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 친일파
**종로경찰서 - 유치장**
“아, 우리는 승전국이 아니니 일본에 아직 항복 선언을 받은 게 아니네요. 그럼 일본과 우리는 아직 전시 상황 아닌가요? 그럼 우리가 일본인을 다치게 하는 건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지 않을까요?”
이 말을 들은 형원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진을 바라봤다. 놀라고 당황하기는 나머지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얼토당토않지만 말이 되는 이 이야기에 수사과장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너무 당황스러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며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그다지 묘수가 떠오르지 않자, 아직까지 이성의 끈으로 잡고 있던 젠틀함을 놓고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아니, 미군정청에 계시면 잘 아실만한 분이 왜 이러십니까? 무슨 애들 말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빨리 조사하고 내일 돌려보내드리겠습니다.”
그때였다. 열 명 남짓의 청년들이 우르르 유치장에 들어와 범석과 진을 포박하였다. 그리고 둘러싼 사람들이 그들에게 총을 겨누었다. 갑자기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들은 아무런 조치도 할 수 없었다.
이때 뒤에서 한 남자가 빠르게 앞으로 나와 다른 일행들을 나무랐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미쓰라를 연행한다니까 왜 엄한 사람들을 포박하고 그래요?”
“죄송합니다. 혹시 연행하는 데 방해가 될까 해서.”
“아무리 그래도 포박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풀어드리세요.”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어이가 없어 범석이 짜증이 묻어난 말투로 물었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죠? 당신들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저희는 민족반역자 조사단에서 나왔고, 저는 단장인 정이형입니다.”
“네. 수고가 많으십니다. 저희는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넘어온 사람들입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하네요.”
“그러시군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선생님께는 일이 없고, 여기 노덕수를 데려가려 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이 모두 노덕수를 향했다. 그는 아까의 기세등등함이 사그라들고 눈빛이 심하게 떨렸다. 그러자 그를 따라왔던 부하 직원이 어이없어하며 화를 냈다.
“사람 잘못 알고 왔다 본데, 이분은 여기 종로경찰서의 수사과장이십니다. 그리고 몇 년 전까지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이시고요.”
“이 사람을 얼마나 봤죠? 제가 한 달 전까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었는데, 이놈은 거기 교도관으로 있었죠.”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김규식 부주석님과 상해에서 찍은 사진을요.”
“그건 조사를 해보면 알겠죠. 밀정일 수도 있었겠네요. 우선 형무소 사람들한테 뇌물을 요구한 혐의로 오늘은 체포하겠습니다. 조사관님, 체포 진행하시죠.”
친일파 노덕수는 사람들이 자신을 포박하고 끌고 갈 때까지 두려움에 벌벌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를 보던 형원이 노덕수의 앞을 막아서며 경고하였다.
“아직까지는 여기저기 붙어서 호위호식하며 살았겠지만, 이젠 쉽지 않을 거다. 내 손으로 이 나라를 다른 나라 밑에 두지 않게 끝까지 싸울 거거든.”
**종로 거리**
셋은 이형과 같이 경찰서를 나오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서 지금 배신자 놈들 조사 중이신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근데 참 쉽지 않네요. 사람들마다 말이 다르고, 누굴 믿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쵸. 다들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키고. 근데 일이 쉽지 않아 저 많은 인원 꾸리려면 활동비도 꽤 들 텐데.”
“맞습니다. 다행히 윤창식 선생님과 연이 닿아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다가 같이 하고 있는지라, 선생님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아! 윤 선생님이요! 저희도 만주랑 상해 있을 때 꽤 도움을 많이 받았었죠!”
“와! 역시!”
이형은 윤 선생님의 희생과 지원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를 이범석 사령관이 두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아무튼 고생 많으십니다. 이것도 인연인데 요 앞에서 국밥이나 한 그릇 같이 하고 가시는 거 어떠신지요.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범석의 제안에 형원이 실망했다는 듯이 삐죽거렸다.
“여기 잡혀올 때도 국밥이었는데··· 고기 정도는 먹을 줄 알았구만···”
“자네는 며칠 들어갔다 나오더니 넉살이 좋아졌구만. 보기 좋은데, 며칠만 더 있다 나올 겐가?”
