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 각자의 비밀
**시내 골목길**
“오호. 아무 말도 안 하시겠다. 알겠다. 등에 구멍이 나도 네가 입을 안 여는지 한 번 보자!”
태진의 목덜미에는 땀이 흥건히 맺혔고, 그는 손가락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그는 지금 눈에 맺히는 게 눈물인지 땀인지 알 수 없어 자꾸 눈을 깜빡거렸다.
‘여기서 정체를 밝히면··· 감당해야 할 게 너무 많다.’
자신의 지위며 아버지의 과거까지··· 그는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의 손끝이 떨리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상대는 칼로 날 압도하고 있다 생각하겠지만, 결정권은 자신에게 있다는 걸 상대는 모르고 있었다.
‘그냥 방아쇠 한 번만 당기면 모든 게 해결된다···’
벼랑 끝에 몰린 쥐처럼 태진에게 남은 선택은 하나뿐 없어 보였다. 상대는 꽤나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의 사람이지만, 태진은 건강에 그리 좋지 않은 아버지의 남은 평생을 감옥에서 지내게 할 수는 없었다. 끝내 그는 결정을 마쳤고, 결국 눈을 꼭 감았다.
“과장님, 제가 과장님께 큰 실수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뒤에서 통역관 기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형원은 물론 태진 또한 놀라 의아한 표정으로 그쪽을 바라봤다.
“대위님이 오늘 처음 오신 분이고, 아까 뭔가 저와 행정관이 출장에 따라가는 걸 석연치 않아 하셔서 제가 경비대에 미행을 몰래 요청했습니다. 근데 이렇게 바로 눈치채시다니, 역시나 예리하시네요.”
“뭐라고요?”
“노파심에 한 행동인데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노여움은 푸시고 이만 무기를 내려주시면 어떠실까요?”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에 어안이 벙벙한 형원은 무기를 내려놓고 기영을 노려봤다. 그러나 출장에 가서 꽤나 눈치를 봐야 할 수도 있는 사람인데 함부로 할 수 없겠단 생각에 빠르게 마음을 고쳐먹었다.
“흠. 뭐, 네. 이해합니다. 그러실 수 있죠. 일이니··· 뭐, 충분히 이해합니다.”
들고 있던 칼을 정리해 주머니에 다시 넣은 형원은 태진에게 형식상 건조하게 미안함을 표현했다.
“어찌 됐든 간에 죄송합니다. 근데 최근에 어디서 저희 뵌 적 있지 않나요?”
“그런가요? 저는 초면인 듯한데··· 저도 아무튼 간에 죄송하게 됐습니다.”
엔도 총감과 그 난리를 칠 때 옆에 자신이 있었단 걸 상대가 알아본 눈치였으나 그는 급하게 이를 발뺌했다. 굳이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일을 빨리 수습하고 싶었던 기영은 태진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멀어지는 둘을 보며 형원은 씁쓸함에 담배를 물었다.
“이런 게 사회생활이란 건가? 기분 참 더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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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한 표정으로 터벅이며 걷던 태진을 바라보며 기영은 무슨 말을 먼저 던질지 고민했다. 상대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짐작이 안 됐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과연 뭘 알고 형원을 미행한 거지? 서류를 훔친 게 이들이란 걸 아는 건가?’
기영이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 중에 헌병대장 태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근데 어찌 알고 거길···”
“사무실에 있는데 대장님이 건물 앞에 서성이시다가 저 남자가 나가는 걸 따라가시길래 호기심에 따라와 봤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이러려고 따라갔던 건 아니었으니··· 근데 혹시··· 저한테 문의하셨던 사건과 그 사람이 관계가 있는 건가요?”
“아,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실은 아까 그 자가 이전에 제가 담당하는 일본 관료를 폭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경찰서에서요. 그래서 혹시 몰라 위험 요소가 있는지 해서 감시 중이었습니다.”
태진은 엔도에게 협박받았단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름 사람들에게 입소문이 난 종로경찰서 사건으로 둘러댔는데, 기영이 눈을 반짝이며 그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아··· 엔도 총감을 손봐줬단 사람이 그럼?”
“네, 맞습니다.”
“경호 인원이 꽤 많았었다고 하던데? 그 자 혼자 그 인원을 뚫은 건가요?”
