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 겨루기
**미군정청 - 체력단련실**
둘은 서로에게 예를 갖춰 절한 뒤 자세를 잡으며 공격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그러다 형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 하고파서 급히 부르셨는가?”
“뭐, 그 이야기는 천천히 해도 되지 않나?”
“무슨 부탁할지 알 것 같은데, 나 그거 안 해.”
제안을 하기도 전에 들은, 예상치 못한 친구의 거절에 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할 말을 잃은 그는 대결을 위해 잡았던 자세를 풀고 형원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끝!”
앞의 친구가 넋이 나간 걸 단번에 파악한 형원은 그의 주특기인 돌려차기로 진의 턱을 노렸고, 발끝이 상대의 귀에 닿을 듯 말 듯한 곳에서 공격을 멈췄다.
“너 이거 맞았으면 바로 염 냄새 맡았다.”
형원의 장난 섞인 말에 진은 그의 거절이 자신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기 위한 방해 공작이란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가볍게 손등으로 발을 밀어낸 뒤 다시 자세를 잡았다.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가 발차기를 하셔도 이거보단 빠르겠다. 맞아도 별 타격이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둔 거야.”
“오! 평소 겸손만을 가르치시던 선비님이 오늘 웬일로 허세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형원은 카프킥을 시도했지만 진은 발을 들어 피한 뒤 바로 옆차기로 상대의 복부를 노렸다. 그렇지만 이를 눈치챈 형원은 바로 뒤로 빠지며 거리를 벌렸다.
“근데 무슨 부탁이 있긴 한가 봐. 아까 당황한 거 보면?”
“집중해라. 두 번은 안 당한다.”
오른쪽 주먹을 꽉 쥔 진은 형원의 얼굴을 향해 잽을 던졌지만 그는 이를 쉽게 피한 뒤, 짧게 주먹을 날리며 응수했다. 진은 상대의 주먹을 쳐낸 뒤, 그의 옆구리 쪽으로 발차기를 했지만 이번엔 형원이 손으로 이를 가볍게 쳐냈다.
“친구끼리 편히 이야기해.”
“말하면 들어는 주고?”
“에이! 그건 들어보고 결정해야지.”
“군에 다시 복귀해.”
“그건 싫어.”
말을 뱉는 동시에 형원이 빠르게 다가와 상대의 깃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진이 이를 가볍게 쳐냈지만 다른 손이 다시 들어왔다. 이때다 싶어 상대의 팔을 잡은 진은 바로 몸을 낮춘 뒤 엎어치기에 들어갔다.
형원의 몸이 진의 어깨를 타고 붕 떠올랐고, 진은 있는 힘껏 상대를 바닥에 내리꽂으려 팔에 힘을 줬다. 그러나 형원은 두 발로 떨어져 우뚝 섰고, 바로 웅크리고 있는 낮은 자세의 상대의 얼굴을 향해 처음의 위협적인 돌려차기를 날렸다.
아차 싶었던 진은 주먹을 꽉 쥔 채 얼굴을 보호해 겨우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힘찬 공격에 밀려 그는 뒤로 한 바퀴 굴렀고, 잘 중심을 잡아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일어섰다. 형원은 상대에게 숨 쉴 틈도 없이 바로 한발 뛰어 도움닫기를 한 뒤 날아올라 무릎으로 상대를 내려찍었다. 이를 본 진은 빠르게 옆으로 굴러 위기를 넘겼다.
“요즘 훈련 안 하니까 공격이 너무 커. 주먹도 다 보이고.”
“간신히 피해 다니면서 입만 살았네.”
상대의 도발에 주먹을 불끈 쥔 진은 상대의 얼굴을 노리려고 팔을 크게 휘둘렀다. 큰 동작에 빈틈이 보인 형원은 잽을 날려 진의 인중을 노렸다. 그때, 진은 고개를 숙여 머리로 그의 주먹을 받았다.
“아!”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형원이 주먹을 움켜쥔 사이 진은 옆차기로 상대의 복부를 세게 찼다. 그는 이 충격에 뒤로 구르며 내동댕이쳐졌다. 맞은 곳을 아파하며 천천히 일어난 형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오! 요즘 훈련 많이 하나 봐? 왜? 나 한번 이겨보려고?”
“넌 상당히 별로인데? 아까 말 취소할게. 이 정도면 군 복귀는 못 하겠다.”
진의 도발에 눈빛이 확 달라진 형원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와 주먹을 날렸다. 워낙 빠르고 무거운 주먹에 스치듯 피한 진 역시 주먹을 뿌렸고, 형원은 가드를 올려 이를 막았다. 서로의 주먹이 여러 번 오가던 중 진의 주먹을 피하지 않고 얼굴로 그냥 맞은 형원은 그에게 달려들어 오른팔로 그의 목을 감쌌다.
