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록]1946년, 한국이 일본을 점령했다

88화 - 불청객

by 팬터피

**미군정청**




“안녕하세요, 최형원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십 명이 넘는 인원으로 가득한 미군정청 사무실 끝에 있는 사람까지 들리도록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형원이 자신을 소개했다. 국밥집에서 경찰들에게 끌려갈 때 그를 옹호했던 우진과 진호 옆에서 얼굴이 귀에 걸린 채 웃음을 지으며 격하게 박수를 쳤다.




“우리 형님은 총사령관님과 십오 년 넘게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같이 하셨던 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통화시에서 일본 헌병대 박살 냈을 때 있죠? 그 전투에도 참여하셨고, 서울 침공 작전에도 선발대로 준비하셨던 분입니다.”




“야, 야. 그만해. 창피하게 왜 그래~”




동생들의 난리법석에 형원은 손사래를 치며 그들을 말리는 척하며 뒤에서 옆구리를 쿡 찌르며 조용히 속삭였다.




“폭탄, 폭탄.”




“아! 그리고 대련에서 마코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지신 분도 바로 우리 형원 형님이십니다.”




“와~”




“오!”




한때 한양에까지 소문이 퍼져 꽤나 유명했던 대련 폭탄 투척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자 사람들 몇몇이 감탄을 했다.




“역시 아시는 분들이 꽤 계시네요. 이번에 남해 쪽 도서 지역 조사과에 새로 부임되셨으니 환영의 박수 부탁드립니다. 박수~”




사람들이 박수로 환영했으나 진은 자기 자리에 앉아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이 호들갑을 불편해하고 있었다. 이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행정관 제임스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는 바로 통역관 기영이었다.




“Welcome, Mr. Choi. I’m James. Nice to meet you.”




“아, 예예.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I totally appreciate you joining us. Thank you. Whatever you need, I’ve got your back.”




“저··· 뭐라 하시는 건지···”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형원은 어색해하며 자연스레 제임스 뒤에 있는 기영을 바라봤다.




“이분은 이번 사업을 도와줄 제임스 행정관입니다. 필요하신 것들은 말씀만 주시면 뭐든 지원하겠다고 합니다.”




“오! 땡큐 땡큐!”




“아, 참고로 저희는 지방 출장도 동행 예정입니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멀리서 다른 일을 보며 듣고 있던 진이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봤다. 형원 역시 원치 않은 꼬리가 붙는 게 번거로워 불편한 티를 냈다.




“와이?”




행정관이 영문을 몰라 기영과 형원을 번갈아 바라봤고, 그런 자신의 상급관을 기영은 팔을 뻗어 안심시켰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아··· 그런 건 아닙니다. 지방은 여기 서울과 달라서 많이 누추할 텐데··· 이렇게 귀하신 분이 그런 곳에 계셔도 될지 해서요.”




“그런 건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저희 행정관님도 군인 출신이시라서요.”




“근데 하루이틀 걸리는 일도 아닐 텐데···”




“그런 건 저희가 걱정할 일 같은데요. 혹시 다른 꿍꿍이라도 있는 건 아니시죠?”




허를 찌르는 상대의 질문에 형원은 짐짓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머쓱하게 웃으며 과장되게 손을 흔들었다.




“에?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네, 그럼 말씀들 나누세요.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필요한 거 있으시면 연락 주십시오.”




제임스를 데리고 기영이 자리를 뜨자 형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진을 바라봤다. 친구와 눈이 마주친 진은 뭔가 일이 꼬이고 있음을 직감했지만, 우선은 티를 내지 않고자 대수롭지 않은 척 애써 그의 눈을 피하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자리로 돌아가는 길에 제임스는 복도를 걸으며 기영에게 물었다.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겁니까?”




“행정관님이 출장을 같이 갈 거란 걸 미리 알려줬습니다.”




“그래서 그렇게들 표정이 불편했군요. 하하.”




“아무래도 상급자가 같이 간다니 편치는 않겠죠.”




그 말을 듣자마자 제임스는 기영을 빤히 바라봤다.




“근데 왜 미스터 양은 제가 간다고 할 때 지원해서 따라온다 한 건가요? 다른 통역관들은 그닥 가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던데.”




“음··· 출장비 준다 해서요.”




급히 말을 지어낸 기영은 퉁명스레 말을 내뱉은 뒤 혹시나 자신이 거짓말한 게 들통날까 걱정돼 그의 눈을 피했다.




‘분명 저놈들이 장부를 가지고 있을 텐데··· 근데 남해 쪽 촌구석엘 굳이 가는 건 무슨 꿍꿍이인 걸까?’




아무리 생각을 쥐어짜봐도 기영은 그 이유가 짐작이 안 갔다. 그러다 무심코 창밖을 바라봤는데 익숙한 남자 하나가 밖에 있었다.




‘저 자가 이 시간에 왜 여기에···? 근데 왜 저러고 있는 거지?’






**미군정청 앞**




기영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바로 헌병대장 태진이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형원을 미행해 보고자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앉아 그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간사한 일본 놈 말에 넘어가 내 동포를 해할 수는 없지. 그냥 돌아가자.”




