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 논의
**시내 다방 (회상) - 약 10년 전**
“그거 하다 잡히면 네가 그리 아끼는 네 동생들과 애미도 다칠 수 있다. 내가 너 그거 하고 있는 걸 안다는 건 뭘 의미하겠느냐.”
“······.”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던 태진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복잡한 상황에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그런 아들에게 아버지는 봉투 하나를 손에 쥐어 주며 자리를 떠났다. 나가기 전 그는 아들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그를 위로했다.
“미국으로 가서 공부부터 하거라. 나중에 너의 세상이 오면 그때 돌아와 너 하고픈 걸 하면 되지 않느냐.”
**시내 다방 (현재)**
“안녕하십니까!”
“······”
“대장님, 안녕하십니까!”
“어. 네. 오셨군요. 앉으시죠.”
만나기로 한 일행이 나타나 여러 번 그를 부르자 그제서야 태진은 옛날 생각에서 벗어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미군정청에서 통역을 담당하고 있는 양기영이라 합니다. 대장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오늘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혹시 어떤 이유로 오늘 절 뵙자 하신 걸까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용건을 꺼내려했던 태진은 상대가 본론부터 시작하길 원하자 어찌해야 할지 약간 고민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말을 꺼냈다.
“말씀드리기가 좀 조심스럽지만, 제가 지금 엔도 전 총감의 경호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의 집에 어제 도둑이 들었습니다.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제 불찰입니다.”
“혹시 귀중품을 잃어버리셨나요?”
이제 진짜 본론을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이라 태진은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했다.
“실은··· 재산은 어차피 다 환수되는지라 큰 미련이 없을 텐데··· 문제는··· 침입자가 다른 건 손도 대지 않고··· 장부를 훔쳐갔습니다.”
“어떤 장부일까요?”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실은 행정기관에서 급여가 오고 간 내역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요.”
태진의 마지막 한마디에 통역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와··· 이건 진짜···. 와··· 근데 제가 뭘 도와드려야 할까요?”
“통역관님은 친일파들이 다 색출되어야 한다고 보시나요?”
“지금 해방된 이 상황에선 그렇지 않나요?”
“전 그냥 기영 씨의 생각을 묻는 겁니다. 대부분의 지배적인 의견이 아니라요. 지금 미군의 입장에서 가장 가깝게 일하시는 통역관으로서의 생각이요.”
상대의 허를 찌르는 질문에 기영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다급한 쪽은 자신이 아니기에 최대한 뜸을 들여 천천히 답을 했다.
“앵무새처럼 말이나 전달하는 제가 뭐라고 그런 걸 물어보시는지···.”
“혹시나 불편하셨다면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그냥 미군정에 계시고, 그들 가까이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으시니, 이 상황에 대해 어찌 생각할지 궁금해서 여쭸습니다.”
그 사이 주문한 커피가 나왔고, 기영은 향을 한 번 음미하더니 천천히 한 모금을 홀짝였다.
“이게 참 묘하더라고요. 향이 좋아 처음 마셨을 때 그 쓴맛이 꼭 거무튀튀한 색깔처럼 탄 맛 같기도 하고 그랬는데, 자꾸 마시다 보니 중독된 건지 지금은 참으로 맛나죠.”
“그쵸. 근데 미국에서 마시던 그 맛이 나지는 않아 참 아쉽더라고요.”
“아, 네. 아무튼 제 생각엔 미국의 입장에선 친일파들을 꼭 걸러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 사람들도 지금이야 원수 같고 눈엣가시 같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커피 쓴맛처럼 익숙해지고 잊혀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너무나도 씁쓸한 답변에 입꼬리를 올려 웃는 척했지만 마음 편히 웃을 수는 없었다. 결국 진정한 우리나라의 편은 우리 말고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아··· 그렇다면 미군정 측에서 이걸 찾는 데 도움을 좀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강경파 손에 이 장부가 들어가면 일이 크게 번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근데 대장님은 왜 이게 공개되는 걸 원치 않으시는 건가요?”
