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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영 Apr 29. 2024

단편 001_ 내 심장에 자라난 무(無) 명의 생명체

누가 ‘사랑’을 죽였나?


“내 심장 속에 살던 ’ 사랑‘은 죽었다. 어느 내일도 사랑은 없다.”


         지독하게 얽혀오던, 서로에게 스며들어 신체를 이루는 모든 세포가 그에게만 반응하던, 평생에 가장 사랑하던 사람이 나의 세계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그가 자의적으로 내 세상에서 행방불명이 되던 날, 그날 이후 난 사랑을 피해 반대편을 향해 달렸다. 절망, 두려움, 슬픔 이 모든 길을 지나 증오에 다다를 때까지 더 열심히 달렸다. 오직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처음엔 증오인 줄 알았다. 사랑의 맞은편 끝이 증오라 생각하며 달렸다. 증오에 도달했을 때, 그 뒤엔 더 달릴 수 있는 길이 있었다. 다리가 무감해질 정도로 뛰었다. 내가 증오를 지나 도착한 그 끝은 무(無)였다. 그 무(無)는 다른 구역 지배자와 다르게 모양새를 아주 고상하게 바꾸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천천히 정교한 작업을 하듯 촘촘한 곰팡이를 피웠다. 그 쾌쾌하고 밀도 있는 곰팡이 꽃은 어느새 고상한 독버섯의 모양으로 자라났다. 그곳엔 이미 불쾌한 생명이 깃든 듯 보였다. 그 불쾌한 무(無) 명의 생명체는 나의 마음을 나누어 쓰는 공생 관계가 되었지만, 이 걸 깨달았던 때엔 과연 공생인지 나의 기생인지이 미 모호해져 의미를 잃은 이후였다. 그 무(無) 명의 생명체가 자리를 잡은 구역은 나의 심장에서 가장 큰 구역이었던 사랑이란 구역이었다. 그 무(無) 명의 생명체가 자라나기 전, 그 구역을 찾아온 건 ‘우울’이란 작자였다. 그는 자신의 구역을 넓히려 호시탐탐 찾아왔다. 그럼에도 온전히 나의 구역으로 남아있었다. 그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한 그 불쾌한 생명체 덕분이었다. 내가 ‘우울‘에게 그 구역을 빼앗기지 않았던 가장 명확한 이유는 그 무(無) 명의 생명체 덕분이다. 그래서 그 구역은 나의 구역이지만 나의 구역 아니다. 그곳은 무명의 생명체의 아기집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른 지배자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는 심장의 어느 한 구역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 심장 속 가장 크고 영향이 지대한 곳에 자신의 터를 잡고, 뿌리를 견고히 내려 자라나고 있다. 태아와 엄마의 관계처럼 나의 생명을 주 에너지원으로 삼아 내 생명을 먹으며 성장하고 있었다. 사랑 구역은 그에게 가장 자라나기 쉬운 아기집이 되었고, 그는 태아 그리고 내 생명은 그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영양분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난 아무런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사실 무(無) 명의 생명체가 점령한 그곳은 애초에 나의 구역이 아니었다. 그건 행방불명된 ‘그’의 구역이었다. 수년 동안 천천히 그는 나의 심장 속 사랑이란 명칭을 한 구역을 차츰차츰 점령해 갔다. 그리고 그 구역은 끝도 없이 영역을 아주 쉽게 확장해 나갔다. 나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굳이 저항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지배하던 세상은 유해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자의적으로 나의 삶에서 떠나간 날, 그 구역의 지배자 역시 함께 사라져 대혼란이 찾아온 것뿐이다.


텅 빈 그 구역에 처음 발을 들인 건 ‘절망’과 ‘두려움’ 이란 작자들이었다. 나의 심장 속엔 그들이 존재하는 관할 구역이 뚜렷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의 구역은 ‘용기’란 이름의 지배자가 자주 점령하곤 했는데,’ 절망‘과 ’ 두려움‘ 듀오의 활동이 끝나갈 때 즈음 그 구역을 ’ 용기‘가 사용한다. ’ 절망’과 ‘두려움’ 듀오는 아주 고약해서 한번 활동을 시작하면 아주 떠들썩하게 그들의 존재를 모든 구역에게 알리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이런 악질적인 면모 덕에, 난 불안과 공황에 자주 시달렸다. 성가신 작자들이지만, ’ 용기‘라는 지배자는 그들에게서 태어났다. 그들은 일종의 관할 구역을 공유하는 관계다. 그들의 활동은 나의 일상에 지장을 주지만 그들을 완벽하게 제거하는 일은 평생 불가능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용기’가 그들의 구역을 더 오랫동안 점령하게끔 좋은 것들을 보고, 듣고, 생각하는 일이었다.


태아가 엄마의 뱃속에서 열 달 남짓 채우고 세상에 나오는 반면 그 무(無) 명의 생명체는 여전히 계속 천천히 자라난다. 불행하게도 잉태를 위해 자라나는 생명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지도. 그 모습은 매우 역겹고 고귀하다. 그 생명체는 고요하게 자라난다. 아주 천천히.


이제 난 사랑을 느낄 수 없다. 나의 내일엔 사랑이 없다. 미래의 어느 타인을 만난다면 그건 사랑인척 행사를 하는 성적 욕구이지 않을까. 나는 여태 사랑의 죽음이 불행은 무(無) 명의 생명체의 탄생 때문이라 넘겨짚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 같다. 내 심장 속에 살던 ‘사랑’은 죽었다. 그를 죽인 난도질은 그 형체나 존재했던 흔적도 없어질 만큼이나 잔인했다.


 난 알고 있었다. 사랑 구역의 지배권을 ‘그’에게 넘겨준 날, 나는 ’ 사랑‘이란 자를 내 몸에서 완전히 삭제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를 지금은 행방불명된  ’ 그‘에게 내어주었다. ’ 사랑‘을 죽인 건 ’그‘ 도 무(無) 명의 생명체도 아니다. 바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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