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간절히 행복해지고 싶었다. 어떻게든 아픔과 멀어지고 싶었다. 행복을 원할수록 멀어지는 것 같았다. 나와는 이어질 수 없는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심각하게 우울할 땐 아침에 눈을 뜨는 게 가장 괴로웠다. 밥을 먹는 것도 대화를 하는 것도 힘들었다. TV를 보면 나와는 다른 세상이야기고 즐겁지 않았다.
처음엔 아무 이유 없이 우울하다고 여겼지만 아니었다. 나는 책이라는 창으로 나를 봤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못나 보이는 내가 있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갔다. ‘나는 쓸모없는 존재야.’ 라는 생각까지 닿으면 손발이 묶여 어두움 속으로 던져지는 것 같았다.
우울함의 이유를 안다고 해서 변화가 온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을 ‘알아차림’과 ‘모름’은 큰 차이가 있었다. 나는 스스로를 보기 시작했다.
예전엔 우울함이 곧 불행인 줄 알았다. 우울하지 않으면 온통 기쁜 일들이 넘쳐날 줄 알았다. 우울의 반대말이 행복인 줄 알았다.
오랜 시간 우울증을 겪었지만 우울한 상대를 만나면 조심스럽다. 내가 아는 고통이라고 해서 나와 같은 감정을 겪는 게 아니다. 그 사람만의 고유한 감정이 있다. 듣다 보면 정말 많은 부분이 다르다는 걸 느낀다.
안다고 해서 아는 척한다면 위험하다. 이야기를 다 듣지 않고 ‘알지, 내가 그 아픔을 다 알지.’라고 말하거나 ‘그건 산책으로 치유해야 해.’라며 섣불리 말을 끊거나 해답을 제시하지 말아야 한다. 알지만 너무 어렵다. 몇 번을 참다 말하면 상대의 마음엔 파도가 휘몰아치는데 잠잠하라고 다그치는 겪이 되어버린다.
우울함이 완화되어도 여전히 힘들다. 작가가 되어도 여전히 사람들의 가시 돋는 말에 아프다. 게다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게 낯설고 두렵다. 마음이 아픈 사람에게 큰 문제가 아니고 언젠가는 해결될 거라는 조언을 할 처지가 되지 못한다. 어떤 말이 힘을 싣는 위로가 되는지 잘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삶의 중심이 되는 프로젝트는 고난과 희생을 수반한다. 마냥 쉬운 일이라면 굳이 노력할 의미가 있을까? _폴 블룸 『최선의 고통』
책 『최선의 고통』은 어느 정도의 고통이 더 좋은 생각을 가지게 만들고 그걸 통해 가치 있는 삶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다른 책과는 달랐다.
일부러 불행이나 고통을 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불행을 선택하고 있었다.
우울하다가 잠시라도 웃을 일이 생기면 너무 불안했다. 다시 감정의 나락으로 떨어질 걸 알기에 내게 어울리지 않다고 여겼다. 마음이 바닥을 치고 있으면 떨치고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벗어날까 봐 두려웠다. 고통이 사라지면 분명 기쁜 일인데 그렇지 못했다. 언제 다시 닥칠지 모르는 고통을 상기시키지 않으면 더 불안했다. 나도 모르게 고통을 선택하고 있었고, 우울함에 익숙해져 있었다.
행복이라는 집착을 놓았다. 우울함이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게 아니었다. 우울함에 대한 나의 시선이 바뀌었다.
내게 오물이라도 붙은 것처럼 우울함을 대했지만 더러운 게 아니었다.
행복과 우울은 같이 산다. 동떨어진 감정이 아니다. 극과 극에 몰려있는 감정도 아니다. 때로는 작은 일에 행복할 수 있고 우울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즐거울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끔찍할 것이다. 달리 말해 뒤이어 고통이 사라지는 경험이 너무나 기분 좋게 느껴지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다치게 하는 일이 긍정적인 경험이 된다면, 우리는 수많은 방식으로 일부러 자신을 다치게 만드는데 많은 시간을 들일 것이다. 그러면 절대 사춘기까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_폴 블룸 『최선의 고통』
심각한 우울함에 빠졌을 때 내 몸 어딘가에 다쳐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침 넘어져 이마와 팔꿈치에 피가 흐르는데 전혀 아프지 않았다. 희한했다. 겉으로 피가 나니 사람들이 내게 관심을 가졌다. 나아지는 게 점점 불안했다. 아마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플 때라 그런 것 같다. 어쩌면 관심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내 감정과 몸을 제대로 사랑해주지 못했다. 모든 감정을 적절히 느끼고 싶지만 낯설었다. 좋은 일엔 심하게 들뜨고 나쁜 일엔 세상의 끝에 다다른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였다. 우울함을 어찌할 수 없다고 인정하니 더 이상 고통이 아니었다. 누구나 고민할 수 있는 거였다.
어느새 우울함이 심각한 문제가 아닌 하루 이틀 정도 골머리가 아픈 정도가 되었다. 삶의 막바지에 이르는 고통이 아닌 일상이 되어갔다.
우울함이 글 쓸 때 좋은 영감이 되어주기도 했다. 무겁고 가라앉은 기분을 고요하게 지켜보다 보면 희한하게 계속 글이 술술 써졌다.
철학자인 팀 베일은 ‘삶의 의미는 죽어 있지 않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이 의미를 갖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_폴 블룸 『최선의 고통』
내가 뭔가를 하고 있어야만 좋은 결과를 가져야만 살아있는 의미가 되지 않는다. 고통이 함께해도 의미가 된다. 모든 것엔 장단점이 있다. 편안함이 행복만 주는 게 아니다. 편하지 않고 긴장하며 집중하는 시간이 만족을 주기도 한다.
힘든 일엔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다. 때로는 내 인생이 너무 지겹고 버겁다. 반대로 힘든문제 뒤엔 해결할 능력이 생긴다. 앞으로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게 해준다.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프로젝트일수록 피곤하고 힘들다. 스트레스가 더 쌓이는 기분이 들지만 결과가 좋으면 뿌듯하다.
내 안엔 '행복과 우울, 고통과 기쁨'이 함께 산다.우울하지만 내일을 기다리고, 힘들지만 나와 다른 사람의 인생을 기대한다. 너와 나는 최선의 고통을 견뎌가고 있다. 인생은 우울하지만 살아갈만하고, 행복하지만 힘들 수 있고, 아프지만 웃을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다.