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18 / 창문 넘어 도망친 20대 청년

by BO

Chapter1. 창문 넘어 도망친 20대 청년




매서운 칼바람에 소나무가 흔들려댔지만, 창을 통해 본 밖은 유난히도 쾌청했다. 푸른 하늘과 찬란한 햇살이 내리 쬐 비추는 반짝이는 설원은 단숨에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는 창가에 다가가 서서 따사로운 햇살을 온 몸으로 맞으며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잔을 들어 올려 입에 갖다 댔다. 피어오른 미세한 수중기 입자들이 얼굴을 촉촉하게 감싸 적시며 수줍게 간질였다. 이내 커피가 입속으로 밀려 들어왔고, 동시에 부드러운 원두 향이 잔잔히 입안을 가득 채웠다. 눈을 감으니 향이 더 진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아들, 짐 다 챙겼어? 안 챙긴 거 있나 한 번 더 확인해 봐.”

(커피 향이 퇴장한다) 입 안에 머금은 커피를 삼키고 대답했다.

“엄마, 그 말 벌써 100번은 들은 거 같아.”

엄마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꼼꼼히 잘 챙겨. 아무것도 없는 정글이라며.”

나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정글 아니라니까.”

아마도 '오지'쯤 될거다. 커피 잔을 들어 올리며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햇살은 여전히 눈부셨고, 소나무는 강풍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서 있었다. 가족들 앞에서는 여유 있게 웃어 보였지만, 사실 나는 뽑히지 않을 만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오늘 편안한 온실의 창문을 넘어 남태평양 오지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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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틈만 나면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형형색색의 싸인펜으로 가고 싶은 나라와 도시에 색을 칠하곤 했다. 주황색으로 칠해진 유럽, 파란색으로 물든 아시아, 초록색으로 빛나는 아프리카... 어느새 지도가 온통 싸인펜으로 물들었을 때쯤 세계 모든 나라의 이름과 수도, 국기까지 외울 수 있었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상상을 하노라면 언제나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중에서도 특히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나라는 여태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남태평양의 아주 작은 섬나라였다. 세계 지도를 거의 다 외울 때쯤에야 겨우 존재를 알 수 있었던 그 나라는 유독 수식하는 어구가 인상적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심지어 수십 년 안에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 사라지게 될 거라고?'

꼭꼭 숨어있어 지도에서도 보이지 않던 그 작은 나라를 발견했을 때, 어쩌면 해답을 찾을 수도 있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나는 당장 수정테이프를 가지고 와 나라 이름을 지우고 그 위에 이렇게 썼다.

[B-612]

'B-612'는 어린 왕자의 소행성인데 어린 왕자를 대략 60번쯤 본 나에게는 최고의 작명인 셈이었다.

인생을 살며 행복이라는 단어를 셀 수 없이 많이 들었고, 자연스레 자주 ‘행복이 뭘까?’ 하는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러나 기쁨, 즐거움과 비슷하고 좋은 의미인 것은 알았지만 정확히 무엇이지, 어떤 느낌인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답을 적지 못한 문제지를 가슴 한켠에 품은 채 작은 나뭇잎 하나가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듯 빠르게 흘러갔다. 그러다 그날 그 작은 나라를 발견했을 때,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행복을 향한 갈망과 미지의 섬에 대한 동경이라는 전혀 다른 두 생각은 순식간에 서로를 끌어당겨 부딪히며 큰 에너지를 만들어 냈다. 에너지는 파동을 일으켰으며, 파동은 사그라지지 않고 내 안에서 끊임없이 진동했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 진동은 나로 하여금 'B-612'행 비행기 표를 사게 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처음 결심했던 때부터 비행기에 앉아있는 지금까지도 많은 생각이 찾아와 그럴싸한 이유를 대며 나를 설득한다.

‘1년이나 간다고? 1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맞다. 태권도장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고, 피아노 학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듯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인생을 살며 만나는 모든 일을 통해 배우고 성장한다. 어떤 모양이 됐든 나는 분명 성장할 것이다.

‘준비가 안 됐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 다음에 준비되면 가자.’

웬만한 준비는 평생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준비가 되어야 시작한다면 이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세계 최초로 유인 동력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 형제는 비행기 전문가도 아니었고 조종사도 아닌 자전거 수리공이었다. 준비가 안 됐어도 일단 한 걸음 내디디면 용기와 지혜가 따라오고 또 한 걸음 내디디면 상황이 따라올 것이다.

‘이 결정이 정말 정답일까?’

나는 인생에 실패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실패라고 인정하는 동안 그것은 정말 실패가 되지만, 언제든 실패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그 시련도 나를 성장시키는 양분에 불과하다.

'미친 거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해외에 나가서 부딪혀보지 못한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이들에게 '후회하는 것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그들은 모두 했던 것들에 대한 후회가 아닌 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후회만을 답했다.


이번 생이 처음이라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두려움의 기원은 알지 못함이다. 결말을 모르니 두렵고, 두려우니 머뭇거리게 된다. 그러나 머뭇거리면 무엇이든 얻을 수 없는 법이다. 결국 내일을 바꾸는 것은 그럴싸한 계획과 생각이 아닌 행동이다. 수많은 두려움이 찾아왔지만 더 이상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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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건강히 잘 다녀와.”

손을 흔드는 엄마의 눈시울이 붉었다. 동생은 그런 엄마를 토닥여 주었고, 아빠는 왜 우냐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누나는 커다란 3단 가방을 뒤뚱뒤뚱 끌고 가는 내 모습을 촬영하기 바빴다. 그렇게 나는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남태평양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토록 타고 싶었던 비행기를 타는 순간이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승무원들, 들뜬 아이들(나 아님)의 재잘거리는 소리, 옆자리 승객의 밝은 표정 등 모든 것이 나를 설레게 했다. 천천히 움직이던 비행기가 속도를 내 달리기 시작했다. 굉음을 동반한 엄청난 진동에 창문도 떨렸고 나도 떨렸다. 곧 땅을 박차고 오르자 동시에 깨질 것 같던 진동이 사라졌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불빛이 점점 작아져 갔다.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기어이 역풍을 맞아야 하며, 기꺼이 전속력으로 달려야 한다. 그리고 있는 힘껏 땅을 박찰 때 마침내 온갖 동요는 사라지고 중력을 거스르는 경이로운 비행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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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은 내 예상과는 달리 매우 지루했다. 처음의 설렘은 어느새 사라지고, 단조로운 풍경에 마음이 답답해졌다. 창밖은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제공되는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자 했으나 이마저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눈을 질끈 감고 한참 몸을 뒤척이다가 피곤이 설렘을 이겨 흘러넘칠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깼다. 곧 불이 켜지고 안전벨트 착용을 당부하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승무원들은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승객들의 안전벨트 착용 여부를 확인했다. 기내는 갑작스러운 요동에 불안한 기류가 감돌았다. 승객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겨우 평정심만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다. 어린아이들은 겁에 질려 부모에게 매달렸고, 어른들도 불안한 눈빛을 교환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나 역시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여전히 미세한 빛조차 찾아볼 수 없는 어두운 창밖은 망망대해를 비행하는 우리 모두로 하여금 더욱 신의 가호를 빌게 했다.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이 자연 앞에 한없이 작고 나약해 보였다. 거대한 하늘과 바다 사이에서 우리는 그저 작은 점에 불과했다. 나의 존재가 얼마나 미미한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 후로도 한참 동안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는 차분한 목소리의 안내 방송만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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