“아··· 아닙니다. 국밥 가시죠. 맨날 먹어도 맛나죠, 국밥. 암요 암요.”
**국밥집**
“모처럼 사령관님 오셔서 많이 삶았습니다.”
“오~ 고기 고기~”
주모가 두둑하게 나온 삶은 고기를 상에 올려놓자마자 형원이 냅다 세 점을 한꺼번에 집어 입에 넣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넌 위아래도 없냐 이놈아. 누가 보면 몇 년 옥살이한 줄 알겠다.”
게걸스럽게 먹는 형원을 보며, 오늘 처음 본 이형에게 창피하고 낯부끄러워 범석이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니,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미안합니다. 이 녀석이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안에서 많이 배고팠나 봅니다.”
“아닙니다. 저도 저 안에서 있어봐서 너무 잘 알죠. 저는 19년간 옥살이를 했습니다.”
거의 국밥을 마시다시피 하던 형원마저도 그 말에 놀라 먹는 걸 멈췄다.
“19년이나 옥살이를 하셨다니, 정말 저희 고생은 비할 바가 아니네요. 경의를 표합니다.”
“아닙니다. 저보다 저희 가족이 더 고생했죠. 그리고 사령관님도 그렇지만 다들 목숨 걸고 투쟁해주신 건데, 저야 감옥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남이 해주는 밥 먹어가며 그렇게 지냈는걸요··· 안타까운 시간만 흘렀습니다.”
“나라를 잃어서 저희 다 고생이 많았었군요. 이제 좋은 날만 있겠죠. 대한 독립 만세!”
다 같이 대한 독립 만세를 담백하게 외치며 탁주가 든 그릇을 서로 부딪쳤다.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각자의 과거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서울 침공이 다 준비되었는데 결국 무효가 된 건 제가 다 안타깝네요.”
“그래도 뭐··· 이렇게 우리 땅에 들어와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나라를 되찾은 건데, 다행인 거죠.”
“네. 근데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걱정인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여기 계신 분들처럼 훌륭하게 독립운동하신 분들도 정치 및 행정 등에 참여해주고 계시지만, 제가 조사한 바로는 일본 앞잽이 하던 놈들도 꽤 많이 포진되어 있는 듯합니다. 아까 그 박쥐 새끼처럼요.”
조용히 이야기만 듣고 있던 진이 오랜만에 말을 꺼냈다.
“그렇네요. 일본 놈들을 밀어내니 그놈들과 한통속이었던 놈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네요.”
“그렇죠. 오랫동안 옆에서 봐왔던 일이니 일도 익숙하고, 일처리도 빠르겠죠. 미국 입장에서는 우리나라 상황도 잘 모르고, 배신자든 뭐든 우선 잘만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놈들 색출하기가 그렇게 어렵나요?”
“네. 아무래도 자료들이 확실히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다들 이해관계에 따라 말이 다르다 보니··· 그들이 뒷돈을 써서 입막음한 것도 있고요. 요직에 있는 사람들도 많다 보니 은근 압박도 많습니다. 다행히 유한양행, 동화약품 등의 민간회사가 많이 도와주고 있지만 사람도 아직은 많이 부족하고,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형원이 답답함에 탁주를 사발째 벌컥벌컥 들이켰다.
“들으면 들을수록 답이 없네요. 차라리 만주랑 상해 있을 땐 누가 때려죽일 놈이고, 누가 내 형제인지 확실했는데.”
“각 기관에 임금이나 뇌물 등이 오고 간 장부 같은 걸 보면 확실하지 않을까요?”
“네. 맞습니다. 문제는 그게 대부분 지금 기관에 없고, 일본 놈들 손에 있다는 거죠. 근데 그들을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는 상황이라···”
“그럼 그냥 쳐들어가면 되죠.”
형원의 이 말 한마디에 나머지 셋이 밥을 먹다 말고 멈칫했다. 눈치 없는 형원만 아무 생각 없이 말을 이어갔다.
“밤에 몰래 들어가서 훔쳐오면 되는 거 아니에요?”