이번에는 상대의 불편한 질문에 경비대장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을 부탁하는 입장에서 답을 안 하고 넘어가면 안 될 듯하여 그는 생각해 둔 변명거리를 풀었다.
“봉급 받고 일하는 처지에 원하고 원치 않고가 있겠습니까··· 어쨌든 제가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곳에서 임무를 제대로 못 한 거니까 제자리로 되돌리려는 것뿐입니다.”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잘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미국 어디 계셨었나요?”
“저는 시카고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혹시 통역관님은 어디 계셨었습니까?”
질문을 받은 기영은 답을 하지 않고 옆에 놓인 펜과 종이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상대방의 예상 못 한 행동이 의아한 태진은 그가 적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는 대장님처럼 좋은 환경에서 영어를 배우지 않았습니다. 어릴 적에 부모님이 절 일본 놈들에게 팔았고, 그들은 절 하와이 농장에 넘겼습니다. 그래서 전 지금도 풍족하지 못합니다. 임무에 성공했을 때와 실패 시의 보수를 적어놨으니 금액 확인 부탁드립니다.”
**미군정청 - 총사령관실**
형원에게 받은 장부를 만지작거리며 이를 어찌 처리할지 고민하던 총사령관은 고민 끝에 내부에서 제일 믿을 만한 진을 불렀다. 그는 한참을 살펴보더니 범석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독한 놈들이라 생각했지만, 진짜 끝까지 너무하네요.”
“그치. 자네 생각은 어떤가? 미군정청에 보고해서 같이 처리해야겠지?”
“음··· 제 생각엔 친일파들 처리 부분은 정이형 대장 쪽에서 진행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미군은 우리처럼 친일파 척결이 필수적이라고 보지 않을 겁니다. 내부에 일하는 인원들도 있고, 괜히 시끄러워질 거라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건 내 생각도 그렇네. 그럼 숨겨놓은 보물에 관련해서는 어떤가?”
진은 이 부분에 대해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다시 수첩과 지도를 확인했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알겠지만, 우리가 단독으로 움직이는 건 한계가 있어. 그리고 한꺼번에 이 지역들을 수색해야지 시간차를 둔다면 놈들도 눈치를 채고 이를 다른 곳으로 옮길 거야.”
“총감이 이 수첩이 없어진 걸 알았다면 이미 손을 썼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
“그리고 미군에 알려 이를 공론화시킨다면, 아마도 놈들은 계획했던 것보다 빠르게 움직이려 할 겁니다.”
자신도 비슷하게 생각했던 터라 범석은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망설였다. 진 역시 사령관이 이런 부분에 고민을 하고 있단 걸 알았기에 뚜렷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 눈치 안 보고 우리 주도로 나라를 이끄는 상황이라면 쉽게 처리할 수 있을 텐데··· 참 안타깝구만···”
“지금 상황에서 최선은······ 저도 이걸 원하는 건 아니지만···. 형원이를 불러 팀을 꾸려 몰래 일을 진행시키는 편이 최선일 듯합니다.”
“불러와서. 그다음엔?”
사령관은 진을 뚫어져라 쳐다봤고, 진은 이 말을 하는 게 내키지 않는지 아랫입술을 깨물며 범석의 시선을 회피했다.
“아니, 그러지 말고 속 시원하게 말을 좀 해보게.”
“하···. 이래도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허참!! 되는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하겠네. 우선 말해 보게.”
진은 입을 꾹 다문 채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이래도 될지 모르겠지만···”
[독립운동가 인물열전]
최석순 (崔錫淳, 1884~1957)
평안남도 평양 출신으로,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의열단과의 연계를 통해 국내 진공작전을 지원했다.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으며, 교육 계몽에도 힘썼다. 해방 후에도 민족 교육과 사회운동에 이바지했다.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출처 :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