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록]1946년, 한국이 일본을 점령했다

84화 - 제안

by 팬터피

**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 청사 (옛 조선총독부)**




다음날 아침, 동이 트자마자 형원은 범석을 찾았다.




“사령관님,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너가 이른 아침부터 어인 일이지?”




“제가 어제 귀한 물건을 하나 발견했거든요.”




범석은 귀가 쫑긋해졌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오, 그래? 뭐길래 해가 뜨자마자 뛰어왔을 고?”




형원이 보자기를 꺼내 범석에게 건넸다. 그는 마지못해 보는 척, 이를 슬슬 풀어헤쳤다. 감춰져 있던 게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고, 그 물건은 바로 권총이었다.




범석은 이를 보고 황당해하며 형원을 바라보았다.




“몇 발 안 쐈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어쨌든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말이냐. 나, 나라 밥 먹는 사람이다. 총을 함부로 빌려주다니, 네 놈이 실성한 거 아니냐?”




“네네. 암요 암요. 급히 나가시며 주막에 놓고 가신 걸 제가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흠흠···이게 거기 있었구나. 찾아줘서 고맙구나.”




실은 주막에서 이형과 형원이 하는 말을 들으며, 형원을 너무나 잘 아는 범석이 급히 나가는 척하며 자리에 자신의 총을 두고 온 것이었다.




형원이 바로 실행에 옮길 거란 걸 알았기에, 그리고 말리더라도 말을 듣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그의 안전을 바라는 마음에 범석이 할 수 있는 나름 최선의 지원이 바로 이것이었다.




계속 말을 둘러대는 범석을 보며 형원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럼 전 볼 일을 다 봤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니, 볼일이 겨우 이게 다냐?”




“겨우라뇨. 장군님께 엄청 중요하신 거 아니었나요?”




“그렇긴 한데··· 뭐가 더 있을 거 같은데···”




속시원히 이야기하지 않는 형원을 범석은 괘씸했다. 자신도 이 위치가 아니었으면 그처럼 자신이 원하는 걸 시원하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뭐, 궁금해하는 듯해서 잠깐 말씀드리면요.”




어제 이형과 같이 보던 장부를 형원이 펼치자 범석은 기다렸다는 듯 장부를 훑어보며 옅게 웃었다.




'이 녀석, 결국 한 건 해내는구나. 역시.’




자세히 장부를 살펴보던 총사령관은 한참을 끝까지 보더니 형원을 바라봤다.




“우리 쪽 사람들도 좀 있는 거 같구먼. 고생이 많았네.”




“근데 이게 다가 아닙니다. 여기를 보시면···”




형원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하게 변했고, 장부의 뒤쪽을 넘겨 범석에게 보여줬다. 거기에는 이전과 달리 이름이 아닌 위치로 보이는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아까 정이형과 심상치 않게 보던 그 내용이었다.




“이게 뭘로 보이십니까?”




“음···.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는 건가?”




“맞는 거 같습니다. 정이형 단장도 같은 생각입니다.”




범석이 서랍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책상에 물건들을 주섬주섬 치우더니 한쪽에 접혀 있는 지도를 꺼내 펼쳤다.




“지도는 혹시 확인했나?”




“그건 아직 확인 못했습니다.”




둘은 장부의 내용과 지도를 번갈아 가며 살폈다. 그러면서 펜으로 지도에 표시를 하며 글을 적어가기 시작했다.




금귀걸이, 동검 7자루, 반가상, 묘비석, 청자상감, 갑옷, 금동관음보살좌상 등등, 이건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이 나라의 역사였다. 하나하나 장부의 내용들을 지도에 옮겨 적어가면서 분노가 차올라 글을 제대로 쓸 수 없을 정도로 범석의 손이 떨렸다.




한참을 다 적고 보니 다양한 종류의 보물들이 곳곳에 나뉘어 있었다. 우리나라 해안가에서 조금 떨어진 섬 위주로 곳곳에 표시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인적이 드문 여기 섬들에 유물이나 금은보화들을 숨겨 놓았다는 거지?”




“네, 그런 거 같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어쩌긴. 위에 보고하고 인원 확보해서 되찾아와야지.”




“혹시 저도 따라가도 될까요?”




“당연히 되지. 이번 기회에 군에 합류하는 게 어떻겠나?”




한국에 와서 이 권유를 처음 받는 건 아니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치 않아 매번 고사해 왔다. 그러나 이번엔 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전쟁에 지고 되돌아갈 때까지도 우리 걸 노리다니. 우리를 이렇게까지 만만하게 보는 악독한 일본 놈들에게 더욱 화가 났다.




“고민해 보고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잘 고민해 보게. 상해와 만주에서도 우리 함께 했잖은가. 앞으로 나라를 위해 할 일이 더욱 많을 걸세.”




“전쟁도 끝났는데 과연 그럴까요. 다시 전쟁이라도 나면 모를까···”




“무슨 그런 무서운 말을 하고 그러나. 군은 전쟁을 하려고 있는 조직이 아니야. 전쟁이 나지 않게 힘을 가지는 게 진짜 군의 목표지.”




“네. 솔직히 그래서 선뜻 나서지 못하겠습니다. 전 독립군도 일본 놈들 다 죽여버려서 나라를 되찾아야겠단 생각으로 했던 거라서요.”




그의 대답에 담배를 길게 내뿜은 범석은 그를 오랫동안 애처롭게 바라봤다.




“뭐··· 그들에게 가족을 잃었으니 그 마음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네. 근데 산 사람은 살아야지. 모질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부모에 자식까지 잃은 사람들도 다 살아가고 있네. 그러니 잘 고민해 보고 답을 주게.”




