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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가족'에게

‘동물농장’ 섭외받았던 재간둥이 뭉치가

by 금강이 집사

이 편지는 천국에서 발송돼

무지개 미끄럼 타고 슝~ 배달된 편지입니다.


아빠, 엄마, 동생 안녕~

난 오늘 댕친들이랑 공놀이 한바탕 신나게 했어.

여기서 공놀이할 때마다 가족들 생각이 나.

공만 던져주면 내가 엄청난 집중력과 스피드로

우다다 달려가 물고 오던 모습 기억하지?

아마 멀리서 보면 하얀 솜뭉치가 바람에 날아가는 것 같았을 거야.



우리 마지막으로 공놀이하던 때가 벌써 십 년도 훨씬 넘었네.

아빠 엄마의 즐거움과 살아가는 이유의 대부분이었던 나를,

너무 갑자기 허망하게 떠나보내서 힘들었지?

아빠 엄마가 오랫동안 울다가 좀 괜찮아진 듯하다가도

순간 순간 내 빈자리 느끼고 슬퍼하는 모습 보면서 마음이 아팠어.

세 살이었던 동생은 내가 하늘나라로 갔다는 말을 이해 못해서

자꾸 나를 찾고, 묻고 또 물어서 아빠 엄마가 더 힘들었을 거야.






가족들과 함께한 오 년 남짓 시간은

비록 짧긴 했지만 매 순간 진한 행복이 농축된 시간이었어.

아빠 엄마도 내 깜찍, 발랄, 애교에 매일 행복 지수 갱신이었지?

심지어 너무 신날 때면 마운팅 하다가 혼나서

두 발로 벽 짚고 벌설 때도 내 귀염 지수는 최고였지?


내가 다른 댕친들도 다 하는 재주는 기본이고

‘인간극장’이랑 MBC 뉴스 시그널 음악만 나오면

하울링으로 화음 맞추던 독보적인 개견기도 있었잖아.

싸이월드에 올린 그 영상 보고 ‘동물농장’에서 연락 왔을 때

아빠가 카메라 울렁증 때문에 섭외 거절 안 했더라면

내가 전국적인 댕스타가 됐을지 몰라.

방송 촬영 무산된 게 아주 살짝 아쉽긴 하지만

난 아빠 엄마의 영원한 댕스타인 걸로 충분해.


내가 뭣보다 좋아하던 산책 중에 갑자기 떠나버려서

아빠 엄마를 더 슬프게 했지?

아파트 단지 안에서 아빠가 잠깐 줄을 놓은 사이

우다다 내달려 순식간에 아빠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잖아.

아빠와 연락받고 나온 엄마가 하얗게 질려서 단지 안을 헤매다가

혹시나 해서 가본 단지 밖 산책로에서

차에 치여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했지.

급히 나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

의사한테 내가 이미 떠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빠 엄마는 믿을 수 없어 했지.

내 몸에 온기가 그때까지도 남아 있었으니까.


아빠, 설마 아직도 내가 떠난 게

아빠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그러지 마.

내가 제일 사랑하는 아빠가 그런 자책하면 내가 너무 슬퍼.

여기 와서 알게 된 건데 그날 교통사고가 안 났더라도

난 어떤 방식으로든 같은 시각에 떠나게 돼 있었더라구.

태어나고 죽는 가장 큰 두 가지 운명은 다 정해져 있는 거래.


엄마, 처음엔 아빠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슬픔에 더해 심한 자책에 빠진 아빠에게

내가 오래 고통스럽지 않게 가서 다행이라고 위로해 줘서 고마워.

내가 엄마보다 아빠를 더 사랑하는 건 알고 있었지?

아빠 지인 집에서 태어난 나를 처음 품에 안은 것도 아빠였고

집으로 온 뒤 아빠 뒤꿈치만 따라다니다가

아빠 배 위에서 놀기 좋아했으니까 엄마도 눈치챘을 거야.

그래도 섭섭해하진 마.

엄마보다 딱 며느리발톱만큼만 더 아빠를 사랑하니까.


내 마지막 체온이 잊히지 않아 해마다 나 떠난 날이 돌아오면

그날 사건 얘기는 의식적으로 피하고

내 생일만 기념하는 아빠 엄마,

여기 와보니까 너무 오래 아파서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다가 온 댕친들은

깨발랄한 내 모습에 행복해하던

아빠 엄마만 보다가 온 나를 부러워해.

나는 가족들과 더 오래 같이 살았더라면 싶은데 말이야.

아쉬움이란 건 이래도 저래도 결국엔 남는 건가 봐.

아무튼 겨우 세 살이었던 동생 쑥쑥 크는 것도 보고

동생이 고집부려서 입양한 길냥이 새끼가

멋진 차도냥으로 크는 것도 옆에서 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어.



아빠 엄마, 동생 사춘기 때문에 좀 힘들지?

난 잘 자라준 동생이 정말 기특해.

삼촌 회사 창고에 새끼들 낳아서 기르던 길냥이가

건강한 새끼들만 데리고 떠나버려서 남겨졌던 아기 냥이를

집으로 데려가자고 고집 피웠던 동생이잖아.

똥고집 아니고 따뜻한 마음이 담긴 이유 있는 고집에

나 떠난 뒤 다시는 반려동물 입양 안 하겠다던 아빠 엄마도 결국 설득당했잖아.

동생이 아기 냥이 신비로운 눈을 보면서 좋아하는 동화를 떠올리고

‘오즈’라는 이름을 지을 정도로 생각도 반짝이는 아이잖아.

곧 오즈의 마법으로 동생 사춘기도 끝나고 가족들 모두 웃을 일 더 많아질 거야.


마법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어쩌면 우리 가족은 오래전부터 마법으로 연결됐을지도 몰라.

나랑 동생이랑 오즈가 아빠 엄마를 만날 때마다 항상 묘한 힘이 작용한 것 같거든.

인연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신비로운 힘 말이야.

아빠 엄마가 사랑의 마법사인가 봐.

앞으로도 나한테 못다 준 몫까지 다 오즈랑 동생에게 사랑 많이 뿌려줘~



시크하면서도 애교와 사랑 가득한 오즈야!

이 형아가 가족들과 함께 있는 네 모습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어.

내가 담당했던 가족들 행복 지수 높이는 역할 맡아줘서 고마워~


내가 가족들 최근 모습까지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는지 궁금하지?

여기선 예전에 즐겨보던 인간극장 대신 ‘가족극장’ 잘 보고 있거든.

앞으로 동생이 사춘기 잘 넘기고 멋진 성인이 되는 모습,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 계속 지켜볼게! 안녕~







이 편지는 영국에서 시작된 게 아니고

'천국'에서 시작된,

행운의 편지가 아니고

'위로'의 편지입니다.

펫로스를 겪은 분들께 무지개다리 건넌

반려동물 시점에서 편지를 써 드립니다.

편지 신청 : revision0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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