“경찰서 내부라 그땐 인원이 얼마 없었어요. 그래도 격투 실력이 엄청나긴 하더라고요. 그렇게 빠른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긴 하군요. 여러 가지 면에서. 앞으로 쉽지가 않겠네요.”
“네? 뭐가요?”
형원이나 진에게 훔친 장부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는 기영은 이들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이를 과연 자신이 잘 빼돌릴 수 있을지 난감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는 태진 앞에서 이런 고민을 티 낸 것 같아 그는 아차 싶었다.
“아, 같이 출장을 가거든요. 행정관님 모시고. 아시잖아요. 실무자와 관리자의 갈등, 뭐 이런 거 때문에요.”
“네, 근데 혹시 저번에 부탁드린 건 잘 전달이 되었을까요?”
“뭐··· 그거··· 전달하긴 했는데, 아직 뚜렷한 답이 없네요. 오늘 들어가서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이를 찾기 전까진 엔도 총감이 일본으로 안 돌아간다고 해서요. 결정 나는 대로 연통 한 번 주십쇼.”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저번에 약조한 그 금액은 일이 잘 해결되면 받을 수 있는 거겠죠?”
“그럼요. 총감이 그 금액 준비하겠다고 했습니다.”
“생긴 건 쥐새끼처럼 쪼잔하게 생겼는데 성격은 시원시원한가 보네요. 이런 말 죄송하지만 그놈이 얻어터졌단 이야기 들었을 때 속이 좀 시원했습니다. 쓸데없는 말이 길었네요. 놀라셨을 텐데 일찍 들어가세요.”
통역관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태진 대장도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나보다 속이 더 시원했을라고···’
**엔도의 집**
자신의 집 거울 앞에서 엔도는 이전에 형원에게 맞아 붙였던 거즈를 떼고 있었다.
“누가 내 욕을 하나. 귀가 뭐 이리 간지럽냐.”
그는 귀를 한 번 후빈 뒤 다시 거즈를 떼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살짝 열어본 뒤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자 그는 열었던 거즈를 다시 붙였다.
“이런 젠장, 내가 돌아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수모는 꼭 되갚아주겠다.”
총감이 이 자리까지 오면서 이런 수치를 처음 겪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는 항상 받은 건 되돌려준다는 생각으로 50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다.
은혜를 입은 건 보답했고,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에겐 똑같이 갚아주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렇게 팔, 다리가 다 잘린 상태에서 여기를 떠나기 직전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 보니 그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계십니까? 총감님.”
“그래, 들어와라.”
“접견실에 전화가 와 있습니다. 총감님께서 직접 받아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길 듣자마자 엔도는 빠르게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
“누구 전화냐?”
“아랫지역인 것 같습니다.”
“알았다. 주변에 사람들을 다 물려라.”
그는 속도를 좀 더 올렸고, 신발을 벗지도 않은 채 접견실에 들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엔도 총감이다. 말해라.”
“안녕하세요, 총감님. 잘 지내셨습니까?”
“지금 한가로이 안부나 물을 때가 아닌 듯하구나. 알다시피 장부를 도둑맞았다. 물건은 다 옮겼느냐?”
“마땅한 장소를 물색 중이라 아직 일부만 옮겨진 상황입니다.”
그의 대답에 총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수화기를 귀에서 잠시 뗀 뒤, 심호흡을 크게 한 뒤 말을 이었다.
“그래. 마땅한 자리 잡기가 쉽지는 않을 게다. 그래도 최대한 빨리, 신속하게 옮겨놔야 한다. 하나라도 걸리게 되면 큰일이니 말이다.”
그는 주변을 한 번 더 돌아본 뒤 다른 사람이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거기 놈들한테 돈을 쥐어주든, 몰래 죽이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잘 옮겨놔야 한다. 아니면 네 놈 목숨을 내놔야 할 거다. 알겠나?”
[독립운동가 인물 평전]
민긍호(閔肯鎬, 1869~1907)
강원도 춘천 출신의 의병장으로, 을사늑약 체결 후 1906년 영월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관군을 공격하였다. 강원·충청 일대를 무대로 활동하며, 원주·제천·충주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였다. 특히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후 해산 군인과 연합하여 세력을 확대했으나, 같은 해 12월 원주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했다. 그의 부대는 이후에도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갔다.
*출처 :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