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쩍 눈이 떠졌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봤다.
'어… 꿈이었나?'
마치 어젯밤의 일이 꿈이었다는 듯이 매우 고요했다. 몇 개의 희미한 비상등 빛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어두웠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적절한 에어컨 바람까지 더해져 기내에는 아늑함이 넉넉했다. 어젯밤 동요하던 승객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나도 그런 기내 트렌드에 맞춰 다시 잠을 청했으나 눈을 질끈 감을수록 잠은 더 멀리 달아날 뿐이었다. 눈을 감았다 떴다를 몇 번 반복하고 나서야 잠들기에는 내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시계를 열댓 번도 더 확인한 것 같다. 멀뚱멀뚱 한참 뜸을 들이다가 마침내 조심스레 창문 블라인드를 올렸다. 한 줄기 햇빛이 순식간에 물밀듯이 새어 들어왔다. 얼마나 평온해 보이던지 보고만 있어도 포근했다. 햇살은 금빛으로 빛났고, 푸른 하늘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창을 통해 본 하늘은 너무나도 경이로웠다.
하굣길에 가던 길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강한 햇살에 눈을 찡그려서라도 보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쾌청한 하늘을 유영하는 뭉게구름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비행기의 조합은 언제나 나를 설레게 했다. 너무나 자유로워 보였다.
'언젠가는 나도 비행기를 타고 더 큰 세상으로 나갈거야!'
"뭐 해? 빨리 와!"
덥다며 걸음을 재촉하는 친구에게 괜한 말을 꺼냈다.
“하늘 진짜 예쁘다.”
“뭐?! 너 하늘이 좋아해?”
…
그 뒤로 친구들은 나와 하늘이 사이에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썸을 창조해 내 놀려대곤 했다. 미안하지만 하늘이는 내 이상형이 아니었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봐도 하얀 구름과 새파란 바다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창밖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누군가는 내가 바보같이 한참 동안 지루한 단조로움을 보고 있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사실 나는 나의 오랜 꿈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었다.
드디어 비행기가 커다란 구름 속을 뚫고 들어갔다. 물론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오래전부터 꿈꿨고 정말 그렇길 바랐던 솜사탕 같은 무언가로 가득 차 푹신하고 포근해야 하는 구름이 그저 작은 물방울 집단에 지나지 않음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매우 실망스러웠다. 상상이 산산이 조각나는 순간이었다.
10시간이 넘는 긴 비행 끝에 'A'에 도착했다. 얼른 뛰어나가 꿈에 그리던 남태평양 땅을 밟고 싶었지만 놓고 내리는 물건은 없는지 몇 번을 확인하고 나서야 하기하는 승객들의 줄에 합류했다. 평소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는 탓에 생긴 습관이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엄청난 열기와 습도가 나를 덮쳤다. 작열하는 태양 탓에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습한 공기가 맨살에 달라붙어 찝찝하게 끈적했다. 남태평양에 왔음을 실감했다. 바삐 걸음을 옮기던 승객들이 일제히 속도를 늦췄다. 어떤 이들은 아예 멈춰 서기도 했다. 버스커들은 자신들의 표정만큼이나 밝고 경쾌한 노래를 불러 후덥지근한 날씨에 가려져있던 승객들의 웃음꽃을 만개해주고 있었다. 얼마나 경쾌하던지 하마터면 짐을 내던져 놓고 스텝을 밟을 뻔했다. 남태평양에 왔음을 실감했다.
차를 타고 숙소로 가는 길에 본 'A'는 그야말로 쑥대밭이었다. 흙탕물이 강을 따라 흐르며 범람하고 있었고, 곳곳에는 나무가 뿌리째 뽑혀 쓰러져 있었다. 전봇대가 기울어져 전선을 위태롭게 매달고 있었고, 거리에는 파편과 쓰레기가 흩어져 있었다. 웃옷을 벗은 인부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서 수해 복구작업이 한창이었다. 주름이 깊게 패인 옆자리 할아버지가 근심빛을 띠며 입을 열었다.
“어제, 아주 강력한 허리케인이 왔었다네.”
그의 목소리는 지친 듯하면서도 무겁게 울렸다. 어떤 위로의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창밖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물장구 소리와 웃음소리가 어른들의 정적을 깼다.
“다행히 허리케인이 아이들의 웃음은 휩쓸고 가지 못했나 봐요.“
어젯밤 허리케인이 나라를 휩쓸고, 비행기를 위협했었다. 승객 그 누구도 비행기가 심하게 요동쳤다는 사실에는 집중하지 않으며 다만 'A'에 도착했음만을 기억할 것이다. 지금이었던 것이 과거가 되고, 영원할 것 같았던 것이 찰나가 되어 지나가듯 세상의 모든 순간 또한 지나가 흐려진다. 인생이 이와 같지 않을까. '나'라는 사람은 과거의 '나'가 아닌 지금의 '나'다. 즉, 지금의 '나'는 미래의 '나'를 향해 가는 과정일 뿐이지 '나'라는 사람의 정의가 될 수 없다. 그게 우리가 시련에도 좌절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야 할 이유이며,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다시 한 발을 내디뎌야 할 이유이지 않을까.
인생은 발원지와 종착지를 알지 못하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때로는 거센 폭풍을 만나 흙탕물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잔잔한 물결을 즐기기도 한다.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강을 거슬러 올라갈 것인가, 떠내려 갈 것인가를 매 순간 결정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