“여러 가지 정치적인 부분들이 있어서 그게···”
“에이~ 안 들키면 되죠. 아님 혹시나 들키면 난 그냥 금은보화 도둑질하러 온 거다라고 하면 되고요. 안 그런가요?”
그제야 형원이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보니 다들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범석은 한숨을 푹 내쉬며 그를 타일렀다.
“이제 막 해방했고, 새로운 나라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네 놈은 뭔가 합법적으로, 윤리적으로 처리할 생각은 안 하는 게냐?”
“아니, 막말로, 그놈들도 조선시대 때 밤에 몰래 들어와 옥새 훔쳐서 서류 위조하고, 대놓고 나라까지 훔쳤는데 그게 뭐 대수라고 그러세요.”
해당 내용으로 오랫동안 고민을 해온 정이형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한 번 살핀 뒤 조용히 속삭였다.
“실은 저희도 들어가서 훔쳐볼까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닙니다. 아마도 행정적인 걸 총괄했던 엔도 총감 집에도 있을 듯한데. 그가 이제 곧 떠난다네요. 아무튼 그가 떠나기 전에 집을 한 번 들어가 보자는 의견이 있었거든요. 근데 아무도 가고 싶어 하지 않더라고요. 위험하잖아요. 이제 막 가족들과 만나 잘 살고 있는데, 겨우 이런 거에 목숨을 걸고 싶진 않겠죠.”
“거 사람들 참 겁 많네요. 그냥 들어가서, 걸리면 놈들 좀 때려주고. 그럼 될 것을. 에이! 모르겠다. 형씨, 저랑 같이 갑시다.”
그의 시원시원함에 이형은 미소 지었지만, 진과 범석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빤히 바라봤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고, 범석이 버럭 하며 대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오늘 그렇게 유치장을 다녀오고도 네 놈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게냐? 술맛이 확 떨어지네. 죄송하지만 무식한 이놈 때문에 저는 이만 자리를 일어나 보겠습니다.”
“야, 너, 좀··· 아무리 그래도 사령관님 앞에서··· 사령관님~ 같이 들어가시죠.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진마저 급하게 자리를 떠나자, 나머지 둘은 당황스러워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멍하니 서로만 바라봤다.
**대저택 앞 - 밤 골목**
어두운 밤. 보름달 가까운 달이 떠 있지만 구름이 많아 골목골목이 유난히 더 깜깜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으리으리한 엔도 총감의 저택 앞 으슥한 골목길에는 총칼을 든 군인들이 주변을 서성이며 혹시나 있을 외부 침입을 막고 있었다.
“하암~ 너무 졸린데. 그냥 몰래 들어가서 자면 안 되나?”
“아서라. 그러다 지휘관님께 걸리면 나까지 줄초상이다.”
“왜 우리가 이런 놈들까지 호위해야 하는 거냐고. 원수나 다름없는 놈들인데.”
“그러게 말이다. 근데 뭐 위에서 하라는데 어쩌겠냐.”
지루한 대화를 나누던 경비병 중 하나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쉿! 무슨 소리 못 들었어?”
“왜? 멧돼지라도 지나다니나? 무서운데··· 그냥 들어가자.”
“아니, 무슨 소리가 난 듯한데··· 아니겠지.”
경호를 하는 군인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복면을 쓴 사내 둘이 조용히 담벼락 위로 올라갔다. 그들의 행동은 재빨랐지만 고요했다. 그러나 내려오는 과정에서 기와가 하나 떨어지며 ‘쿵’ 하고 소리가 났다.
“게 누구냐!”
갑자기 어둡던 집이 군데군데 환해졌고, 개들도 짖기 시작했다.
[독립운동가 인물평전]
박용만 (朴容萬, 1881~1938)
평안남도 평양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미국 하와이에서 국민군단을 조직해 무장 독립운동 기반을 마련했다. 1905년 을사늑약에 분개해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박은식·신채호 등과 교류하며 계몽운동과 무장투쟁을 병행했다. 미국에서 군사훈련을 통한 독립군 양성을 시도했으며, 『군사학 교본』도 저술했다. 이후 중국과 만주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38년 중국 시안에서 사망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출처 :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