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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 lin Jul 07. 2024

혼성 도미토리에서 어떻게 자란 말이야?

도미토리 탈출 대작전 1

지아의 무리는 전원 이탈리아 여자아이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사이에 유일한 한국인인 내가 어쭙잖게 끼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지아+1 인 셈. 이렇게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 모이면 자연스레 타 국적을 가진 사람은 입지가 좁아지기 마련이다. 그 주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언어장벽.


아무리 영어를 배우러 온 어학연수라 하더라도 굳이 자국민들끼리 있을 때까지 영어를 쓸 필요가 있을까? 그들의 대화 중 95%가 이탈리아였고 나머지 5%는 그나마 영어를 조금 구사할 줄 하는 지아와 멤버 중 리더역할을 하는 치키가 중간중간 영어로 통역을 해주었다. 그 통역의 범위도 마저도 목적지를 정하거나 계산을 할 때 등 꼭 영어가 필요한 상황에서만 구현하는 정도였다. 심지어 이탈리아어 억양이 가득 섞인 악센트로 영어를 말하니 나에겐 매 순간순간이 모의고사 듣기 시험을 치르는 기분이었다.


입학 일주일 후, 단체 채팅방에서 주말에 근교 LA로 여행을 가자는 의견이 나왔다. 어학원을 LA로 가지 못한 게 오랫동안 한으로 맺혀 있던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비록 소통이 걱정스럽긴 했지만 리더인 치키가 총대 메고 알아서 다 계획을 짜는 것을 보니 그저 난 숟가락 얹는 셈 치고 졸졸 따라다니면 되니까 그나마 부담은 어느 정도 덜 수 있었다.


여행 당일, 꼭두새벽부터 일어난 나와 지아는 고속버스를 타기 위해 일찍 숙소를 나섰다. UCSB 정류장에 도착하니 다른 일행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9시에 도착하기로 되어있는 버스는 30분이 지나도, 40분이 지나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외국의 교통 시스템은 잦은 지연과 캔슬로 악명이 높은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상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그렇게 버스는 한 시간 반이 넘어서야 도착했다.


Flix 버스는 미국, 유럽의 가장 보편적인 고속버스다. 한 가지 차별화된 점은 버스 내 화장실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우등버스에도 없는 화장실을 여기서 볼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어쩌면 가장 필수로 갖추어야 할 부분임에도 아직 국내에 도입되지 않은 사실이 안타까웠다.

출처: google

두 시간가량을 달려 도착한 로스앤젤레스. LA 필수 코스인 인 앤 아웃에서 간단히 점심을 때운 후 곧바로 우버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이른 아침부터 움직인 탓에 피로감이 슬슬 몰려와, 머릿속은 온통 포근한 호텔 침대에 몸을 내던지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행복한 상상도 잠시, 우버는 우리를 호텔 앞이 아닌 황량한 아스팔트 위에 덩그러니 내려주고 홀연히 떠나버렸다. 적어도 5층 이상의 호텔 내지 모텔로 보일만한 무언가가 있어야 되는데 주변엔 온통 드문드문 세워진 단층 건물들만 즐비해 있을 뿐이었다.


띵동-


치키가 자연스럽게 어느 집 대문 앞으로 다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5분가량 쉴 새 없이 누르자 그제야 문이 삐그덕 하고 열렸다. 내 눈앞에 펼쳐진 건 마당이 딸린 단층짜리 거대한 저택, 알고 보니 이 친구들이 도미토리를 예약해 놓은 것이었다.


그것도 혼성 도미토리


나는 이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따라온 것이다. 물론 치키가 단체 채팅방에 공유를 했지만 나는 '어련히 괜찮은 호텔로 예약했겠지' 치부하고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넘겨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1인당 100불씩 낸 점을 감안했을 때, 그 돈이 도미토리로 돌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내부로 들어서니 로비와 라운지, 공유 키친이 있었다. 체크인을 마친 후 주인의 안내에 따라 로비 뒤편으로 향하니 양옆으로 A, B, C, D 구역이 나누어져 있었고 구역마다 2층 침대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물론 문이 달린 방은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이 완전히 오픈 스페이스였다.


