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 협박
**미군정청**
“지금 상황에서 최선은······ 저도 이걸 원하는 건 아니지만···. 형원이를 불러 팀을 꾸려 몰래 일을 진행시키는 편이 최선일 듯합니다.”
“불러와서. 그다음엔?”
사령관은 진을 뚫어져라 쳐다봤고, 진은 이 말을 하는 게 내키지 않는지 아랫입술을 깨물며 범석의 시선을 회피했다.
“아니, 그러지 말고 속 시원하게 말을 좀 해보게.”
“하···. 이래도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허참!! 되는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하겠네. 우선 말해보게.”
진은 입을 꾹 다문 채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이래도 될지 모르겠지만··· 미군에 말해서 남쪽 도서 지역 인구 및 실태조사를 실시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쪽 지역은 아직 제대로 된 파악이 안 돼 있어 행정처리나 세금 징수 등이 취약한 상황입니다. 이를 빌미로 조직을 구성하고, 그 조직의 리더를 형원이로 임명하는 거죠.”
“음.. 그럼 형원이한테 실태조사를 하는 척 이 지도의 좌표에 있는 보물을 찾으라고 하자는 건가?”
“네··· 근데 갑작스러워 미군이 아마 의심을 할 것 같긴 합니다.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형원이가 위험해질 수도···”
그의 막무가내인 성격을 알기에 범석은 이 일이 그에게 상당히 위험할 거란 걸 너무도 잘 알았다. 그래서 그에게 이 일을 맡기는 게 망설여졌다. 그러나 딱히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자네가 그놈에게 한 번 잘 이야기해 보게. 보다 만화 한다고 하겠지.”
“네, 그 녀석은 그러겠죠.”
“무조건 조심히 진행해야 한다고 꼭 당부하게. 아니면 내 자리가 날아갈 수도 있다고 겁을 좀 주게나.”
**엔도 총감의 집**
경비대장 태진은 집으로 돌아가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온갖 인종차별과 언어 장벽에 허우적대며 외로움과 자멸감에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던 미국 유학 생활에서 그는 단 하나의 생각밖에 없었다.
나라가 해방되어 하루빨리 되돌아가는 것. 그리되면 이곳을 떠날 수 있고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 그 희망이 없었다면 그는 오래전에 그곳에서 지옥의 불구덩이를 도망치기 위해 시카고의 트리뷴 타워 꼭대기에서 떨어져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저는 대장님처럼 좋은 환경에서 영어를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방에서 통역관이 한 이 말이 자꾸 신경 쓰였다. 그 역시 미국 생활이 또 다른 전쟁터였기에, 예의를 차린 이 비아냥이 너무나 거슬렸다. 그러나 민감한 부탁을 하는 자리였기에 그는 꾹꾹 화를 참아냈다.
어찌 됐든 그토록 염원하던 독립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고국행 비행기를 탔고, 나랏일에 지원을 했다. 유창한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바로 지휘관의 자리로 배정도 받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첫 임무는 그가 그토록 증오하는 일본인을 경호하는 일이었다.
심지어 놈은 첨부터 그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고 그걸 빌미로 이용하기 위해 태진을 부른 것이었다. 결국 그는 지금 일본 놈을 지키고 있으며, 친일파 놈들의 안위까지 보호해주고 있는 꼴이 되었다.
“하··· 진짜 거지 같네··· 젠장”
“뭐가 그리 거지 같은가?”
상황이 어찌 되어가는지 초조함에 문 앞에서 태진을 기다리던 엔도는 대문을 들어서며 그가 뱉은 혼잣말을 듣고 시비를 걸었다.
“몰라도 된다.”
“나갔던 일은 잘 해결되었느냐?”
“우선 부탁은 했다. 그가 보수를 요구했는데, 자, 확인해 봐라.”
태진은 다방에서 받은 꼬깃한 쪽지를 주머니에서 꺼내 전했다. 대충 금액을 훑어본 엔도는 가소롭다는 듯 다시 상대에게 쪽지를 돌려줬다.
“네 놈들은 참 돈을 밝힌단 말이지. 그러면서 선비인 척, 고귀한 척. 구역질 나게. 알았다. 준비해 주마.”