당황한 상대의 기운을 눈치챈 형원은 짐승과 같은 감각으로 발을 걸어 진을 넘어뜨린 뒤, 균형을 잃은 상대의 목을 졸랐다. 진은 힘을 줘 목을 짓누르는 팔을 벌리려 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만 포기해. 오늘도 졌어!”
그런데 갑자기 진이 아무 대답도 없이 갑자기 힘이 쭉 빠졌다. 친구의 상태에 당황한 형원은 팔의 힘을 풀고 다급히 그를 눕히고 흔들었다.
“야! 정신 차려! 일어나!!”
그때, 누워있던 진이 눈을 번뜩 떴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있는 친구의 목을 졸랐다. 자신이 당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아! 졌어. 풀어.”
목이 감기자마자 바로 형원은 포기 신호를 보냈다. 친구의 요청에 진이 바로 힘을 풀자 주먹으로 팔뚝을 세게 때리며 헛기침을 연발했다.
“켁! 켁! 야. 이건 반칙 아니냐고.”
“어쨌든 진 거니까 소원 들어줘.”
“뭐? 그런 말은 한 적이 없는데?”
“야. 너랑 나랑 기억력 누가 더 좋아.”
“그건··· 너지?”
“그럼 내 말이 맞겠지?”
하지도 않은 약속을 했다 우기며 진은 거짓말을 시전했다. 그게 뻔히 보였지만 형원 역시 친구가 이렇게까지 하는 부탁이니 한번 넘어가주자 싶어 강하게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뭐. 니가 맞겠지. 뭔데? 말해봐.”
“아까 말했잖아. 다시 군대로 돌아와. 총사령관님 좀 도와주고 해.”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 형원이 친구를 일으켜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가 형원의 손을 잡아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나려 할 때 갑자기 잡고 있던 손이 풀렸고, 진은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 야. 장난하냐!”
“하하. 반칙 쓴 복수. 자. 잡아.”
다시 내민 친구의 손을 잡고 일어서려는데 형원이 다시 장난으로 손을 풀었다. 그러나 이미 눈치채고 있던 진은 재빨리 자세를 고쳐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또 안 속는다, 이놈아.”
“올~ 제법인데! 근데 나도 또 안 속아! 일본 놈들한테. 그래서 할 일이 있어서 군에는 지금 못 가.”
“사령관님께 다 들었어. 네가 그거 할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줄게. 대신 조심히 행동한다고만 약속해 줘.”
“뭐? 어떻게? 내가 당연히 조심하지!”
한숨을 크게 한 번 내쉰 진이 형원의 어깨를 툭 잡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진짜 조심해야 해. 너뿐만 아니라 사령관님 목숨도 달린 일이니까.”
**미군정청 - 행정실**
한편, 아까 경호대장 태진과 만났던 통역관 기영은 부탁받은 내용을 어찌 처리할지 고민 중이었다. 자신은 통역 외에 실무에 권한이 없으므로 사라진 수첩을 수색하는 것에 대해 제안했을 때 과연 미군이 자신의 편을 들어줄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너무 호기롭게 보상을 요청한 건 아닌지 후회가 되기도 했다.
“헤이, 기영! 혹시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왜 그리 안 좋아?”
“아, 아닙니다. 점심 먹은 게 좀 별로였나 봐요.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답답한 마음에 그는 밖으로 나왔다. 그러다 강당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그곳을 조심히 바라봤고, 겨루기를 하는 두 사람이 보였다.
‘오! 진짜 멋있게 싸운다. 같은 남자가 봐도 멋지구만.’
그렇게 멍하니 둘의 격투기를 감상하는데, 뭔가 알 것만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그는 좀 더 귀를 바짝 기울이고 둘의 대화에 집중했다.
“새로운 조직을 만들거고 거기를 네가 담당하게 될 거야. 도서 벽지 외진 지역 조사 업무를 할 거고. 훔친 장부에 적힌 곳들은 그 일을 하면서 몰래몰래 진행하면 돼.”
진이 하는 말을 들은 통역관 기영은 눈이 반짝였다.
‘훔친 장부라고? 그래! 네 놈들이구나. 근데 무슨 지역 조사를 말하는 거지?’
[독립운동가 인물 평전]
홍병기 (洪炳基, 1888~1918)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신민회에 가입해 본격적인 비밀결사 활동에 나섰다.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만주로 넘어가 서간도 삼원보에서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운영에 기여했다. 무장독립운동의 인재 양성에 힘썼고, 이후 간도 지역 독립군 조직에도 참여했다. 1918년 병사했으며,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출처 :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