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 장부
**대저택 앞 - 밤 골목**
어두운 밤. 보름달 가까운 달이 떠 있지만, 구름이 많아 골목골목이 유난히 더 깜깜했다. 서울 시내 한복판의 으리으리한 엔도 총감의 저택 앞 으슥한 골목길에는 총칼을 든 군인들이 주변을 서성이며 혹시나 있을 외부 침입을 막고 있었다.
“쉿! 잠시만.”
복면을 쓴 사내 둘이 경계를 서는 군인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벽에 바짝 붙어 숨어 있었다. 경비병들이 지나가자 둘은 재빨리 수신호를 했다. 그리고 빠르게 담벼락 위로 올라갔다.
그들의 행동은 재빨랐지만 고요했다. 그러나 내려오는 과정에서 오래된 기와가 하나 떨어지며 ‘쿵’ 하고 소리가 났다.
“게 누구냐!”
갑자기 어둡던 집이 군데군데 환해졌고, 개들도 짖기 시작했다.
“넌 창고 쪽으로, 그리고 넌 후문 쪽을 살펴라. 난 총감 쪽을 확인하겠다.”
“네.”
경비대장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은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수색했다.
“후문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쪽도 이상 없습니다.”
“별다른 침입의 흔적이 없습니다. 그냥 오래된 기와장이 떨어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꼼꼼히 수색해라.”
“예, 알겠습니다.”
다들 다시 흩어지려던 그때, 개 한 마리가 마루 밑바닥을 향해 멍멍 짖어댔다.
그곳엔 방금 들어온 복면을 쓴 사내가 숨어 있었다. 그는 개 짖는 소리에 조용히 안주머니에서 총을 꺼냈다.
‘그냥 지금 쏠까? 아니면 항복하는 척 나가서 기회를 노릴까?’
그는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는 동안 개 짖는 방향을 향해 경비병들이 조심히 다가왔다.
“비켜라. 내가 확인해 보겠다.”
경비대장이 등불을 아래쪽으로 조심히 가져갔다. 빛이 조금씩 내려오는 걸 보며 그 안에 숨어 있던 사내는 숨을 죽이고 총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긴장한 탓인지 땀이 이마를 타고 눈에 흘러들어와 총을 조준하는 데 자꾸 방해가 됐다.
“첩자다. 저 놈을 잡아라.”
모든 이들이 일제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담장 밖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경비병들은 그를 따라 뛰어갔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 주변이 조용해지자 마루 아래에 있던 사내가 주변을 살피며 조심히 밖으로 나왔다. 그는 덥고 답답했는지 복면을 반쯤 내렸다. 그 사내는 바로 형원이었다.
“개새끼 때문에 개고생 했네. 잡놈의 개새끼.”
그리고 복면을 다시 올린 뒤 재빨리 서재로 들어갔다. 그는 빠르게 방 안의 서류들을 훑었다.
**어두운 골목길**
복면을 쓴 다른 한 남자는 경비병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그는 담벼락을 넘어 총감의 집에서 나와 어두운 골목길을 가열차게 달렸다. 그는 군인들을 따돌리기 위해 골목골목 방향을 계속 바꿔 가며 뛰었다.
“저기다. 흩어져서 잡아라!”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오던 적들이 골목골목으로 흩어졌다. 뒤를 흘깃 바라보고 이를 확인한 남자는 더욱 속력을 냈다.
휘리릭! 휘리릭!
그러다 갑자기 앞쪽에 적이 나타났고, 상대는 그를 보자마자 위치를 알리기 위해 호루라기를 불었다. 그는 민첩하게 방향을 꺾어 적을 따돌리려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 골목 끝에도 적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뒤를 돌아 뛰려 했지만 좀 전에 봤던 경비병이 서 있었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었다. 더 물러설 곳이 없었던 그는 바로 바닥의 돌을 집어던졌고, 이는 상대의 머리에 명중했다.
“아악!”
경비병이 머리를 웅켜쥐고 바닥에 뒹구는 사이 복면을 쓴 그는 상대의 위를 뛰어넘어 다시 도망을 시도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까 울린 호루라기 소리 때문에 적들 네댓 명이 우루루 몰려왔고, 그는 다시 멈칫하다 살짝 뒷걸음질 쳤다.
“어떤 놈이냐! 정체를 밝혀라. 다치고 싶지 않으면 순순히 투항하라.”
“웃기지 마라. 우리를 능멸하는 데 제일 앞장섰던 놈을 지키는 게 창피하지 않느냐?”
“우린 그냥 시키는 걸 할 뿐이다. 항복하지 않겠다면 무기를 들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일제히 복면을 쓴 수상한 자에게 총을 겨눴다. 총들이 일제히 자신을 향해 집중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양손을 들었다.
탕! 탕! 탕!
이때 세 발의 총성이 울렸고, 세 발 모두 경비대의 총을 명중했다. 그들은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적의 귀신같은 사격 솜씨에 당황하며 최대한 벽 쪽 끝으로 붙어 몸을 숨겼다.
적들이 혼비백산이 된 사이, 복면을 쓴 남자는 빠르게 담을 넘어 자리를 피했다. 얼마 후, 쫓고 있던 자가 사라진 걸 발견한 한 군인이 외쳤다.
“적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빨리 찾아라!”