아직도 자신의 속국인 양 한국인을 모독하는 발언을 일삼는 엔도를 단칼에 베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태진의 마음속에 들끓었지만, 자신의 임무에 반하는 행위이기에 그는 화를 참고 또 참았다. 그렇지만 그는 섬뜩한 경고를 잊지 않았다.
“잊었나 본데, 네 놈 목만 날리면 내 아버지의 과오를 들출 사람은 없다. 그리고 마침 나에겐 총과 칼 둘 다 있고. 그러니 나불거릴 때 조심하는 게 좋은 거다.”
증오로 가득한 상대방의 눈을 본 엔도는 순간 그 기에 눌려 얼어붙었다. 공갈이란 걸 알면서도 자칫 한 번 더 건드렸다간 혹시나 어찌 될지 모를 만큼 태진의 표정이 진지했기 때문이다.
잠시 멈칫하며 쭈뼛대는 사이, 그에겐 다행히도, 부하 한 명이 급히 와서 경비대장의 눈치를 살짝 보더니 귓속말로 조심히 말을 건넸다. 그는 바로 노덕수에게 은밀한 거래를 제안했던 아베 경감이었다.
“미쓰라가 어떤 단체에 잡혀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총감님을 욕보인 그놈은 그냥 풀려났습니다.”
“뭐!”
좋지 않은 소식을 듣자마자 엔도는 경감을 째려보며 짜증을 냈고, 총감의 반응에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멍청한 놈. 자신만만해하더니. 알았다. 이만 가보거라.”
아랫것이 멀어지는 걸 확인하며 엔도가 조용히 헌병대장에게 제안을 했다.
“저번에 경찰서 앞에서 날 때린 놈 기억하나? 그놈을 처리해라. 네 아비 일이 내 입 밖으로 나오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네 보호 대상인 날 죽일 생각 말고.”
“미친놈. 네 놈이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고향으로 가고픈 게로구나. 헛소리 마라.”
총감의 짜증 나는 협박을 무시하고, 경비대장 태진은 자리를 떠났다. 상대가 듣든 말든 총감은 끝까지 자기가 하고픈 말을 했다.
“잘 생각해 봐라. 지키고픈 게 많다면. 그놈 이름은 최형원이다.”
태진은 그의 얼굴이 생생히 기억났다. 그날, 총감을 지키는 초라한 자신과 달리 목숨을 걸고 성난 야수처럼 달려들던 그의 모습에 이미 감명받았기 때문이다. 실은 그래서 그 순간 달려오는 그를 급히 막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런데 그를 죽여야 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아주 잠깐 형원이란 그 남자를 어찌 처리할지 생각했다. 그러다 생각을 고쳐먹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하··· 썅···.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냐···”
**미군정청 - 체육관**
“바쁜데 왜 사람을 오라 가라야. 나랏녹 좀 먹는다고 다른 사람들 다 네 밑으로 보는 건 아니지?”
오랜만에 진의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달려온 형원은 나름 티를 안 내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으며 약속 장소의 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겨누기나 할까 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여유로운 척하는 친구의 뻔한 모습이 웃겨서 피식 웃으며 진은 준비한 도복을 형원에게 던졌다.
“넌 맨날 지면서 뭘 자꾸 하재.”
“친구 이겨 먹어서 뭐 하게. 이기려고 하는 거 아냐. 훈련으로 하는 거지.”
잠시 후, 도복으로 갈아입은 형원이 어슬렁어슬렁 진에게 다가오며 그를 도발했고, 진은 그런 도발을 쿨하게 응수했다.
둘은 서로에게 예를 갖춰 절한 뒤 자세를 잡으며 공격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그러다 형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 하고파서 급히 부르셨는가?”
“뭐, 그 이야기는 천천히 해도 되지 않나?”
“무슨 부탁할지 알 것 같은데, 나 그거 안 해.”
제안을 하기도 전에 들은, 예상치 못한 친구의 거절에 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할 말을 잃은 그는 대결을 위해 잡았던 자세를 풀고 형원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독립운동가 인물평전]
유동열 (柳東悅, 1873~1940)
충청북도 충주 출신으로, 구한말 학자이자 독립운동가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 법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독립운동 조직인 신민회와 대동보국단 등에서 활동하며 항일 투쟁을 펼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옥고를 치렀고, 해방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출처 :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