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다시 만난 티즈가
엄마, 안녕?
내가 여기 왔던 날이 까마득할 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네.
처음 혼자 여기 왔을 때는 집 생각 많이 났는데
금세 적응해서 매일 소풍날처럼 신나게 지내느라
사실 가족들 거의 잊고 지냈거든.
그러다 올봄에 할머니 다시 만나고부터 엄마 생각이 자주 났어.
할머니 걱정은 하지 마.
여기는 도착하자마자 아픈 게 싹 사라지는 곳이거든.
내가 할머니 안내해서 같이 여기저기 쌩쌩하게 잘 다니고 있어.
엄마, 우리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해?
엄마가 나를 선택했다고 생각하지?
아냐, 내가 엄마를 선택한 거야.
난 그즈음 오래 가족을 못 찾아 시무룩했는데
엄마를 보자마자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 안에 감춰진
말랑말랑한 마음을 바로 알아봤어.
그래서 엄마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안아달라고 떼썼던 거야.
내 견생 통틀어 제일 잘한 일이었지.
집으로 간 뒤 전선 좀 물어뜯고 벽지도 좀 긁었지만
빨리 철이 들었던 건,
내 생떼를 받아준 엄마한테 보답하고 싶어서였어.
학원 일로 바쁜 엄마는 할머니한테 나 맡기고 나가면서 미안해했지만
엄마가 도와줘야 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거 잘 알고 있었어.
그 학생들이 시간이 흘러 대학 가고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 연락할 정도로
엄마가 열정과 애정을 쏟았던 거 잘 알아.
할머니 장례식에도 그 학생들이 많이 와줬다고 해서 뿌듯하더라.
나만 엄마의 큰 사랑을 아는 게 아니구나 싶어서.
늘 바쁜 엄마가 제일 좋아했던 시간이
퇴근 후 나랑 지내는 거였지?
그중에서도 나를 안고 잠들 때
엄마 마음이 제일 말랑말랑해졌던 거 알아.
근데 나는 최고가 없어.
그냥 집으로 간 뒤 모든 게 다 좋았어.
같이 산책하고 놀고 자고 그 모든 순간들.
그리고 엄마를 기다리는 시간조차도 행복했어.
엄마가 돌아오면
“엄마 보고 싶었어? 껌 주까?”
할 걸 알고 있었으니까.
아, 내가 목욕은 좀 많이 좋아했지.
목욕하자는 말 떨어지기 무섭게 욕실로 달려가
엄마 빨리 들어오라고 얼굴 내밀고 기다렸잖아.
근데 그런 내 모습이 귀엽다고 목욕할 때 아닌데도
자꾸 장난쳤던 거는 엄마 좀 나빴어.
근데 몇 번은 속았지만 나중엔 일부러 속아준 거야.
엄마가 환하게 웃는 게 좋아서.
내가 참새 쫓아 이리 펄쩍 저리 펄쩍 달려갈 때도
엄마가 그렇게 웃어서 계속 쫓았던 거야.
엄마는 내 차멀미 때문에
넓은 세상 더 많이 못 보여줘서 안타까워했지만
내가 본 세상은 좁았을지 몰라도 엄마의 넓은 사랑받았으니까 괜찮아.
엄마는 진짜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야.
나 있을 때 데려왔던 동생 마루 말고도
두 번 파양 당해 안락사 앞두고 있던 하루,
귤 사러 갔다가 강아지 팔러 가는 아줌마한테서 데려온 다루까지
차례로 동생들 입양했잖아.
엄마, 동생들 다 열 살 넘고 여기저기 아픈데
나처럼 병원 가기 싫어해서 걱정이 많지?
동생들이 왜 그런 걸 날 닮았을까?
내가 아파도 안 아픈 척하고
병원 앞에만 가면 납작 엎드려 버티고
엄마 퇴근할 때까지 볼일도 안 보고 기다려서
엄마 속상하게 만든 거 얼마나 후회하는데.
내가 애들 군기 좀 잡아줄까?
마루, 너 관심받으려고 일부러 기침하고 불쌍한 척하는 거 다 알아.
적당히 해라. 자꾸 그러면 코 길어진다!
하루, 동생이 기어오르면 왕! 한 번 해줘. 한 번 밀리면 계속 밀린다!
다루, 밖에만 나가면 완전 겁보면서 어딜 기어올라? 막내면 막내답게 굴어.
그리고 엄마 출근하면 자꾸 문만 바라보고 물도 안 먹고 그럴래?
그거 다 너만 손해다.
니들 셋, 잘 들어.
엄마 속상하게 하지 마라. 나중에 나처럼 후회한다.
어이, 삼총사! 엄마 잘 부탁한다!
사람들이 엄마가 늘 강해 보이니까
내가 떠난 슬픔을 어떻게 극복했냐고 물었잖아.
엄마는 괜찮아질 수는 없다고, 조금씩 무뎌질 뿐이라면서
다른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되새긴다고 말하던데
엄마가 책임을 너무 무겁게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
엄마는 나한테도 최선을 다했고
동생들한테도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혹시 동생들이 떠나더라도
엄마한테서 이유를 찾으려 하거나 후회하지 말았으면 해.
내가 여기 와보니까 우리가 떠나는 날은 원래 정해져 있더라구.
나 병원 입원 중에 엄마 못 보고 떠나서 속상했지?
내가 엄마 올 때까지 얼마나 버티고 싶었겠어?
근데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어.
그러니까 우리 맘대로 할 수 없는 일에 너무 마음 쓰지 말자. 알았지?
그때 엄마는 몰랐겠지만
차마 못 감은 내 눈 감겨주는 엄마 모습은 보고 떠났어.
그래도 내가 떠난 날이 성탄절이어서
해마다 엄마가 조금은 덜 슬프게 내 이름 불러줘서 다행이야. 그치?
엄마한테 부탁이 있어.
몸은 하난데 학원을 두 개나 운영하느라 너무 바쁜 엄마잖아.
동생들 챙기는 만큼 엄마 건강도 신경 써야 돼. 알았지?
옆에서 할머니가 엄마한테 할 말이 있대.
그대로 받아 적을게.
“엄마가 자식들 어릴 때 세상살이에 지쳐 사랑을 많이 못 줬던 것 같다.
너하고 오래 살면서 고마운 일이 참 많았는데 내가 표현을 못했네.
막내딸, 제일 미안하고, 제일 고맙다.”
나중에 할머니랑 할머니가 된 엄마가 만나게 되는 날,
우리 다 같이 마중 나갈게.
엄마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살다가 와~
그럼 안녕~
이 편지는 영국에서 시작된 게 아니고
'천국'에서 시작된,
행운의 편지가 아니고
'위로'의 편지입니다.
펫로스를 겪은 분들께 무지개다리 건넌
반려동물 시점에서 편지를 써 드립니다.
편지 신청 : revision0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