일본으로 가는 티켓을 끊었다. 

2주뒤 출국이었다. 가고 싶은 곳 몇군데만 찾고 다른 계획은 없었다. 숙소 예약도 늦어서 교통이 매우 안좋은 시골의 민박집을 예약했다. 



인적이 드문 새벽, 인천공항 라운지에 앉아있었다. 커다란 창 밖으론 비행을 마친 비행기 한대에서 승객들이 내리고 있었다. 여행을 끝내고 내리는 사람들, 여행이 시작된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표정만 봐도 누가 여행을 마쳤는지, 여행을 시작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여행이 끝난 사람들에게서는 아쉬움과 안도의 표정이, 시작된 사람들에게서는 설렘과 묘한 긴장이 보였다. 여행이 갓 시작된 나에게도 저런 표정이 보이겠지? 설렘과 긴장이 뒤섞인 채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문득 깨달았다. 

'도망친 곳에 낙원이 없어도 되겠다. 도망쳤다는 것이 이미 낙원이다.'



나는 낙원을 찾기 위해 도망치고 싶었던 게 아니다. 낙원이고 뭐고 일단 지금의 현실, 반복되는 행동, 늘상 만나는 사람, 같은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우선 벗어나는 것. 이미 뒤엉켜 한 몸이 되어버린 것들에서 벗어나 낯선 시선으로 내 삶을 보는 것이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도망은 나에게 이미 낙원이었다.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합법적인 도망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행이 이토록 즐거운 것이었구나. 언제나 설레는 것이었구나.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는 일본 드라마에서도 대학원까지 나온 주인공이 취업난을 겪게 되자 우연히 가사 대행 도우미를 하게되고, 여기서 자기의 적성을 발견한다. 그리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도망쳐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던 것들이다. 


인생을 자주 도망칠 순 없으니, 여행으로 합법적인 도망을 주기적으로 쳐 줘야할 것 같다. 다만,  시간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기타 다른 이유들로 여행을 떠나기가 쉽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아기를 키우고 있는 나 역시 여행은 생각도 못하고 있다. 


다음번 여행은 훗카이도를 가고 싶어서 야금 야금 엔화를 모으고는 있지만, 언제쯤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몇년 뒤가 될지도 모르는데, 그때까지 여행을 미뤄야할까? 


나에게 여행은 익숙한 것, 무의식이 되어버린 것들로부터 떨어지는 행위다. 익숙한 삶에 거리를 두는 것. 그래서 가끔은 가보지 않았던 길로 간다. 아기가 태어나고는 전혀 접점이 없던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있다. 그 자체가 나에겐 여행 같다. 나에게 여행의 기회를 자주 주어야겠다. 여행을 통해 나를 더 알고, 조금 더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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