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 하고 싶은 것
**종로 국수집**
“정 단장님, 뭘 그렇게 넋 나간 듯 봐요?”
“아니, 부모님이 그렇게 어릴 때?”
“네... 긴 사연이 있었어요.”
“근데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거예요?”
“뭐, 워낙 오래된 이야기니까요. 이모님이 그 이야기는 하지 말라 했으니 우리 본격적으로 일 이야기부터 할까요?”
그 말을 들은 태진의 귀가 쫑긋하게 올라갔다. 형원은 뒤에 자신을 미행하는 자가 있는지는 꿈에도 모르고 같이 훔친 장부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려했다.
“우선 저번에 보셨던 대장님께 서류는 전달드렸습니다.”
“뭐라시던가요?”
“아, 그게.”
형원이 말을 하려던 찰나에 음식이 나왔다. 진하고 따뜻한 국물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게, 위에 살짝 뿌려진 파와 깨가루가 더해 맛이 없을 수 없는 모양새였다.
“면을 많이도 주셨네요. 잘 먹겠습니다!”
“얼른 잡숴. 빈속에 술부터 마시지 말고.”
이형이 그릇을 들어 국물을 마시더니 표정이 싹 바뀌며 감탄을 연발했다. 그리고는 바로 앞에 놓인 소주 뚜껑을 따서 두 개의 잔에 따랐다.
“와! 씨! 여기 뭐예요? 형원 씨가 소주 시킨 이유를 알겠네요.”
“그쵸? 미쳤죠?”
“네. 잔치국수 먹으면서 소주 땡기긴 또 처음이네요.”
“우선 한잔하시죠.”
두 사람의 격한 반응에 태진은 멸치국수 맛도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것보다 아까 하려던 이야기를 언제 다시 시작할지가 그는 더욱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사령관님 반응은 어떠셨나요?”
“후루룩. 음. 쥐새끼들... 쩝쩝... 내용은 단장님 쪽에서... 쩝... 처리를 하시면... 쩝쩝... 좋을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그건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를 도와주시는 윤창식 선생님께도 이 내용을 미리 귀띔해 드렸고요. 그건 그렇고.”
이형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형원에게 고개를 가까이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혹시... 그건 사령관님과 같이 그거··· 지도에 맞춰 보셨나요?”
“네... 저희 예상이 맞는 것 같아요. 주로 남해 쪽이었습니다.”
“아···참···씁쓸하네요..”
“그건 저희가 잘 처리할 테니 너무 걱정 마십쇼. 한잔 드시죠.”
둘은 그렇게 술잔을 또 부딪쳤다. 청각으로만 모든 상황을 파악하려니 조금 불편하긴 했으나 우선은 안 들키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한 태진은 최대한 티 내지 않고 조용히 국수만 먹으며 둘의 대화에 집중했다.
“혹시요... 이 일이 끝나고도 계속 거기 남아계실 생각이신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일본 놈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데... 똑같이 되갚아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으니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똑같이 되갚아준다는 걸 어떤 의미일까요?”
“뭐... 제일 좋은 건 우리가 일본을 침략해서 지배하는 거죠. 36년간.”
태진은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형원의 말에 사레가 들려 기침을 했다. 급히 물을 한 모금 마시는데 사장이 육수를 내어왔다.
“목 메일 테니 같이 들어요. 별건 아니고 멸치국수 국물이에요.”
“아... 감사합니다.”
둘의 대화를 들으며 멸치국수 맛이 너무나 궁금했는데 이렇게 사장님의 인심으로 맛보게 되니 너무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한 모금을 마시니 왜 저 둘이 아까 그렇게 난리법석이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는 아주 잠깐 술을 하나 시킬까 하다 이곳에 온 목적을 생각해 참기로 했다.
“아시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첫째, 일본은 이제 항복을 선언한 국가예요. 미국, 소련, 프랑스 등의 국가들이 우리가 그들과 전쟁을 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겁니다.”
