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친구들과 즐거운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을 만나며 모든 게 악몽으로 바뀌었다. 그는 40대에 유부남이었고 수업시간이 되면 내 쪽을 쳐다봐서 기분이 이상했다. 그냥 기분상이라 넘겼는데 어느 날 나를 따로 불러 집에 데려다준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진로 상담이라 했다. 혼자는 싫고 친구와 같이 가겠다고 하자 안 된다고 했다. 단호하게 싫다고 하니 온화하던 눈빛이 살벌하게 변했다.
그 후에도 몇 번 밥을 같이 먹자고 했지만 거절했다. 수업시간에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고, 멀리서 보이면 일부러 피했다. 어느 날부터 반에 어떤 일이 있으면 나와 상관없는데 괴롭혔다. 다른 친구가 잘못한 일을 그 친구가 나와 친하다는 이유로 같이 벌줬다. 너무 힘들었다.
그 당시엔 어디 신고할 곳이 없었고 그저 친구들과 험담이 다였다. 일 년 동안 괴롭힘에 시달렸지만 최대한 무시하며 견뎠다.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아주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학교 행정 직원과 바람나서 학교에서 잘렸다고 한다. 어느 정도 예상된 소식이어서 놀랍지 않았다.
아주 다행히 삶에서 어두운 면을 경험했을 때 얻는 것들이 있다.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또라이가 많고 내가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피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 자신의 권력이나 자리를 이용해 상대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합리적이지 않는 일들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한다. 현실에선 어렵지만 이야기에서는 가능하다.
책 『피터팬』은 많은 사람들이 잘 아는 이야기다. 웬디와 남동생 둘이 피터팬을 따라 네버랜드로 날아가는 이야기다. 누구나 네버랜드 같은 상상을 한 번쯤 해본다. 나도 그랬다. 밤하늘을 날아가 미지의 세상을 구경하고 마음껏 하고 싶은 걸 펼치고 싶었다.
이룰 수 없지만 내가 꿈꿔온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다른 세상으로 날아가는 것과 늙지 않는 것이다. 삶이 힘들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뒤로 하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 그리고 젊음을 유지하고 싶다. 젊을 때 할 수 있는 기회들을 누려보고 싶다. 만약 내가 두 가지를 얻는다 해도 마냥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현실에 남아있는 가족이나 친구들을 내버려 둘 수 없다. 주위 사람들이 나이 들어가는데 혼자만 젊다면 잔혹한 고통이다.
가상의 이야기에서는 모두 가능하다. 책 『피터팬』에서 이룰 수 있다. 그곳에 늙지 않는 피터팬이 있다.
영화, 피터팬
과장이 아닌 게 피터는 잠시 떠나 돌아오면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곤 했다. 그렇지 않대도 어렴풋하게 기억할 때가 많았다. 웬디는 확실히 눈치를 채고 있었다. 낮이 된 후 한 번은 그들을 그냥 지나치려다 가까스로 알아보는 것을 피터의 눈을 보고 알아차렸다. 피터의 이름을 큰소리로 불러야 했던 적도 있었다. _제임스 매슈 배리 『피터팬』
인간관계에선 작거나 큰 상처를 주고받는다. 피터팬이 자유로워 보이는 이유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에게 인간관계는 항상 처음과도 같았다. 그는 억울했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해 두려워하지 않고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부러울 것 같아 보여도 단점이 있다. 상대가 나를 잊는데 기분 좋을 리 없고, 위험한 사람이라는 인지가 빨리 되지 않는다. 단, 후크에게는 달랐다. 후크는 그에게 싸움의 대상이었다.
피터와 소년들이 후크와 치열하게 싸우고 나서 반응이 놀라웠다. 피터팬은 죽는 것도 모험이라 했다. 목숨을 담보로 죽는 것을 모험이라 하는 여기는 사람을 절대 이길 수 없다. 웬디가 해적에게 붙잡혀 피터가 구하러 갈 때도 온몸에 전율이 일며 행복하다고 했다. 순탄하지 않은 것들도 그들에겐 하나의 모험이었다.
누군가는 피터가 철이 없다거나 생각이 없다고 느낄 수 있다. 나도 그랬다. 어른이 되고 피터팬을 보니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 많았다. 너무 단순했고 진지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피터팬은 이야기의 주인공이지 실제 인물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에 둘도 없을 만큼 매정하게 달아나 버리지만, 그런 게 또 아이들의 성정이고, 그럼에도 참으로 귀엽다. 우리는 더없이 이기적으로 굴다가도 각별한 관심이 필요해지면 당당하게 돌아가서 요구하며, 그럴 때 엄마에게 매를 맞는 게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보답받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_제임스 매슈 배리 『피터팬』
영화, 피터팬
다른 사람 신경을 쓰지 않고 무턱대고 당당하면 안 된다는 걸 어린아이가 아닌 이상 안다. 성숙하지 못한 행동을 한 사람은 자기가 한만큼 결과를 맞이한다.
어린 시절엔 어른이 되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가진다. 막상 어른이 되어도 제약이 많다. 아마 성숙한 어른으로 신중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일종에 강박 때문이지 않을까. 스스로가 쌓아놓은 핑계들로 날아오를 수 있는 기회를 잘 보지 못한다.
해서는 안 될 일을 잘 구분하는 것도 어른이다.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고 나로 살아가는 건 쉽지 않다. 피하고 싶은 것을 피하고 싶고,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고 싶을 때가 있다. 지옥 같은 현실을 벗어나고 싶지만 그 누구도 나를 구해주지 않을 때가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고 알게 된다. 힘겨운 현실이 영원이 아니기에, 아주 가끔은 네버랜드를 꿈꾸며 살아갈 힘을 얻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피터팬처럼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피터팬은 목숨을 걸고 후크와 맞서 싸운다. 이 세상에서 바꿀 수 없는 것들과 맞서 싸우고 싶지만 내가 가진 것을 걸고 잃을 만큼 가치 있는지 신중해야 한다. 모험이 아니라 목숨을 거는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상처받지 않으려면 마음 근육을 키워야 한다.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믿고, 만약 내가 타격을 입어도 꿋꿋하다는 걸 상대에게 보여줘야 한다. 오로지 바꿀 수 있는 건 마음에 숨겨져 있는 날개를 펼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