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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의 숲 Feb 16. 2024

르완다에서 부는 바람 12화

새들의 모습을 보면서 삶을 배웠다.

지붕 위에 앉아있는 새들을 보았다. 가까웠나 싶으면 또 저만치 멀어져 있고, 멀어졌나 싶으면 어느새 하나가 된 듯 보인다. 새들은 무슨 생각에 잠긴 듯하다. 나는 저들의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새들도 나름대로의 질서 속에서 살아가겠지만,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것들이 오늘은 왜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일까. 하나가 아닌 둘이 만들어내는 삶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이곳에서도 느낀다. 르완다에 온 지 한 달이 지나면서 괜스레 내 맘이 투영된 것일까. 



르완다는 그야말로 새들의 천국이다. 사시사철 이렇게 푸른 수목들이 펼쳐있으니 어디를 가나 목청껏 소리를 질러댄다. 떼구루루 구르는 소리가 서로 엉켜 여기저기서 부서진다. 아니 부서진다는 표현은 너무 약한 것 같다.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남편과 함께 조깅을 하는 날이면 뛰어가고 있는 길 내내 새소리가 들린다. 어디서 이런 새소리를 들을 수 있지!!! 우리는 늘 감탄하면서 자연을 본다. 


늘 새벽잠을 깨우는 새를 나는 수다쟁이 새라고 명명한다. 참새같이 작은 새가 마당을 톡 톡 뛰어다닌다. 혹은 잔디 위를 혹은 잎새 사이로, 혹은 줄기 끝에 앉아 있다. 바람을 타고 노는지 줄기가 휘청 휘청거린다. 그러다가 활짝 핀 꽃잎을 찾아다니며 무엇인가 쪼아 먹고 있다. 무얼 먹고 있나! 한참 눈으로 따라다녔다. 꽃술을 찾아다니는 것 같기도 한데 그 행동이 어찌나 빠른지 나의 관찰력은 매번 행동을 놓치고 만다. 



멀어졌던 둘이 한 지점으로 모였다. 내가 잠깐 못 본 사이 둘의 거리는 저렇게 좁혀졌다. 무엇인가 다정하게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둘의 대화는 정말 하나의 접점으로 도달한 것일까. 아니면 자기의 주장을 또 하나에게 설득이라고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하는 것일까. 한 마리 새가 다른 한 마리 쪽으로 몸이 기울어진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대화란 수긍해 주는 배려의 공간이 마련되어야 된다. 저들만의 대화를 누가 들을 수 있으며, 저들의 마음을 그 누가 들여다보겠는가. 다만 보이는 것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대화는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금이 가기 쉽다. 그것은 서로의 생각 차이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하고 한 번쯤 생각해 보라. 일단 서로가 다름을 인정해 주면 어떨까. 나는 너와 다르고 너는 나와 다르다. 새들은 지붕 가장 꼭대기에 서 있다. 정점에서 겹쳐 보이던 실루엣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서로의 몸이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서 있는 모습이 오히려 위태롭게 보인다.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무슨 체념인 것 같기도 하다. 비로소 이때, 아래가 보이는지도 모른다. 체념한다는 것은 마음을 다 내려놓는 것이니까. 


분명 저들의 대화는 지금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일방적인 대화는 상처를 준다. 먼저 마음의 문을 닫게 하고 말의 문조차 닫아 버린다. 서로가 바라보는 방향이 점점 틀어지는 것은 마음이 먼저 돌아섰기 때문이다. 자기 의견에 앞서 상대방에게 먼저 마음을 물어본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귀한 배려일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놓치고 있는 많은 부분들이다. 


결국, 각각 몸을 돌렸다. 등과 등도 멀어져 대화는 실패한 듯 보인다. 먼 곳을 향해 포효하는 듯한 모습.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아달라는 듯한 표정이다. 벌어진 부리는 한없이 날카롭다. 금방이라도 화를 내며 달려들 것만 같다. 어쩌면 저렇게 똑같은 모습으로 등을 보이고 있을까. 저들에게 오늘은 어떤 의미이며 함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서로에게 등을 보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마음도 몸도 굳어져서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새는 더 목청껏 자신의 주장을 펼칠 것 같아 보인다. 아, 팽팽하게 맞서는 긴장감!!! 새의 세계에서도 삶의 모습을 보다니... 지금의 상태에서는 그 누가 어떤 말을 해도 귀에 들리지 않을 것 같다. 당분간 저들의 시간 속으로 비행하는 것은 금물!!! 시간은 흘러야 한다. 스스로 낸 상처이든, 타인이 만들어낸 상처이든 아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자신의 속을 덜컥 털어내 버리면 시원은 하겠지만 더 큰 후회를 가져올 때가 있다. 


외로운 풍경 속을 배회하던 새 한 마리 언제 날아왔을까. 빳빳이 고개를 들고 있는 저 새들은 내가 본 이 광경을 못 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존재가 너무 크고 할 말이 많으니까. 그 혈기를 다 내려놓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저 인내의 새를 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

  

돌아보면 삶의 과정 속에서 언제나 그분이 계셨다. 내 마음이 낙심될 때 아픈 마음을 만져주시는 따뜻한 손길이다. 곁에 날아온 새의 모습처럼 말이다. 그러나 때로, 나도 혈기 부리는 저 새들처럼 그분의 존재를 못 알아본 것은 아니었을까. 눈이 어두워진다는 것은 내가 너무 밝기 때문이다. 


한차례 바람이 지나가고 구름도 잠시 멈춤 하는 시각, 기다림이 효과가 있다. 새들의 실루엣이 점점 둥글어지고 있다. 하나가 고개를 숙이면 또 하나가 고개를 숙인다. 잠시 후 더 둥글어진 모습으로 둘은 하나의 날개를 펼친 듯한 모습이다. 이제 둘은 함께 날개를 펼치고 하나의 방향을 보며 날아갈 것이다. 


이제 속력이나 거리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것에 길들여져 있어 조금만 지체되어도 힘들어했다. 둘의 모습을 보면 미처 들어주지 못했던 마음을 달래주고 있는 듯 평안한 고요가 느껴진다. 우리의 삶도 저들처럼 둥글어져야 하지 않을까. 나의 각을 지우고 너의 각도 지우고 서로의 모서리를 안아주며. 


참, 아름다운 새들의 모습을 본다. 서로의 부리가 마주하여 만들어내는 사랑의 모습이다. 단순히 넘기기에는 너무 아까운 모습이라 글로 남겨본다. 마음을 헤아려준다는 것처럼 큰 배려는 없다. 더군다나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이것이 아닐까 싶다. 살며 사랑하며 서로의 마음을 짚어주려고 애써야 함을 새에게서 배웠다. 삶이란 그래서 겸손해지는 것 아닐까!!! 언제나 내 안의 상처를 만져주시는 그분이 있어 아프리카 땅, 덩그러니 와 있어도 삶의 의미가 있음을 깨닫는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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