“뭐... 그냥 꿈이 그렇다는 겁니다. 이걸 뭐 제가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근데 저번에 같이 있던 친구 있죠? 그 친구 말이 엄밀히 따지면 일본은 우리에게 항복을 한 게 아니라서, 그러니까, 우리는 승전국이 아니니까 문제 될 게 있냐고 하더라고요.”
뭔가 이해는 안 가지만 말이 되는 이야기에 태진은 혼자 일본으로 넘어가 그들을 짓밟는 상상을 했다.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 엔도 저놈을 단칼에 베어버릴 텐데...’
생각이 현실에 이르자 태진은 다시 짜증이 났다.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가족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등 뒤에 있는 저 남자를 해코지하는 것뿐이었다. 아직은 머리로 전혀 그럴 수 없다 생각하지만... 가족을 위한 길은 이것뿐이란 걸 그는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아무리 일본이 패전을 했다지만, 아직까지 축전된 전투용 자원이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될 텐데요?”
“네. 그건 맞는 말씀이에요. 근데 제가 서울 침공 직전을 준비할 때, 물론 강대국들의 도움이 약속되어 있긴 했지만, 여기저기 흩어진 독립군들이 힘을 합친다면 꽤나 비벼볼 만한 전력이었다 생각해요. 단, 문제는, 우리는 전투 함대가 없다는 거죠. 서울 침공 작전은 육지 전과 공군으로 진행하려 했지만, 일본은 해전을 해야 하잖아요. 가뜩이나 그들은 해전에 강한데, 통통배를 타고 싸우러 갈 순 없으니까요.”
“하하. 그러네요.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이번 일이 끝나면 저랑 같이 일하실 생각 없으신가요?”
술을 시원하게 한잔 들이켠 형원은 상대의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짐짓 놀랐다. 그는 그릇을 들어 국물을 마시고는 이형을 빤히 바라봤다.
“복수하고 싶으시다면서요. 근데 이제 곧 일본 놈들은 다 떠날 거고. 그럼 응징할 수 있는 대상은 이제 딱 하나 남는 거 아닌가요?”
그의 말에 태진은 그게 누구일지 추론했다. 그건 단 하나, 친일파였다. 그 대상에 자신의 아버지도 포함된다는 게 너무나 씁쓸했다.
“잘 생각해 봐요. 형원 씨라면 정말 잘할 것 같아서 제안하는 거예요. 방황하기엔 너무 아까운 인재라... 어쨌든 저는 이만, 일정이 있어 먼저 일어날게요.”
“네. 서류는 다음에 뵐 때 드리겠습니다. 들어가세요.”
친일파를 추적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던 태진은 그가 일어날 때 자기도 모르게 급히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그 움직임에 자연스레 이형과 눈이 마주치자 태진은 허겁지겁 고개를 다시 돌려 국수를 마저 먹는 시늉을 했다.
이형이 떠나고 형원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고는 남은 소주를 병째 마시고 국수도 마저 비운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모! 또 올게요.”
“그래. 술도 마셨는데 이상한 데 들르지 말고 조심히 들어가고!”
형원이 밖으로 나간 걸 확인한 후, 태진도 급히 자리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재빨리 주위를 살펴보니 저 멀리 터벅터벅 걸어가는 형원이 보였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그의 뒤를 밟았다. 그는 시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귀국하고 일이 바빠 딱히 시장에 올 일이 없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미국에 있을 때와 비교했을 때 너무나 참담한 현실에 눈물이 나올 뻔했다. 어느 정도 지나다니고 이야기를 들어서 예상은 했지만 가까이 들어와 보니 여긴 거지 소굴이 따로 없었다.
파는 물건들도 하나같이 어디 쓸 수도 없는 물건들로 가득했고, 음식에는 파리 등 벌레들이 꼬여 있는데도 아무도 이를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 몇몇 음식에서는 악취가 풍겨 자신도 모르게 코를 막았다.
‘저런 걸 사서 먹는단 말이야? 이 나라, 진짜 심각하구나.’