“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미군정을 나서 시장 저작거리를 거닐며 형원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사령관의 말이 맞다. 처절할 만큼 잔혹했던 식민지 시대에 가족을 잃은 게 어디 나 하나뿐이더냐. 다들 많은 아픔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간다. 나만 너무 유난 떠는 걸까?




그러다 목걸이를 옷 속에서 빼서 끝에 걸린 은가락지를 오랫동안 바라봤다. 누나가 귀하게 여겼던 그 반지였다. 그는 이를 바라보며 가족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날이 다시 떠올랐다. 두려움에 가족들이 다 죽어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숨어 있던 그날을···




**시내 다방**




현대식의 깔끔한 인테리어와 붉은 꽃무늬 벽지, 그리고 살짝 어두운 조명으로 고즈넉한 분위기를 지닌 조선총독부 앞 카페는 한때 일본인 손님들로만 가득했지만 이제 머리와 눈 색깔이 다른 손님들로 바뀌었다. 엔도 총감 집을 경호 중인 경비대장 우태진은 처음 와보는 곳이라 어색하게 다방의 문을 열었다. 잘 모르는 팝송이 흘러나와 처음에는 더욱 생소했지만, 뭔가 이곳이 아주 낯설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빈자리에 앉은 그는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생각해 보니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한 번 온 적이 있는 곳이었다. 그때 앉은자리도 딱 이 자리였다.




**시내 다방 (회상) - 10여 년 전**




아버지의 부름으로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 고등학생 태진은 문 밖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던 이국적인 내부 분위기에 큰 이질감을 느꼈다. 내부는 팝송이 아닌 그 시절 유행했던 엔카 노래가 흘러나왔다. 태진은 경찰 제복을 입고 커피를 음미하며 자신을 기다리는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오래 걸렸구나.”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우선 앉아라.”




“집에서 말씀하시지···”




“둘만 따로 할 이야기가 있어 불렀다.”




아버지의 요청에 그는 자리에 앉았지만, 뭔가 이곳에 있는 게 상당히 불편했다. 항상 엄격하신 분이라 안 그래도 어릴 때부터 그리 오래 대화를 한 경험이 없는데, 이런 곳에 단 둘이 앉아있으려니 참으로 막막했다.




한참을 커피를 마시며 별말을 안 하던 그의 아버지는 잔을 내려놓으며 한마디를 건넸다.




“요즘 집에 잘 안 있는다고 들었다. 늦게까지 뭐 하고 다니는 게냐?”




“주로 혼자 사는 친구 집에서 같이 공부합니다.”




태진의 말에 아버지가 코웃음을 쳤다.




“이래 봬도 내가 10년 넘게 경찰 일을 했다. 그 따위 거짓부렁에 내가 속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언제부터 저한테 관심이 있으셨다고···”




“뭐? 허참··· 그래. 이렇게 둘이 있으니 들어나보자. 뭐가 불만이냐?”




“그런 거 없어요.”




아들이 별다른 말을 안 하자 답답한 아버지는 살짝 분기가 치밀었다. 자신의 모든 인생을 처자식을 위한 희생 했는데, 언제부터 이리도 멀어졌을지 곰곰이 생각했다.




“넌 이 애비에게 고마움은 없냐? 여기 한양에서 제일 좋은 고등학교 보내주고. 졸업하면 일본에 유학도 보내준다 했잖냐. 이런 게 어디 당연한 줄 아냐?”




“아버지”




“그래.”




“전 이런 거 해달라고 한 적 없습니다. 심지어 이렇게 나라의 원수들에게 붙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는 분들 잡아넣는 일 하면서까지요.”




“뭣이라!”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 아들의 뺨을 때리려다 주변의 보는 눈을 의식해 다심 조심히 자리에 앉았다.




“무무··· 무.. 뭐··· 내가··· 나 혼자 잘 먹고 자··· 자.. 잘 살자고 이러는 줄 아냐?”




화를 꾹꾹 참아가며 말하느라 말까지 더듬는 아버지를 보며 태진은 괜한 말을 했구나 싶었다. 그래서 그는 떨리는 손을 꾹 눌러 잡은 채 화를 누르며 다른 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래,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너도 나중에 부모가 되면 이 아비를 조금은 이해할 거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다 손이 떨려 다시 내려놓은 아버지는 주변을 한번 훑어본 뒤 조용히 원래 하려던 이야기를 속삭였다.




“야간어학당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 들었다. 그만두거라.”




“그런 거 안 합니다 아버지. 그 일로 부르신 거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더 이상 대화할 가치가 없다고 느낀 태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때 아들을 한심한 듯 바라보며 아버지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거 하다 잡히면 니가 그리 아끼는 니 동생들과 애미도 다칠 수 있다. 내가 너 그거 하고 있는 걸 안다는 건 뭘 의미하겠냐.”




“······”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던 태진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복잡한 상황에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그런 아들에게 아버지는 봉투 하나를 손에 쥐어주며 자리를 떠났다. 나가기 전 그는 아들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그를 위로했다.




“미국으로 가서 공부부터 하거라. 나중에 너의 세상이 오면 그때 돌아와 너 하고픈 걸 하면 되지 않느냐.”




[독립운동가 인물 평전]




김상옥 (金相玉, 1890~1923)




서울 출신의 의열단원으로,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제의 포위망을 피해 도심을 누비다 자결한 대표적 무장 독립운동가다. 그의 투쟁은 영화 '밀정' 속 박희순이 연기한 ‘김장옥’ 캐릭터 설정의 모티브가 되었다. 현재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출처 :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영화 밀정 제작 관련 보도자료, 서울시 동상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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