그는 발길을 돌려 복귀를 하려던 그때 미군정청 정문에서 형원과 진이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근처 다른 건물로 몸을 숨겼다.




“별일 없겠지? 갑자기 왜 같이 간다는 걸까?”




“모르겠어. 그냥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거 아닐까 싶은데··· 뭐가 됐든 우리 계획에 도움이 되지 않는 건 사실인 듯해.”




“뭐··· 내가 가서 잘 따돌려볼게. 독립군 때도 경찰들 따돌리는 거 일도 아니었어.”




“쉿. 말 조심해··· 그거랑 이거랑 같냐. 아무튼 오늘은 첫날이니 좀 들어가서 쉬어.”




“그래. 어찌할지 고민 좀 해볼게. 내일 보자.”




둘이 헤어지고 형원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태진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신속히 그의 뒤를 밟았다. 그리고 이 모습을 멀리 창문을 통해 기영이 지켜보고 있었다.






**종로 거리**




헌병대장 태진은 멀리 떨어져 형원을 유심히 지켜봤다. 그를 제거할 마음은 없었지만 간사한 엔도에게 시늉이라도 보여야 그의 입을 막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형원은 저잣거리를 걷다가 한 국수집으로 들어갔고 태진은 약간 밖에서 기다렸다가 식당 문을 열었다. 주문을 하고 있는 형원을 지나 그의 뒤에 앉으려던 태진에게 식당 사장이 물었다.




“여기 처음이시죠? 뭘로 드릴까요?”




따라 들어온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들어오며 사람들이 먹는 걸 대충 봐놨던 그는 재빨리 다른 사람들이 다들 먹는 메뉴를 골랐다.




“처음 아닌데요? 비빔국수 하나 주세요.”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들어왔지만, 식당에 들어와 음식 내음을 맡으니 갑자기 배가 고파 작게 꼬르륵 소리가 나자 혹시나 뒤에서 들었을까 태진은 조금 신경이 쓰였다. 얼마나 오랜만에 먹는 비빔국수인가? 미국으로 떠난 이후 처음 먹는 듯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이렇게 시장에 나와 작은 식당에서 뭘 먹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열무김치와 투박하게 찢은 상추가 올려진 게 아주 맛스러워 보였다. 매운 내와 참기름 넣어 고소한 향이 같이 코를 찔러 미행이고 뭐고 식욕부터 자극했다. 그는 우선 크게 한 젓가락을 들어 후루룩 들이켰다.




매콤하면서도 시큼하고 달짝지근한, 유학 생활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맛이었다. 자신이 지금 미행 중이란 사실도 잊고 또다시 크게 한 젓가락 들고 있는데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닙니다. 앉으세요, 단장님. 뭐로 드시겠어요?”




“뭐가 맛있나요?”




“다 맛있는데 전 멸치국수가 더 맛있더라고요.”




“그럼 멸치국수 먹겠습니다.”




“주모! 여기 멸치국수 곱빼기로 두 개랑 소주 한 병 주이소!”




친근한 형원의 주문에 사장님이 웃으며 받아쳤다.




“지금이 뭔 조선시대냐? 주모 찾게.”




“왜요~ 정겹고 좋잖아요.”




“글고 벌건 대낮부터 뭔 술이야.”




“여기 잔치국수 국물 맛보면 소주 생각이 바로 나는데 어찌합니까요! 이게 제 잘못입니까? 맛나게 만든 이모 잘못이지.”




“낮술 마심 애미애비 몰라본다, 이놈아.”




“에? 나 몰라볼 애미애비 없는 거 몰라요, 이모? 나 열 살 때 개 같은 일본 놈들이···”




“옛다. 슬픈 이야기해서 뭐해. 적당히 마셔. 저번처럼 네 발로 가지 말고.”




“아이고~ 우리 어머님 감사합니다!”




짧은 대화에서 그는 참 정이 많은 게 느껴졌다. 경찰서에서 엔도를 죽일 듯 달려들던 그 표정도 그렇고, 참 부모도 없이 잘 컸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태진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정 단장님, 뭘 그렇게 넋 나간 듯 봐요?”




“아니, 부모님이 그렇게 어릴 때?”




“네... 긴 사연이 있었어요.”




“근데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거예요?”




“뭐, 워낙 오래된 이야기니까요. 이모님이 그 이야기는 하지 말라 했으니, 우리 본격적으로 일 이야기부터 할까요?”




그 말을 들은 태진의 귀가 쫑긋하게 올라갔다. 형원은 뒤에 자신을 미행하는 자가 있는지는 꿈에도 모르고, 같이 훔친 장부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려했다.








[독립운동가 인물평전]




홍진 (洪震, 1877~1946)




충남 한산 출신으로, 프랑스 유학 후 국내에 돌아와 민족계몽운동에 힘썼고, 신한청년당 활동을 거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그는 외교활동과 군사 준비 양면에 적극적이었으며, 중국 국민당 및 서방과의 연계를 통해 임시정부의 외교 기반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무 활동과 재정 확보에도 힘썼고, 광복 전까지 임시정부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광복 후 국회 의장을 지냈으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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