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20 / 어른이날

by BO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소리에 아침 일찍 잠에서 깼다. 평소에도 장난치며 웃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오늘은 특히 더 데시벨이 높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거의 일주일 전부터 그랬다. 오늘만을 기다렸던 아이들이 드디어 봉인을 해제하고 나와 온 세상의 주인공이라도 된냥 떠들어댔다. '쿵쾅쿵쾅', '하하하하' 그들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왔다.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 주섬주섬 피곤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단순한 수면의 문제가 아니었다. 좀만 더 지체하다가는 아이들의 관심이 나에게로 쏠려 더욱 피곤한 상황이 발생할 게 뻔했다. 매달리고, 흔들고, 달리고, 숨고... 위험을 직감한 나는 아이들의 레이더망을 피해 조심스럽게 그리고 신속하게 방을 빠져나갔다. 문을 열고 나와 곧장 모퉁이를 돌아 마당 뒤쪽의 나만의 작은 비밀 아지트(?)에 도착했다. 다행히 따라붙은 이는 없었다. 그늘진 시멘트 바닥을 대충 쓸고는 그대로 드러누웠다. 어차피 에어컨이 없는 것은 건물 내부나 외부나 마찬가지이기에 밖에 드러누워 때때로 불어오는 자연 바람을 맞는 편이 좀 더 낫다. 아이들의 시끄러운 소리도 훨씬 작게 들렸다. 다리를 꼬고, 깍지를 껴 팔베개를 했다. 눈을 감고 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다렸다.

'아 덥다...'

한 번씩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왔지만, 역시 그 정도의 바람으로는 남태평양의 더위를 씻어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도저히 누워있을 수 없어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언제부터였는지 빠세나다와 그녀의 동생이 발치에 서 있었다.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근사한 원피스를 꺼내 입은 그녀들이 나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안녕 얘들아. 어린이날 축하해!"

오늘은 'A'의 어린이날이다.

곧이어 요란스러운 소리가 뒤를 따랐다. 아뿔싸 다른 아이들이 빠세나다를 따라 들이닥친 것이다.

"빠세나다 여기서 뭐 해?... 어 얘들아 형 여기 있다! 잡아!"

젠장. 위치 발각. 후퇴.


-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입장한 아이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들이 며칠 동안 준비했던 연극과 노래를 어른들 앞에서 선보이기 위해 작은 무대에 올라섰다. 폴리니가 대표로 나와 무대 인사를 했다. 아이들의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보고는 벌써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불과 어제 연습 때까지만 해도 많이 틀렸었기에 나도 아이들만큼이나 긴장하며 봤는데 실수를 남발하리라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실제 공연 때는 한 번도 안 틀리고 정말 잘했다. 공연장은 공연 내내 웃음바다가 되었다. 특히 빠세나다의 오빠가 네발로 기며 동물을 흉내 낼 때는 정말이지 배꼽이 빠지게 웃겼다.

공연 후에는 마당에서 페이스 페인팅을 해줬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앞 친구와 장난치는 아이들과 거울 앞으로 뛰어가 나비, 하트 등의 페인팅된 자기 얼굴을 보고 까르르 웃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 내 얼굴에도 덩달아 미소가 번졌다.

수제 콘 아이스크림 코너는 페이스 페인팅 이상으로 인기가 많았다. 오히려 애들보다 어른들이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어른들도 아이들 틈에 섞여 아이스크림을 받았는데 아이스크림을 든 채로 행복해하는 서로의 모습이 어색해서인지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른은 아이스크림 정도에 행복해하면 안 된다'라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겨우 아이스크림 정도에 행복해하는 내가 괜히 쑥스러웠다. 사진 속 어른아이, 어린아이 모두의 표정에 행복이 그대로 묻어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며 행복에 관한 퍼즐을 맞춰본다. 행복은 지구 역사상 가장 강력한 바이러스임이 틀림없다. 행복은 공기, 물, 음식, 체액 등으로 전염되는 다른 모든 질병과는 다르게 마음으로 전염되기에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전염된다. 우리는 오래 전의 편지, 사진을 보며 미소 지을 수도 있고 먼 타지에서 온 연락에 행복할 수도 있다. 또한 다른 모든 질병은 발병률과 치명률이 반비례하나 행복은 예외다. 보통은 치명률이 높으면 숙주가 생존할 수 없고, 그로 인한 숙주의 대사활동이 발생하지 않으니 병원체가 확산될 수 없으며 다른 숙주로의 감염 또한 느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행복 바이러스는 오히려 숙주의 대사활동을 촉진시킬 뿐 아니라 시너지 효과까지 일으키기에 발병률과 치명률이 모두 매우 높다. 아주 작은 무언가로도 많은 사람의 마음에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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