자리는 랜덤배정이라 나는 친구들과 두 블록 정도 떨어진 어느 외딴 구역 1층 침대에 배정받았다. 침대 위엔 수건 두 장이 놓여 있었고 옆에는 칠판이 붙어있었는데, 이곳에 이름과 머무는 날짜를 기입하는 듯했다.


나는 짐도 풀지 않은 채 반쯤 얼이 빠진 사람처럼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지도,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오늘 이곳에서 절대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친구들은 대체로 나이도 어리고 쓸 수 있는 용돈이 한정적이기에 숙소에서라도 돈을 아끼고자 했거나 혹은 이런 형태의 숙박시설에 개의치 않을 수 있었겠지만 나는 아니다. 5성급의 호텔만을 고집한다는 게 아니라 혼자, 혹은 최소한 일행끼리만이라도 머물 수 있는 독립된 방, 문이 방이 달린 곳에서 머물러야 마음을 놓을 수 있다.


주변에 누가 투숙하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슬쩍 고개를 내밀어 살펴보았다. 내 앞을 제외한 위층, 대각선 맞은편 침대 모두 남자였다. 


심지어 주변에 제멋대로 쌓인 옷가지들, 도통 알아볼 수 없는 말들로 가득 적힌 칠판, 헝클어진 머리, 커튼을 활짝 열어두고 옆으로 누워 폰을 보고 있는 모습 등 여러 가지를 비추어 봤을 때 대부분 이곳에 족히 반년이상은 머물고 있는 장기투숙객처럼 보였다.


어디에선가 뿜어져 나오는 음침한 기운을 느낀 나는 그들과 최대한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까치발을 들며 침대를 빠져나왔다.


일단 이곳에서 묵지 않는다는 가정을 했을 때 시간상 금일 산타바바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렇다면 머물 곳은 구해야 되는데 도저히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깊은 고민에 빠진 채 마당을 서성거리던 그때, 머릿속을 스쳐간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OC에 거주하는 나의 유일한 지인 부부. 미국에 연고라고는 오직 그 두 사람뿐이었던 나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내 손가락은 곧바로 다이얼을 향했다.


"목사님, 저 린이에요, 제가 지금 친구들과 LA에 와있는데 거두절미하고 오늘 하룻밤만 좀 재워주실 수 있으세요?


- "무슨 일인데?"


"하.. 그냥 친구들 따라왔는데 알고 보니 얘네가 도미토리를 예약해 놓은 거예요. 그것도 혼성 도미토리. 웬만하면 참고 자려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까 도저히 못 자겠어요.. 저 죽어도 여기서는 못 잘 것 같아요, 한 번만 도와주세요."


- "알겠어. 문제없어 걱정 마, 근데 어떻게 생겼는지 사진 좀 보내봐 너무 궁금하다."


목사님도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는지 듣는 내내 새어 나오는 헛웃음을 막지 못했다.


"그럴게요. 그럼 몇 시쯤 만날까요?"


"내가 너 있는 대로 갈게, 주소 좀 보내줘. 근데 오늘 철야예배가 있어서 거기 도착하면 밤 11시 넘을 것 같은데 괜찮아?"


"어차피 저희도 일정 있어서 좀 있다 나갈 거거든요. 얘네랑 놀다가 기회 봐서 빠져나오면 돼요. 몇 시든 그냥 와주실 수만 있다면.."


"알겠어. 이따 출발할 때 연락할게."


"정말 감사합니다."


자리로 돌아와 필수 소지품만 간단히 챙긴 뒤 배낭을 이불로 꽁꽁 싸맸다. 그러던 중 눈에 들어온 칠판, 


'어차피 오늘 여기서 안 잘 거인데 뭐.'


빈칸으로 남겨두기로 한 채 나가려던 찰나,


".. Hi"


내 맞은편에 묵고 있던 여성 투숙객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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