그리고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아이들은 이 나라가 돌봐야 하는 미래였지만, 그들의 눈동자에는 미래 따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 먹을 것 좀 주세요.”
어린 거지 꼬마가 형원에게 구걸을 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작은 사탕과 초콜릿을 꺼내 아이에게 줬다. 아까 사무실에서 챙겨 온 듯한 모양이었다.
그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태진은 그의 숙소라도 알아놓자는 생각으로 그를 계속 따라갔다. 그러다 그가 골목으로 꺾어 들었고, 태진은 빠른 걸음으로 그가 들어간 골목으로 따라갔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 보였던 그의 모습이 시야에 잡히지 않았다.
‘어라, 어디 간 거지?’
그는 두리번거리며 상대를 찾았으나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불안한 마음에 외투 안주머니에 있던 권총에 손을 가져갔다. 그때였다.
“넌 왠 놈이냐?”
태진의 등 뒤로 날카로운 물체가 느껴졌고, 그는 이게 칼이란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일본 놈들 따돌리면서 산 지가 거의 15년이 넘는다. 허튼 변명 나불댈 거거든 목숨은 내놓고 시작하는 게 좋을 거다.”
상대의 협박에 태진은 고민을 했다. 바로 인정해야 할지, 아니면 잡아떼야 할지... 아니면 외투 안에 들고 있는 총을 그대로 쏠지...
“다들 자기네들의 미행이 완벽했을 거라 생각하고 잡아떼려는 생각들을 하시는데... 아까 그 국수집에서 너도 있었지?”
“네? 제가 방금 국수를 먹고 오긴 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죠?”
“거긴 잔치국수랑 비빔국수 다 맛있거든. 그래서 거기 맛을 아는 사람들은 다들 뭘 시킬지 고민을 하지. 근데 여기 몇 번 와봤던 사람들은 그 고민이 안 되긴 해. 왜냐면 비빔국수 시키면서 육수 달라고 말씀드리면 주시거든. 여기서 술 마실 거 아니면 다들 비빔국수에 육수 달라해서 먹어. 처음 온 사람이면 이모가 이걸 설명해 주시거든. 근데 넌 비빔국수만 시키면서 처음 온 게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더라고. 그래서 처음에 눈에 들어왔지.”
어찌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그냥 다 말해버리자 생각했지만, 이제 건강이 그리 좋지 않은 아버지가 감옥에 갈 수도 있단 생각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고민 끝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외투로 가려진 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 형원은 이를 눈치채지 못한 채 상대를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
“오호. 아무 말도 안 하시겠다. 알겠다. 등에 구멍이 나도 네가 입을 안 여는지 한 번 보자!”
태진의 목덜미에는 땀이 흥건히 맺혔고, 그는 손가락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그는 지금 눈에 맺히는 게 눈물인지 땀인지 알 수 없어 자꾸 눈을 깜빡거렸다.
‘여기서 정체를 밝히면···감당해야 할 게 너무 많다..’
자신의 지휘며 아버지의 과거까지··· 그는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의 손끝이 떨리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상대는 칼로 날 압도하고 있다 생각하겠지만, 결정권은 자신에게 있다는 걸 상대는 모르고 있었다.
‘그냥 방아쇠 한 번만 당기면 모든 게 해결된다···’
벼랑 끝에 몰린 쥐처럼 태진에게 남은 선택은 하나뿐 없어 보였다. 상대는 꽤나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의 사람이지만, 태진은 건강에 그리 좋지 않은 아버지의 남은 평생을 감옥에서 지내게 할 수는 없었다. 끝내 그는 결정을 마쳤고, 결국 눈을 꼭 감았다.
[독립운동가 인물 평전]
김완규(金完圭, 1881~?)
경상남도 동래 출신으로, 1907년 대한자강회와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했으며,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넘어갔다. 이후 신민회 활동에 참여하고,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인 서로군정서에서 재정 및 군사활동에 종사하였다. 1920년대에는 대한통군부와 의군부 등 무장 독립운동 단체에 관여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해방 전후 행적은 명확하지 않다.
*출처 :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