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27 / HOME SWEET HOME

by BO

긴 비행이 끝나고 서서히 고도를 낮추더니 이윽고 어둑어둑한 활주로에 바퀴가 닿는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벌써 창밖의 찬 공기가 느껴졌다. 옷을 하나 더 껴입고 나서야 줄지어 하기하는 승객들의 행렬에 합류했다. 어떤 때는 시베리아보다도 더 춥기도 하다는 한국의 겨울 한파는 이제 막 고국에 돌아온 청년을 괴롭혔다. 찬 공기에 몸이 절로 웅크려졌다. 떠날 때는 무거웠던 짐이 작고 가벼워졌다. 손에 들린 캐리어가 가벼워서인지 걸음이 홀가분하고 가벼웠다.

약 1년 만에 돌아온 인천 공항은 변한 것 없이 그대로였지만, 1년 전 나와 지금의 내가 완전히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이 존경스러워 보였다. 태권도장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고, 피아노 학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듯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 사람은 인생을 살며 만나는 모든 일을 통해 배우고 성장한다.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부담스럽고 힘든 일을 넘어야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 한국에서는 부담스럽고 힘든 일을 만나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지만 'B-612'에서는 짐 싸고 돌아오지 않는 이상 피할 수 없다. 나는 내가 빵점짜리라는 것을 배웠다. 처음 빵점 성적표를 받았을 때는 형편없는 성적에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았었다. 그러나 그 성적표는 내가 인생길을 걷는 동안 길을 잃을 때마다 방향을 제시해 줄 소중한 나침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빵점짜리가 되니까 모든 사람에게 들을 수 있고, 배울 수 있고, 존경할 수 있게 되었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렸다. 고향에 가까워질수록 창밖의 풍경이 낯이 익었다. 반가움 때문인지, 성취감 때문인지 미소가 지어졌다.

'여전히 그대로구나.'

고향은 변함없는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다가, 돌아온 아들을 반갑게 품어주었다. 포근하고 정겨웠다. 남아있던 조금의 긴장마저 풀리니 그제야 정말 여정이 끝났음이 실감됐다.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고 실제로 많은 것이 빠르게 변하는 요즘이지만, 나는 변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오는 안정감이 참 좋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존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s'를 재생했다. 한기가 느껴졌지만 창에 더 가까이 다가가 창밖을 보며 노래를 흥얼 거렸다.

자정을 훌쩍 넘은 늦은 밤 드디어 그리운 집에 도착했다. 1년 만에 재회한 부모님은 1년 전보다 더 마르고, 더 그을린 더벅머리를 한 아들을 안쓰러움보다는 반가움으로 맞아주셨다.

"아들아, 고생 많았다. 잘 다녀왔어? 보고 싶었어. 너 온다고 방에 조명도 달고 예쁘게 꾸몄어. 배는 안 고파? 얼른 씻고 와. 과일 깎아줄게."

쏟아지는 질문 폭격을 받으며 부모님이 나를 얼마나 기다리셨는지 느낄 수 있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과일을 먹으며 간단한 환영식을 했는데 나는 입에 모터라도 달린 듯 행복했던 이야기를 쏟아냈다. 친구들이 송별 파티를 해줬는데 맛있는 음식이 얼마나 많던지 걸신들린 듯이 먹었다는 이야기, 송별 선물을 한가득 받았다는 이야기, 'B-612' 최초의 뮤지컬을 준비하며 너무 힘들었지만 끝내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이야기, 전기가 없는 섬 학교에서 느꼈던 신선한 충격, 틈만 나면 바닷가까지 날아가던 축구공, 물 1.5리터로 씻는 방법, 물 한 컵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전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코코넛 크랩과 랍스타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언젠가 꼭 'B-612'에 모시겠다는 이야기.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내일, 모래, 글피 계속 이야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간단한 환영식으로 만족해야 했다.


방에 들어와 이불을 덮고 누워 잠깐 생각에 잠겼다.

시간이 흐른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열심히, 열심히... 그렇게 열심히 살던 어느 날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다가 앞에 있는 거울을 보고 깜짝 놀라겠지. 이마에는 주름이 있고, 머리에는 흰머리가 보이겠지. 시간은 흐른다. 과학이 상상할 수 없이 발달한다고 해도 인간이 생명과 시간에 손을 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한 번 흐르면 다시 오지 않는 시간 속에 살며 남들보다 빨라야 한다는 막연한 사회의 분위기에 휩쓸려 시간을 흘려보낸다. 물론 소득과 결과를 얻기 위해서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은 맞다. 어영부영 금보다 귀한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러나 삶의 목적이 '열심히 공부하기', '열심히 일하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언제나 삶의 목적은 행복이고, 그 목적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바쁘다는 이유로 소중한 사람들과 행복하게 보내야 할 시간을 다음으로 미루고, 수많은 도전을 다음으로 미룬다면 이는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결국 행복도 유한한 시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인생은 마라톤이라고. 모두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시간의 흐름이라는 이 길을 달린다. 그 앞에 결승점이 있다고 믿으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야 할 시간과 미소를 연료 삼아 더 빠르게, 더 높게, 더 치열하게 달린다. 그런데, 정말 인생은 마라톤인가? 그렇지 않다. 어찌 하나의 코스만 있을 수 있으며, 어찌 하나의 결승점만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너무나도 광대해 감히 그 누구도 그 무궁무진함을 가늠할 수조차 없다. 이 세상은 마라톤 경기장이 아니다. 어디로 향하든 좋다. 그저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방향으로 달리되, 멈추지만 않으면 된다. 실패해도 좋다. 돌아가도 좋다. 남들과 비교하지 않아도 된다. 길은 사람 수만큼 다양하다.


오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여행을 하며 내린 내 결론은 이거다. 기쁘든 슬프든, 성격이 좋든 나쁘든, 남 눈치를 보든 안 보든, 성실하든 게으르든, 도전을 하든 안 하든, 일이 잘 풀리든 잘 풀리지 않든, 희망적이든 절망적이든, 이 결론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그 어떤 것도 상관없다. 행복은 우리 모두와 항상 함께했고, 함께 하고 있고, 함께 할 것이다.


내 방 이불 안이 이렇게 포근했었구나. 눈이 감긴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꿈을 꾸게 될지 꿈에서 깨게 될지 모르겠다. 자지 말고 버텨볼까 하다가 이내 바보 같은 생각에 피식 웃는다.

...

이제 정말 345일간의 행복했던 꿈을 마무리하고 일기장을 덮는다.




Ps. Take Me Home, Country Roa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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