그들은 다시 침입자를 쫓기 위해 다른 골목으로 뛰어갔다. 골목 이곳저곳에서 강아지 짖는 소리가 들렸고, 여기저기 경비대의 발소리가 멈추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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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입니다.”
아까와 좀 거리가 떨어진 동네의 정자에 혼자 서 있던 형원은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조용히 신호를 보냈다. 한 남자가 정자 쪽으로 다가왔고, 그는 다름 아닌 정이형이었다.
“아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요. 제가 덕분에 살았습니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경비병들이 꽤 많던데.”
“걱정 마십시오. 덕분에 잘 따돌렸습니다. 그나저나 뭐가 좀 있던가요?”
형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 없이 있었다. 그의 표정을 보고 이형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형원이 상대를 바라보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씩 웃더니 행낭에서 책자 같은 걸 꺼냈다.
“이게 총독부에서 쓴 장부인 듯합니다. 입금 내역을 확인하면 친일파 놈들을 찾아내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형은 명단을 이리저리 넘겼다. 다수의 이름들과 숫자들로 이루어진 내용을 보며 드디어 원수보다 더 미운 친일파 놈들을 청산할 수 있겠단 생각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러다가 그는 어느 한 장을 한참 동안 유심히 살펴보았다.
“선생님, 이것 좀 보세요. 이게 뭘까요?”
서류에는 일본어와 위·경도로 보이는 수치들이 표기되어 있었다. 둘은 이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다가 서로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엇. 이건!”
**엔도 총감의 저택**
어둠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한 새벽 어귀, 엔도는 누가 봐도 화가 난 걸음으로 서재를 향했다. 안에 들어섰을 때, 서재 내부를 경비병들이 부산스레 여기저기 뒤지고 있었다.
화가 치밀어 오른 엔도는 경비대장을 보자마자 주먹을 날렸다.
“빠가야로, 침입자 하나도 못 막아서 여기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느냐!”
그의 행동에 당황한 한 경비병이 그에게 총을 겨누었다. 그러자 경비대장은 그 경비병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아무리 그래도 이 자는 우리가 경호해야 하는 대상이다. 너의 임무를 잊지 마라.”
엔도는 계속 짜증을 내며 경비대장에게 따졌다.
“그래서 뭐가 없어졌느냐?”
“따로 이야기합시다. 너희들은 잠깐 자리를 비켜라.”
명령에 따라 사람들이 서재에서 나갔다. 경비대장은 사람들이 다 나가는 걸 끝까지 지켜본 후, 조심히 주변에 엿듣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뒤 조용히 이야기를 꺼냈다.
“어차피 재산이야 다 몰수돼 여기 두고 갈 것인데 무엇이 걱정인가?”
“묻는 말에나 답해라. 왜 창고가 아닌 서재를 뒤지는 것이냐?”
“이상한 게 있는데, 침입자는 당신의 목숨을 노리고 온 게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돈 되는 걸 훔치려고 온 좀도둑도 아니고. 다른 곳은 가지도 않고 서재에만 침입의 흔적이 있다.”
“젠장. 하···”
그 말을 듣자마자 엔도는 서랍과 책장을 빠르게 뒤졌다. 그리고 원하는 걸 찾지 못한 듯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이게 없으면 큰일이다. 이놈에게 솔직히 다 말할 수도 없고··· 난감하구나!’
그의 얼굴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수첩이 없어졌다. 거기에 총독부에서 일한 조선 놈들 돈 주고 했던 거 다 기록해 놓았는데··· 제일 없어지면 안 되는 물건이 사라졌구나.”
“그럼 거기 아버지의 이름도?”
“스즈키 말이냐? 그렇겠지?”
경비대장이 화가 나서 그의 멱살을 잡았다.
“그런 걸 보관을 잘했어야지.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내가 갈 때까지 나와 우리 집을 안전하게 지키는 건 너의 임무다. 너의 아비가 내 수하의 사람이었다는 걸 말 안 하는 조건으로 여길 잘 지켜주기로 했던 거 아니냐?”
“혹시 이런 짓을 꾸밀 만한 짐작 가는 사람이라도 있느냐?”
“그것 또한 네가 알아볼 일인 것 같은데? 누가 왜 이런 짓을 꾸몄는지 나도 궁금하구나.”
멱살을 놓으며 그는 경고를 잊지 않았다.
“조심하시오. 당신은 내가 칼을 휘두르면 닿는 거리에 있다는 걸.”
“너나 조심하거라. 네 아비의 목도 나한테 달려 있다는 거 잊지 말고.”
**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 청사 (옛 조선총독부)**
다음 날 아침, 동이 트자마자 형원은 범석을 찾았다.
“사령관님,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네가 이른 아침부터 어인 일이냐?”
“제가 어제 귀한 물건을 하나 발견했거든요.”
형원이 보자기를 꺼내 범석에게 건넸다. 그는 마지못해 보는 척, 이를 슬슬 풀어헤쳤다. 범석은 이를 보고 황당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독립운동가 인물 평전]
최동오 (崔東吾, 1884~1950)
평안남도 평양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교육자이자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이후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에는 교육과 계몽운동에 힘쓰며 조선교육협회를 조직해 민족교육의 기반을 다졌다. 해방 후에는 제헌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50년 6·25전쟁 중 납북되어 행방이 묘연해졌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출처 :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