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주로 위에 서 있는 경비행기를 보며 마냥 설레던 내게 공항 직원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쭉 읽어 보시고 밑에 서명해주세요.”
대략 사망해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내용의 경비행기 탑승 동의서였다. 순간 덜컥 겁이 났지만 그렇다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섬 학생들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내부는 소형 버스보다 좀 더 작았지만, 꽤 안락했다. 경비행기에서 보는 풍경은 큰 비행기에서 보던 풍경과는 조금 달랐다. 비행 고도가 낮아 바다가 더 가까이 보였고, 가까이 보이는 만큼 더 생동감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본다면 파도 위로 힘차게 뛰어오르는 돌고래 떼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돌고래 대신 '멀미'라는 불청객이 먼저 찾아왔다. 예상치 못한 멀미에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았다.
약 50분간의 비행이 끝나고 눈을 떴다. 음. 다시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떠봤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눈을 감고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50분이 아니라 50년 전으로 시간 여행한 것 같았다. 나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지금은 공항으로 쓰고 있는 폐공장이었다. 그마저도 지붕만 있고 벽은 없었다. 경비행기만 들어올 수 있는 작고 빈약한 활주로와 그 주변을 둘러서 무성하게 자란 풀을 보고 있으니 내가 비행기를 탔는지 타임머신을 탔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어쩌면 타임머신이었을지도 모르는 경비행기가 나만 남겨놓고 떠나가는 모습을 보니 괜히 겁이 났다. 만약 3일 뒤에 저 비행기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영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 아마 통신도 안 될 것 같은데 해변에 거주하며 SOS 신호를 보내며 언제가 될지 모를 구조의 순간을 한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준비된 트럭을 타고 지낼 학교에 갔다. 건물이 따로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과 달리 전통 집이 줄지어 있었고 조금 작은 크기의 마네아베가 있었다. 전통 집이 교실이고, 마네아베가 강당이다. 그 뒤쪽에는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기숙사가 있었다. 이곳의 학교는 인가받지 못한 학교이기에 모든 선생님이 돈을 받지 않고 봉사하고 계셨다. 전교생은 50명 정도다. 짐을 풀고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모여있는 마네아베에 갔다. 첫인사로 며칠 밤을 새우며 연습했던 'B-612'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노래를 불렀다. 한국으로 치면 '아리랑' 즘 되지 않을까 싶다. 외국인이 자기 나라의 대표격되는 노래를 그것도 발음하기도 어려운 자기네 언어로 외워서 불렀다는 사실에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큰 감동을 하셨다. 학생들도 다양한 전통 공연으로 보답해줬는데 특히 기타 치며 부른 화음 섞인 노래가 인상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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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걸터앉아 수평선 아래로 저물어 가는 황혼을 바라보았다. 가로등이 없기에 날이 저물어감과 동시에 급속도로 어두워져 갔다. 그제야 왜 랜턴이 이곳저곳에 걸려있었는지 이해됐다. 전기는 공기, 햇빛, 물처럼 이미 우리 곁에 깊이 스며들어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당연한 존재가 되었다.
이곳에서 만난 학생들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작은 섬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회는 거의 모든 것을 통해 (심는 사람, 심기는 사람 모두가) 알게 모르게 우리 삶 깊이 고정관념을 심는다. 그렇게 심긴 고정관념 안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것은 다시 고정관념을 낳을 뿐이며 보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벼룩은 자기 몸의 100배인 30cm를 뛰어오를 수 있지만, 높이가 낮은 병에 담고 그 위에 유리 덮개를 막아 놓으면 몇 번 부딪혀보고는 유리 덮개 이상의 높이로 뛰어오르지 않는다. 결국 유리 덮개를 없애도 병을 뛰어넘지 못하게 된다. 벼룩을 벼룩답게 뛰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은 유리 덮개가 아니라 ‘못 뛴다’는 생각이다. 코끼리도 마찬가지다. 인도에서 코끼리를 길들이는 방법이 있다. 새끼 코끼리의 발을 나무 밑동에 묶는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지만 결국 밧줄을 끊지 못한 새끼 코끼리는 주저앉고 만다. 코끼리는 정말 똑똑한 동물이다. 밧줄을 끊을 수 없음을 인지한 새끼 코끼리는 ‘나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구나'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 생각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굳어진 고정관념을 가진 채로 어른이 된 코끼리는 밧줄 하나 정도는 충분히 끊고 그토록 원하는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음에도 그 한 걸음을 걷지 못하고 평생을 묶여 산다. 코끼리를 잡는 것은 밧줄이 아니라 ‘안 된다’는 생각이다. 너무 똑똑해서 안 된다는 생각을 믿었고 바보처럼 묶여 사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은 코끼리보다 훨씬 더 똑똑해서 안 된다는 생각을 별 의심 없이 덥석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생각은 위대함을 평범함으로 만들고도 남을 만큼 강하고, 평범함을 위대함으로 만들고도 남을 만큼 강하다. 사람에게는 몇 가지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꿈꿀 의무, 도전해야 할 의무, 포기하지 않을 의무, 성취해야 할 의무, 베풀어야 할 의무. 아이러니하게도 이 의무들은 고정관념에 맞서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